1930년대의 아시아 단편에 관해
2014/02/16
시간이 흐른 물품에서, 처음의 철골 건축에서, 초기의 공장 건축에서, 옛날 사진에서, 없어진 물건에서, 큰 피아노와 5년전의 양복에서, 시대에 뒤쳐진 호텔에서, 그는 혁명의 에너지를 보았습니다.
Walter Bendix Schönflies Benjamin
노스탤지어는 과거를 그리워하는 것, 모더놀로지는 과거에 대한 이해를 현
재에의 전용(転用)이다. 라고 한다면, 현대 작품 안에는 노스탤지어와 모더
놀로지의 융합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기묘한 타임머신과 같이, 이 레포트
의 시간 축을 1930년으로 설정한다. 예술가는1930년대를 중심으로 노스탤
지어와 모더놀로지를 어떻게 이루었는가를 고찰하고, 그것과 동시에 아시아
의 현재 상황에서 출발하여, 결론도 아시아에 멈춘다.
일반적으로 노스탤지어라는 생각은 낡은 것에 착목하는 것에 지나지 않고, 물건의 질감을 타임머신이라도 된 듯, 시간에서 태어난 거리감과 에너지를 다시 파악한다. 하지만, 만약 우리들이 앤틱 상인(商人)적인 시야에서 벗어나 한번 더 고사해 보면, 노스탤지어의 기분이 제일 일어나기 쉬운 것은 사람의 변화. 즉, 인간의 태도나 생활스타일은 돌이키기 어려운 것이다. 다시말해, 시간의 교차를 제일 느끼는 것은 생명 형태의 변화 일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에 나오는 말처럼 「1910년 이후, 사람에게 격변이 일어났다」 현대사회는 옛날 사람이나 생활스타일에 조금씩 침투되어 돌이키기 어려운 변화를 일으켰다.
아시아의 생명 형태의 변성(変成)을 나타낸 소설에는 「명인(名人)」이 있다.이 작품은 작가인 카와바타 야스나리(카와바타康成)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것으로, 굉장한 기교의 작품으로 불리고 있다. 1938년 6월 부터 12월에 일어난 「홍인보우 슈우사이(本因坊秀哉) 은퇴시합」이 모델. 신문의 보도나 철학적인 분석, 객관적인 논평을 종합해, 추상적인 타임머신으로 만든 카와바타는 몽타쥬와 같이 이 슈우사이 명인과 오오타케 시치단(大竹七段)의 바둑시합을 표현했다. 슈우사이 명인은 집중력을 보이면서 느긋한 분위기를 보인다. 병으로 3개월의 휴가를 보내지만, 느긋한 분위기는 여전하다. 슈우사이에게 있어서 바둑은 예술작품이며, 잘난 척 하지 않는 태도에서 바둑시합에 임한다. 시합이외의 시간은 하나미(花見, 꽃놀이), 당구, 마작이나 친구를 만나는 등으로 기분전환을 하며, 스트레스를 해소한다. 그 반대로, 오오타케 시치단은 살의와 같은 분위기를 가진 자로, 전장(戦場)에서 싸우고 있는 전사와 같이 날카로운 감각과 빠른 움직임에서 긴장감을 풍긴다. 휴식 시간에도 바둑을 계속 생각하며 조금도 기분을 늦추지 않는다. 결과, 30살의 오오타케 시치단은 5번째 하얀 바둑알을 가진 명인 슈우사이에게 이기고, 1940년 1월 시합 종료 후 얼마지나지 않아 슈우사이는 병으로 사망한다.
카와바타에게 있어서 65살에 타계한 슈우사이는 한 시대의 종료를 의미하고 있는 것 뿐 만 아니라, 아시아에 있어서 미의식에의 최후의 카운트펀치가 되었다. 카와바타에게 있어서 노스탤지어는 꺼져가는 품성에 대한 고찰이 아니라, 인격과 생명의 지표가 된다. 바둑 시합 도중, 갑자기 이탈하거나 부채를 부치거나, 머리를 들어 정원의 풍경을 바라보거나, 그런 슈우사이의 정신에 대해 아쉬움을 가지며, 예술의 길을 걸어 온 슈우사이에게 존경의 마음을 가진다. 오오타케에 관해서는 아시아의 현대화에 있어서 웨스턴의 훈련에 지나지 않는다. 살인을 느끼게하는 괴물이라 해도, 수단을 가리지않고 규정을 지키는 기계와 같다고 말 할 수 있다. 따라서 카와바타 소설의예술구조는 그 자신의 미학적 감성에 따른 것이다. 그의 소설은 현대 아시아의 타임머신이 되고, 노스탤지어가 아닌 오래된 좋은 미학이 현대에 이어지고 있다. 즉, 노스탤지어는 모더놀로지가 된다.
2007년 연말에 타이페이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전람회 「명인-카와바타 야스나리를 따르다」에서, 수메체(Tse Su-Mei, 謝素梅)는 카와바타의 미학철학을 인용, 현대예술과 「예도(芸道)」정신의 관련성을 나타냈다. 바둑판의 선은사라지고, 바둑돌은 무한 공간 안에서 대결했다. 유럽의 룩셈부르크에서 재주하고 있는 화인 예술가에게, 그녀의 모더놀로지 안에는 아시아 예술정신의 가치가 없다고 평 받았다. 이것은 한번 더 호소 할 만한 과제이며, 노스탤지어라는 것에서 멀리떨어져 모더놀로지를 통해 예술의 실천과 창조를 해나간다.
나는 큐레이터로서 동경의 레지던스・동아시아・다이얼로그(r:ead)에 참가했다. 동경예술대학의 카츠라 에이시(桂英史)교수는 모더놀로지 연구에 있어 현대적인 힌트를 세가지 제안했다:공원, 조각, 암시장.
나는 야스쿠니신사의 오오무라 마스지로우(오오무라益次郎)의 조각을 보러 갔다. 오오무라는 일본의 육군을 확립한 인물이다. 유우슈칸(遊就館)에서 제로전(戦)의 전투기를 보고, 오시이 마모루(押井守)의 영화「타치구이시레츠덴(立喰師列伝)」을 봤다. 전후 식량부족에 따른 신바시(新橋), 시부야(渋谷),신주쿠(新宿) 주변에 있는 암시장의 실태나, 당시 화교인과 조선인, 일본인 사이에서 일어난 토지관리의 분쟁 등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동시에 신바시의 현상(現状)도 고찰했다.
그 중에서 제일 흥미가 있었던 것은 우에노(上野)공원이다. 대만총독부의 건축사 「모리야마 마츠노스케(森山松之助)」는 1907년 우에노공원에서 열린 「내국권업(内国勧業)박람회」에서 「대만파빌리온(pavilion)」을 담당해, 절대적
인 평가를 받았다. 특히, 「대만 찻집」의 설립은 혁신적이었다. 그때 마침,
대만총독부는 신청사의 설계 공모를 하고 있었다. 모리야마는 적극적으로 그 공모에 참가해, 공모에서 이긴 모리야마는 대만에서 신청사의 공사주임으로 부임했다. 현재는 안타깝게도 당시의 「대만파빌리온」의 모습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1929년 조선박람회의 대만파빌리온이나, 1935년 타이페이 에서 이뤄진 「시정(始政)40주년기념 대만박람회」, 1936년 기후(岐阜)에서 이뤄진 「약진(躍進)대일본박람회」 및 「후쿠오카시(福岡市)하카타시(博多市)
박람회」 등, 남겨지지 않은 「대만파빌리온」은 대만산물이나 식민지문화의 상징으로 빛났었음에 틀림없다.
과거의 풍경이 더이상 남아 있지 않음에 당황스러움도 있었지만, 타카야마 아키라(타카야마明)씨가 제작한 「동경헤테로토피아」는 나에게 조금의 희망을 가져
다 주었다. 독일에서 연극을 공부한 타카야마씨는 현재 동경에 있는 아시아 각국의 정치난민이나 이민 등과 관계하는 13개의 지역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이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 프로젝트의 컨셉은 「동경에서 아시아를 찾다」. 이른바 걷는 「여행 연극」이다. 참가자는 가이드북과 휴대라디오를 손에 들고 여러 공간을 방문한다. 목적의 장소에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예전에 그 장소에서 살고 있었던 사람, 연(縁)이 있는 도시나 나라의 이야기. 관객은 미
지의 아시아, 그리고 헤테로토피아로서 동경과 만난다.
먼저, 동경예술극장의 지하에 있는 츠키치(築地)소극장. 혁신적인 아시아
연극 공연이 다수 이뤄졌던 극장이다. 예를들어, (구)러시아 연출가 트레티야
코프(Tretiakov,1892- 1939)의 「외쳐라, 중국(叫ぼう、中国)」은 1929년 부터 이 극장에서 공연되었다. 또, 조선독립운동의 대표 극장작품「김옥균」은 1928년
부터 이 극장에서 공연되었다. 그 외에, 저우언라이(周恩来)가 1917년 일본에 유학왔을때, 칸다진보쵸(神田神保町)의 「칸요로(漢陽楼)」에서, 고향의 맛인 고기만두를 먹기 위해 자주 들렸다. 54살의 메이지(明治)대학 교수, 스가케이
지로우(菅啓次郎)는 1976년의 「제 1회 천안문사건」을 중심으로 한 작품을 제작, 라디오 방송으로 나왔다.
13개 장소의 작품 중, 제일 흥미로웠던 것은 이케부쿠로 카나메쵸우(池袋
要町) 근처의 왕가(王家)의 묘. 대만 이민자 옹유주우(温又柔)가 만든 작품의 중심인물은 대만의 언어학자, 독립운동의 추진자인 오우이쿠도쿠(王育徳)
(1924-1985). 1957년에 출판 된 오우이쿠도쿠의 저서이자 세계최초였던 「대만
어 상용단어」를 소재로 한, 오우이쿠도쿠의 이야기이다. 오우이쿠도쿠는 일본
에서 유학, 대만어에는 발음표기가 없다는 것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제2차세
계대전 중 재학했던 동경대학 중국철학 박사과정을 중단하고 대만으로 돌아온
다. 그 후, 타이난 제1고교에서 교사가 된다. 대만어로 현대연극을 창작했다. 하지만 그 후에 일어나는 228사건 와중에, 홍콩 경유로 일본으로 망명했다. 그 후, 박사과정에 복학하여 1969년 동경대학 역사상 최초의 대만 인문학박사
가 되었다. 1960년 코우쇼도우(黃昭堂), 료우켄류우(廖建龍) 등의 6인과 「대
만청년사」를 설립. 그와 동시에 「대만청년」의 일본어판을 출판했다. 오우이쿠
도쿠는 생애, 대만어나 대만독립운동에 몰두하며 1985년 동경에서 서거했다.
나는 예술가인 옹유주우 작품의 구체적인 내용은 모르지만, 대만인으로서 이케부쿠로라는 기묘한 장소에 「so close ,so far」라는 감정을 가진다. 내가 머물
렀던 호텔은 니시(西)이케부쿠로에 있다. 츠키지소극장이 있던 곳에서 1킬로
미터 정도의 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현재 살고 있는 환경과 나 자신
이 태어나 성장해 온 환경과, 이 아시아사(史)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가지
고 있는 장소는 굉장히 멀고 보이지 않는 장소라고도 말 할 수 있다. 타카야
마 아키라라는 아티스트는 노스탤지어를 모더놀로지로 변화시켰다. 팜플렛과 라디오를 한 손에, 라디오를 통해 들려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알려지지 않
은 도시의 이야기에 빠진다. 마음을 가라 앉히고, 아시아의 혁명역사의 감정
을 감능(堪能) 할 수 있다.
「동경헤토로피아」라는 아트 프로젝트는 1930년대의 세계극장:유럽을 생각나게 한다. 2012년에 행해진 카셀 도큐멘타에서 캐나나 출신의 예술가
Janet Cardiff&Georges Bures Miller가 오래된 역 Kassel Alter Bahnhof에 만든 작품
Alter BahnhofVedio Walk는 타카야마 아키라의 「동경헤테로토피아」를 방불케 한다.
Cardiff작품 중에 나타나는 노스탤지어도 도회고현학(都会考現学)적인 의식이 있다. 그녀는 스마트폰에 보존되어 있는 영상을 매개로 역사, 소설, 음악 그리고 댄스 퍼포먼스 등의 이질적인 수법을 통해, 현지에 설치되어 있는 다큐멘트 인스털레이션(Installation)의 도선(導線)에 의해, 감상자를Kassel Alter
Bahnhof역과 홈의 사이에서 방황시켰다. 이러한 현실과 가상이라는 이중성 안에 헤테로토피아적인 감각이, 점점 형태로 되어 간다. 그 중에, 30년대에 있었던 강제수용소에 유대인을 보내는, 개인과 집단의 역사집합(歴史集合)의울림은, 차가운 시공을 넘어서 이 역의 7번 홈에서 확실하게 들리는 것 같이마음 속 깊은 곳에서 열광적인 기분을 불러 일으킨다.
이 Cardiff의 작품에 대해, 타카야마 아키라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는 현지에서 스마트폰 영상을 감상하고 있을 때, 비틀거리며 걸어가던 한 신
체장애자가 그를 스쳐지나간 것을 경험했다고 한다. 그 순간, 노스탤지어의 정서는 현실 상황이 개입되면서 중단되고, 두개의 세계가 공명을 시작, 전류가 흐르는 것과 같이 그의 전신을 찌릿찌릿하게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강렬한 감각이 있어도, 타카야마씨는 이 작품(「동경헤테로토피아」」에 대해, 전람 기획으로의 출발점은 전혀 다른 방향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타카야마 작품의 발상은 옛날 극장에 있는 관객과 연동성, 혹은「theatre」라는 낡은 단어의 의미에서 시작되고 있다. 다시말해, 그가 목표로 했던 것은 현대 극장과 같은 단순한 「연출」이 아니라, 관객이 「연출」의 일부가 되는 것을 원했다. 그 결과, 타카야마가 주시하고 있는 것은 극장의 초점을 관객에게 돌리고, 그리고 연출 후에 관객들의 대화가 활성화되는 것이야말로, 그의「관객론」의 고찰이다. 그러므로 아티스트가 노스탤지어와 고현학을 작품 안에서 교차시키는 의의는, 단순하게 멀리서 보는 프로젝트로서 신체의 무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드라마틱한 연극적인 효과를 만들면서, 스스로가 참가하는 「정치성」을 통해, 관객을 한번 더 사회와 연결하는 것을 의도했다.또한, Kader Attia라는 작가의 「The repair from Occident to Extra-Occidental Cultures」라는 마이크로박물관의 작품이 있다. 이 작품은 전쟁, 의학 그리고 식민지역사 등의 매개로 인해, 노스탤지어를 현대창조의 지식, 공간 그리고 프로젝트 배치의 레벨까지 전환시켰다. Geoffrey Farmer가, 35년부터 85년
까지, 50년간의 잡지 『ライフ』를 편집해 인스털레이션 한 작품「Leaves of Grass」은 전통적인 길을 따라, 전통적인 박물관에 있는 아이러니한 비쥬얼 전시의 수법이었다. 한편, 타카야마씨의 시점에서 출발한다면, 현대의「아시아」에 있어서의 경험에 의해, 고현학이 표현될 수 있는 「아시아성(性)」, 역사와 현재의 교차에 의해 태어난 다양성과 풍부한 층은, 아마도 현재 유럽에 있어서의 직선적인 역사발전을 능가 할 것이다.
말 할 필요도 없이, 노스탤지어와 고현학에 닿으면, 역사적인 상처와 국제문제에 직면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아시아에 있어서 다언어와 다민족에 의해 태어난 역사의 지층은 무엇보다 우리들이 주목해야 만 할 것이다.
동경에 체재했던 동안, 록봉기(六本木) 모리미술관의 10주년전을 견학했다. 큐레이터 카타오카 마미(片岡真実)가 기획한 「out fo doubt」. 쉐다친(謝徳慶)의 저서 『out of time』의 시점을 흉내내어 생각해 보면, 이 전시 테마는 「회의무용(懐疑無用)」이라고 볼 수 있지만, 실제로 「회의에서 태어나다」라고도 바꿔 말 할 수 있다. 사진가 나카히라 타쿠마(中平卓馬)의 작품도 있었고, 나카무라 히로시(中村宏)의 오키나와 전쟁에 관한 그림, 대만과 이란의 전쟁기지, , 포스트전쟁에 대해 모델올로기를 실천한 시타미치 모토유키의대만과 아시아 각지의 토리이(鳥居)를 방문한 작품도 있었다. r:ead 일본팀의 프레젠테이션에서 시타미치 모토유키 작품에 대해 들었다. 그는 기지(基地)와 토리이의 현상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자신의 할아버지를 테마로 한 「일요일의 그림」과 같은 창작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것들은 아트의 힘을 빌려 현대 유적의 모델올로기를 실천한 시공과 교차하는 집단(Assemblage)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재밌는 것은 젊은 예술가인 시타미치 모토유키의 작품은 이때 모리미술관뿐 만 아니라, 타이중의 국립미술관에서도 「아시아 2년전(展)」에 전시되고 있었다. 소문에 의하면 기랑인잔(宜蘭員山)의 제로식비행기지는 대만예술가 카오쥰혼(高俊宏)에게 추천 받았다고 한다. 덧붙여서 말하자면, 일련의 노스탤지어와 모델올로기의 토론을 끝내고, 나는 카오쥰혼의 작품의 파워풀과 루트는 앞서 이야기 한 작품과 비교해, 뒤쳐지지 않고 살아있는 분위기는 충분히 주목 받을 만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카오쥰혼이 2010년에 발표 한 톰슨(Thomson)영상시리즈 안에, 대만 자동차의 멘테넌스 공장이었던 폐허에 숯으로 그려진 벽화가 있는데, 그곳은 영화감독 차이밍량(蔡明亮)의 영화 「떠돌이 개(Stray Dogs, 郊遊)」의 로케지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대만 예술업계에서 유명하다. 그의 작품은 목적성이 없고, 2013년 성품(誠品)서점 갤러리에서 「우리들은 너무 열심히 일하고 있지 않은가」라는 개인전을 발표했다. 대만10군데의 현대 폐허에 숯으로 그려진 벽화를 전시해 굉장히 호평을 받았다. 카오쥰혼의 「폐허 영상 숯그림 계획」은 1930년의 소절(小節)이 존재하고 있다. 그 소절은 예전 인잔전기기지(員山戦機基地)의 제로식비행기의 카미카제 특공대를 경험한 대만 국적의 파일럿 장정관(張正光)이다. 그 외에, 폐허의 역사를 앞으로 돌리면, 「해산(海山)탄갱폐허」 「대만차량수리소폐허」등 벽화의 단체, 자유주의의 칼럼이나 유족의 인터뷰 등, 여러가지 활동으로 발전했다.그러한 활동을 통해서 노스탤지어는 애수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대만 지경(地景)구조의 고찰과 재구축으로 되지 않을까.그것과 동시에 국립미술관에서 전시했을 때 카오쥰혼 본인이 탄갱노 동자의 옷을 입음으로서 「몸으로 전달하다」라는 행위를 실천했다. 예술가는 현실과 역사의 사이에 있는 상처를 메워주어, 신체 레벨의 대화로 태어난다. 아마도 노스탤지어의 본질은 어떤 것으로 메워지는 것이 아니라, 모델올로기를 필요로 한다.
「폐허 벽화 계획」은 현재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있다. 제국주의의 역사사진,
식민전쟁의 상처, 현대공업의 유적, 갤러리 공간, 미술관의 공간, 아시아의 유
대, 여러가지 자기분석, 대형의 제국주의와 이상(異常)한 아시아 정치와의 교
차에 있어서, 기묘한 헤테로토피아가 되어, 예술적인 행동으로 되어 간다. 193
0년대의 격동의 아시아사(史) 안에서 사람들은 「관객참가형」의 방법을 통해 회복했다. 노스탤지어와 모델올로기의 정치학은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공
공공간의 사유화를 피상적으로 비판한다. 그 결과, 예술가가 계획을 세우고 국민이 참가하는 것에 대해 가능성을 느낀다. 우리들은 어떻게 하면 현대예술주의의 스테레오타입에서 벗어나, 아시아 현대예술의 「노스탤지어와 모델올로기」를 성립 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을 때, 이것은 아직 갈 길이 멀다고생각되어진다. 사람들이 폐허극소(劇所)를 방문해, 스스로 참가, 체험하고 논의 하는 것. 무정부, 탈식민, 국경을 넘어서,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폐허를 재생하는 길이 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