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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란화(玉蘭花)』와 할아버지의 소리

2015/01/21

실제로 있었던 과거를 그대로 재현(再現)하는것은 결코 있을 수없다. 왜냐하면 재현은 모두다 잠정적인것이며, 다양한 해석에 좌우되기 때문이다.사실 그 자체를 더이상 말하지는 않는다(……) 역사에있어서 역사를 만들어내는 과정과 마주보지않으면 안 때가왔다 (셸리 와리아)

r:ead의 제3회째가 대만,타이난에서 개최된다고 소마치아키(相馬千秋)씨의 전화로 들었던것은7월 중순이었다.
“-온씨 일본의 아티스트로서 참여해주시겠습니까?”
소설가인 자신이「아티스트」로「r:ead #3」에 초빙된다는것도 어딘가 어색했지만, 그것보다 자신이 「일본」을 대표하는 사태에 나는 가벼운 현기증을 느꼈다.어쨌든 나는 「일본」에서 자란 「대만」사람이다. 그러므로, 「일본」과 「대만」이라는 두나라 사이에서 어느 나라도 자신의 나라이며 동시에 자신의 나라가 아닌것을 느끼고있는것이다.
다시한번 강조하고 싶은 것은,내가 자기스스로를 설명할때,나는 일본에서 자란 대만인이라는 요소와 내가 일본에서 자란 대만인을「대표」해서 말하고 싶다는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일본인」「대만인」 또는 「일본 에서 자란 대만인」.
나는 내 자신이 그 모두를「대표」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다. 말하자면 나는, 자기 자신을「대표」하는것 만으로도 힘에 부치며, 그것조차 부담을 느낄 정도이다. 그런것을 나는 확실히 소마씨에게 말했다. 소마 씨의 반응은 재빠르고 따뜻했다.
“-그런 온씨 이기에 꼭 참여를 부탁하드리고 싶어요.”
그리고 대화는 나의 큐레이터 역할에는 누가 좋겠스냐에 이르렀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오오카와 케이코(大川景子)였다.
『이경(異郷)속의 고향 – 작가 리비 히데오52 년만의 타이중 재방-』(2013)의 감독이다.
이 영화의 제작을 계기로 우리는 알게 되었다. 그녀가 거의 혼자 촬영 편집 완성시킨『이경속의 고향』을 처음 봤을때 나는 감동했다. 피사체에 대한 거리,소재의 편집을 통해 작품을 구축하는 감성……영상작가로서 그녀의 역량에 감격을 한것이다. 다행히 나는『이경속의 고향』의「관계자」로 오오카와감독과 함께 영화 상영회를 해왔다. 각 지를 돌아서니 우리는 급격히 친해졌다. 함께 지내는 동안 알게 된 사실이있다.
권위자가 말하는 전체의 역사가 아니라,익명의 개인사의 축적에 의해 보여지는 역사. 대문자의 역사가 잡아내지 못했던 무수한 개인의 감정. 개인이 거기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압도적인 사실이,감촉이,감정이, 거칠게 생생하게, 담겨져있는것 같은…그러한 표현에,나도 오오카와씨도 마음을 빼앗기는 경향이 있었다.
개인적인 것안에 역사가 포함된다.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개인이 인용되는 것은 아니다. 개인이 존재했기 때문에 역사는 존재한다.
바로 그것이 나와 오오카와씨의 근본적인 생각인 것이다.
큐레이터보다는 영상작가나 영화감독, 즉 표현자로서의 오오카와케이코와 함께r:ead #3에 참여하고 싶다고 느꼈다. 그녀의 이름을 말하자면 소마씨도 나의 파트너로서 최상의 조합이라고 판단했다. 그날바로 오오까와싸에게 메일을했다. 곧바로 지나지 않아r:ead #3에 흔쾌히 참여하겠다는 오오카와씨의 회신이 도착했고, 나는 날아 갈 정도로 기뻤다.
2014년9월30일 오오카와씨와 나리타공항에서 만나 같은 비행기에 탑승했다. 소마씨를 비롯한 일본 스탭들은 하루 빨리 타이페이로 출발했기 때문에 마치 두 사람 만의 여행같았다. 그러나 타이페이,타오웬 공항의 입국카운터 앞에서 우리는 일단 헤어져야 했다. 일본의 친구와 대만에 도착했을때는 항상 그렇다. 「외국인」레인에 친구들이 선,나는 그엽의「본국인」의 라인에 선다. 반대로 말하자면,나는 일본에서는 지금도「외국인」취급이다. 표지에 중화민국 (Taiwan)이라고 새겨진 여권을 가진, 나 또한 「이경 속에서 자란 아이」인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입국」과 「귀국」의 절차를 각각 끝내고 다시 합류한 오오카와씨와 나를, 타이페이 도착 로비에서 맞아 준 것이 우리의r:ead #3에있어서 절대적 존재인 ZOE(葉佳蓉)녀사 였다.
영어가 유창하고 한국어도 조금 할줄아는 그녀의 일본어는 훌륭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녀에게 일본어를 가르쳐준것은 일본통치시대에 교육을 받은 그녀의 할아버지 였다. 타오웬공항에서 첫 대면 을 하였기에 조금의 긴장감을 느끼면서 서로 인사를 했던 우리 세사람이 며칠 후 타이난국립문학관 에서 각각의 할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전혀 상상도 하지못했다.
ZOE인葉佳蓉이,일본팀인 우리의 통역겸 안내역을 담당해주었기 때문에 우리는 작품과 감동적인 만남을 할 수 있었다. ZOE는 나나 오오카와씨의 직관,감촉,감정을 민감하게 감지하고, 대화 의 상대가 되어 주었다. r:ead #3의 ZOE의 존재가 우리에게 단순한 통역이상이었던것은 두세번 강조해도 지나치지는 않을것이다.
2014년10월11일 최종프레젠테이션에서는 ZOE의 통역에 의해, 작품과 그리고 나와 오오카와감독이 어떻게 관계를 이어갈지에 대해 발표했다.따라서 * 이하 문장은 그때의 발표원고를 수정,가필한것이다. 기록과 중복되는 부분도 많이 있습니다만 양해 바랍니다.


지금부터71년전, 1943년에 대만에서 발표된『백목련(白木蓮)』이란 소설이 있습니다.
저자는 로혁약(呂赫若). 일본통치하의 대만에서 교육을 받은 그는 식민지대만을 방문한 일본인 청년 스즈키요시베이(鈴木善兵衛)가 7살 소년인 도라보(虎坊) 들과 접촉하는 스토리인 소설「백목련(白木蓮)」을 일본어로 집필했습니다.
내지 일본에서 온「스즈키요시베이」에 대해 대만의 여성들과 아이들은 동경의 눈빛을 가졌습니다. 스즈키는 현대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사진기,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며 남국정서(南国情緒)가 넘치는 대만 풍경과 사람들의 모습을 촬영합니다. 마을사람들은 스즈키를 연모하고 스즈키도 녹색이 우거진 자연 속에서 친절한 사람과 느긋하게 보냈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그는 병에걸리고, 마을의 의사가 고칠 수 없었기때문에 내지 일본에 돌아가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스즈키는 식민지 대만에서는 일시적인체류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 증거로 그는 대만의 풍경과 사람들을 일본에서 가져온 카메라라는 기계의 렌즈를 통해 봤지만, 자신은 마지막까지 대만의 풍경이 될 수 없었다.
이 이야기를 작가 인 로혁약은 7살 소년 도라보(虎坊)의 눈을 통해 그립니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미 성인이 된 도라보(虎坊)가,어림시절 스즈키가 마을에 체류했던 그때를 회상하는 방식으로 그립니다.
어른이 된 도라보(虎坊)의 손에 자신이 7살 때 마을에 일시 체류한 스즈키요시베이가 남긴 스무여장의 빛바랜 사진이 있다. 모두 스즈키가 찍은 것입다.
촬영자였던 스즈키의 모습은 어떤 사진에도 찍혀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즈키가 없는 사진들은 오히려 스즈키가 확실히 여기에 있엇던 사실을 강하게 연상시킵니다.

……사실, 난 아직 이 작품을 읽지 않았습니다.
지금 이야기한 줄거리를 알고 있을 뿐 입니다.
나는 이 소설의 존재를『대일본제국의 크리올언어』란 학술적인 책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이 책의 원문은 영어로, 저자는 「페이 갠 쿠리만(フェイ・阮・クリーマン)」이라고합니다. 재미(在米)대만인 여성입니다.
얼마 전 링시이(林欣怡)씨가 r:ead는 통역자의 존재가 인상적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의 공간 속에서 다양한 이야기가 다양한 언어로 진행된다. 통역자의 말이 여러 문화와 문화사이를 요괴처럼 방황한다는 표현을 하셨고, 나또한 그러하다고 느꼈습니다.
일제시대의 대만인이 일본어로 쓴 소설의 존재를, 대만인이면서 일본에서 자란 내가 영어로 쓰여진 이 연구서로, 게다가 일본어번역에 의해 알게되었다.
이런 상황 또한r:ead적인 경험이다라고, 지금 돌이켜 생각합니다.
나는 쿠리만씨의 책을 통해 1943년 12월 「대만 문학」에 게재된『백목련』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읽어보고 싶다고 느꼈습니다.
그것은 약 한달정도 전의 일입니다.
사실, 나는 처음부터 원본을 원해서 타이난에 온 것이 아닙니다. 타이난는「일제시대에 일본어로 쓰여진 문학작품을 다수 소장한」국립대만문학관이 있다고 알게 된것은 우연에 의한것이었고, 혹시 이 문학관을 방문하면 로혁약의『백목련』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때도 아직 가벼운 기분이었습니다.
ZOE의 협력으로 미리 알아보았을때,『로혁약 일기(呂赫若 日記)』라면 확실히 있지만『백목련』은 알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일단 가보자라고 이야기가되여, ZOE의 안내를 받으면서 오오카와감독과 셋이서 가보기로 했습니다.

문학관은 1942년 ~ 1944년 사이의『로혁약 일기』외에도 『달구지(牛車)』를 비롯해『풍수(風水)』『린거(隣居)』등 일본에서는 구하기 힘든 로혁약의 다른 작품이 게재된 선집도 있었습니다.중요한『백목련』은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충분했습니다. 특히 손으로 쓴 일기장을 복사한『로혁약 일기』는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매우 재미있었습니다.

일본인에게는 익숙한 「토요 일기(当用日記)」라고 불리는 3년 일기로, 로혁약은 일기를 적었습니다. 같은 날짜의 내용을 3년분, 같은 페이지에 세로로 쓴 형식의 것입니다. 같은 책을 함께 들여다보고 있던 오오카와감독이 그녀의 할아버지도 같은 형식의 노트에 일기를 쓰고 있었다고 알려줍니다. 그것을 들으면서 혹시 우리 할아버지도 그랬었지 않았을까 란 생각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그 일기에『백목련』에 관련 된 기술이 없는지를 찾고 있었습니다만, 점점 목적을 잊고 나는 로혁약의 육필을 정신없이 쫓고 있었습니다. 「졸려 죽겠다」 「저 녀석은 말도 안돼」
문학관과 철학등, 그야말로 고상한 기술보다 그러한 감정이 재밌다고 케이코씨와 웃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뱄은 것은 그런 매우 개인적인 감정이었습니다. 이때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저편에 확실히 존재하고 있던 로혁약라는 개인의 감정과 접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것을 느끼면서 우리가 로혁약 일기를 들여다보고 있을때 ZOE가 “『백목련』이 중국어로 번역 된 것이라면 있었습니다”라고 말하고,

『短編小説巻・日據時代 呂赫若集 冷酷又熾熱的彗眼』(前衛)
『小説全集 呂赫若 台湾第一才子』(聯合文学)

라는 두권의 책을 가지고 왔습니다.
일본어의 원작은 찾을 수 없었지만, 그 소설이 중국어로 번역 된 것이라면 눈 앞에 있다.
나는 이 상황에 대해 이상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 상황은 나의 제1언어 일본어로 작성된 로혁약 작품이, 중국어로 된 모습으로 지금 내 눈앞에 있다는 상황입니다.
원래 중국어로 쓰여진 것으로 읽어보고 싶은 대만소설은 얼마 든지 있습니다. 하지만 내 실력은 역시 일본어 번역에 의지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중국어원작 책을 일본어 번역을 통해 읽을 때 나는 이런 기분이 듭니다.

만약 대만에서 자랐다면 이렇게 돌아가지 않고 끝나는데!

그런데 로혁약의 경우 원문은 일본어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읽으려고 생각한다면, 일본어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중국어가 모국어 대만인이라면 조금 돌아가야합니다.
그러나 나는 일본어 모국어인 대만인입니다. 그렇기에 로혁약의『백목련』에 집접 가깝게 갈수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눈 앞에는 중국어판의『백목련』
『옥란화(玉蘭花/yu4 lan2 hua1)』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그것은 전후의 대만식민지문학을 연구하는데있어, 중국어로 번역된 것이었습니다.
『옥란화』라는 중국어로된로혁약과 나와의 거리가, 가까우면서도 먼, 멀면서도 가까운.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사실 이때까지 나는『백목련』에는 두 버전의 중국어 번역이 있다는 사실을 중요시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쪽 하나 또는 둘, 혹은 양쪽을 보면서 중국어를 해독하면서 여기에없는 로혁약의 일본어 문장을 상상 할 수 밖에 없다. 차라리 내가 번역할까 란 농담을 했는데, 두번역은 각각 취지가 다르다고 ZOE가 설명 해줍니다.
ZOE에 의하면, 「일본어를 잘 아는 사람이 읽으면 곳곳에서 일본어의 느낌을 느끼게 하는, 중국어로는 어느 쪽이냐하면 찌그러진 문체」와「일본어를 전혀 모르는 독자에게도 부드럽게 읽을 수 있도록 좀 더 표준적인 중국어로 다듬어진 문체」인 것이다.
즉, 하나 밖에 없는 일본어의 원작에 대해 그 번역문인 중국어쪽이 번역 될 때의 시대와 사회와 정치적 맥락의 요청에 따라 변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 오오카와감독이 한제안을 했습니다.
지금 여기에있는 두 개의 『옥란화』를 바탕으로 온씨가 자신의『백목련』을 써보면 재미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번역보다는 일종의 창작이라고 케이코씨는 설명합니다.
이 중국어를 일본어로 번역한다라기보다는 온씨 자신의 상상력으로 해석 한 자신의 소설을 쓰게 되면 분명 흥미로운 일이 될것이다.
그 제안은 나의 흥미를 이끌어 주었습니다.

예를 들어 일본의 독자를 향해 한때 대만에는 일본어로 이렇게 좋은 소설을 썼던 작가가 있다는것을 소개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나보다 더 적합한 번역자가 있을 것입니다.
또한 단지 로혁약가 무엇을 썼는지 연구하는것이 목적이라면 두버전의『옥란화(玉蘭花/yu4 lan2 hua1)』를 철저하게 엄격하게 비교검증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굳이 말하자면, 난 그 둘다 목표로 하지 않습니다.

사실 제가 로혁약을 비롯해 주금파(周金波),진화선(陳火泉) 등의 대일본제국에 의한 황민화교육을 받은 세대의 대만인들의 책에 접하려고 한것은, 조부모에 대해 더 알고 싶다는 극히 개인적인 욕망으로부터 입니다.

여기에서 조금만, 내 할아버지에 대해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아버지의 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기때문에 나에게「할아버지 (아공)」라고하면, 외할아버지입니다.
살아있엇다면 이제 곧 90살이 됩니다.
내가 어릴때 할아버지는 자주 NHK방송에서 스모와 고시엔(야구)을 보고 있었습니다. 치요노후지(千代の富士)가 활약한 시대, 나에게「요코즈나」란 일본어를 가르쳐 주신 것도 할아버지였습니다.
어린 나는 대만인인 할아버지가 일본에 대해 일본에서 살고 있는 부모님 보다 잘알고 게신것에 대해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할아버지는 그런 것이다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아버지와 어머니보다 훨씬 열심히 내가 학교에서 쓴 작문이나 일기장을 읽어주었습니다. 할아버지에게 작문을 칭찬받는 것은 나에게 매우 자랑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할아버지가 70세에 돌아가셨을때 나는 고등학교 1학년 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多桑』란 영화의 존재를 알았을때 이미 할아버지는 세상에는 없었습니다.
대학생시절 나는 언제나 근처 비디오렌탈집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多桑』도 그 시기에 알았습니다. 「Duo1 san1」라고 발음하는 그 제목은 「아빠」라는 일본어에서 유래합니다. 『多桑』는 아빠라는 뜻입니다.
오년진 (呉年真/Wu2 nian2 zheng4) – 일본사람에게는 『양양 여름의 추억』에서 양양의 아버지를 연기 한 배우라고 하면 아실 분도 많을지도 모릅니다 – 감독의 이 대만 영화는 일제시대에 교육을 받은 대만인,본성인(本省人) 남자의 비애를 그린 것입니다.
 
국립대만문학관의 열람실에서 책상 위에 로혁약의 책을 펼치며 서로의 할아버지에 대해 ZOE 하고 이야기 했을때 나는『多桑』생각이 났습니다.
나와 ZOE할아버지는 매우 엉성해서 말하자면 어느정도『多桑』같은 사람 이었습니다.여기에에있는 저와 동세대의 대만인분들은 비슷한 생각을 품고 있는 분도 계실지도 모릅니다.

그날 저와 ZOE는 각각 할아버지한테서 배운 일본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내 인상에 남아있는 것은 내가 유치원때 “다녀오겠습니다(잇떼키마스)”라고 힘차게 말하면 “여자니까, 다녀 오겠습니다(잇떼마이리마스)라고 말해야하지”라고 할아버지가 나무랐습니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지금의 일본에서는 여성이 “다녀 오겠습니다(잇떼키마스)”라고해도 결코 이상하지 않습니다.
ZOE 또한 「스포츠」라는 일본어를 할아버지한테서「운동」이라고 배운 에피소드 등을 이야기 해주었습니다.
– 그래서 나는 어른이 되어 다시 일본어를 스스로 공부했습니다.
나와 ZOE의할아버지가 기억한 일본어는 어딘가 옛스러움이있고 그도 그럴것이, 그들이 말하는 일본어는 1930년대부터 1940년대라는 시기에 걸쳐 습득한 것인 것입니다.

1945년을 계기로 대만의 언어는 일본어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그 후는 아시다시피 특히 일제시대에 교육을 받은 지식인 남성에게 굉장한 시대가 시작됩니다.
장계석이 이끄는 국민당은 대륙탈환을 목표로 대만섬 전도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몇 년전까지 대만에 있었던 황민화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일본에 노예화된 사람으로 취급합니다.

1950년대에 태어난 부모님은 윗 세대가 대일본제국의 황민으로 일본어를 습득한 바와 같이 중화 민국의 국민으로서 중국어를 습득합니다.

불과 반세기. 세대로치면 삼세대 정도의 시간 속에서 대만의 역사는 이처럼 복잡하게 찢겨 있습니다. 어린이였던 나는 자신의 부모보다 훨씬 유창한 일본어로 말을 걸어준 자신의 할아버지, 아공이 윗 세대로부터도 아래 세대로부터 「일본」과의 관계의 깊이에 따라, 어딘가 경시되었던 세대에 해당한다고는 젼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ZOE하고 대하에서 흥미로웠던 것은 우리 집에서도 그녀의 집에서도 정치를 화제로 하는 이야기는 되도록 하지않았다는 점이었습니다. 예를들어 「일본시대」를 둘러싼 평가가 180도 다른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그것을 화제로 이야기했을때 온화한 분위기로 할수 있을가요?
내 어머니와 동갑인 재일대만인 여성이 이런 식으로 말한 것을 기억합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가 외성인(外省人) 애인을 만들었을때 딸에세 격렬하게 화를 내였다.
(외성란것은 장계석과 함께 1949년 이후 대만에 온 사람들을 의미한다).
그런일도 있고 그녀는 연인과 헤어졌습니다. 이후, 인연이 있어 일본인라 만나 사귀게됩니다. 외성인과의 만남은 그토록 반대했는데, 외국인인 일본인과의 결혼을 그녀의 아버지는 허락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이제 곧 90살이 된다고합니다.
그녀는 지금도 고향에 가있는동안 아버지와 정치이야기는 하지않도록 주의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아버지는 심장병을 앓고 있어 흥분하면 안되는거야. 하구만 정치 이야기가 되면 그에게는 용서 할 수 없는 것이 아직도 많고 반드시 분노하는거야”
도대체 무엇이 그도록 그녀의 아버지를 분노시키게 만드는것일가요.
도대체 누가 그녀의 아버지나, 나와 ZOE의 할아버지들에게 진정되지 않는 침묵을 강요하는가?

그런데 자백하지않으면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이 결과발표회를 위해 주어진 준비기간의 2일, 나는 대만 문학관의 열람실에 긴시간있었습니다. 로혁약와 마주하면서 할아버지 시대의 사람들을 계속 생각 하고있었습니다. 그런긴 날을 꼬박 이틀 끝내고 10월 9일, r:ead #3의 멤버들과 함께 가오슝에 갔습니다.
가오슝경용대학의 양(楊雅玲)교수가 가오슝 마을을 안내해 주셨습니다만, 逍遥園이라는 장소에 도착해서 울창한 나무사이로 거의 폐허가 되여 있는 큰 집을 보았습니다. 그 가옥은 일제시대에 오오타니코오주이(大谷光端)라는 다이쇼천황의 딸과 결혼한 사람이 지은 별장이었습니다. 오오타니을 「와일본황실유관계(和日本皇家有関係)」라고 양교수가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나는「황가 (皇家/huang2jia1)」라는 중국의 울림에 뭔가 불길한 것을 느꼈습니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페허는 그 오오타니가 자신의 별장으로 삼았던 집입니다. 양수은 계속 이야기합니다. 「這裡是眷村的時候……」
“여기가 군인 마을이었던 그당시……”란 뜻의 중국어로,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眷村 (Juan4 cun1)」는 일본인에게는 조금 생소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眷村」는 군인 마을이라는 의미입니다. 모택동이 이끄는 공산당과의 국공내전에서 패한 장계석은 수많은 군인을 이끌고 대만으로 왔습니다. 그렇게 대륙에서 쫓겨 대만에서 지내야 할 수 박에없게 된 군인은 많이 있었습니다. 「眷村=겸손」은 그런 군인들이 모여 살던 마을입니다. 逍遥園의 폐허를 가리키면서 양교수는 말합니다. 한때 이곳에는 100세대 정도의 군인 가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나는 현기증이 나는 듯하였습니다. 일본 황실의 친척인 오오타니가 식민지의 별장으로 유유히 살았던 집에, 대륙에서 쫓겨나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꿈꾸었던 군인들이 백명 이상이 살았다는 사실.
2일간 대만문학관에서 할아버지와 같은 본성인 -1945년 이전부터 대만에 있는 대만인- 의 「비애」에 대해 집착하고, 어딘가 황홀한 기분이었던 나는 逍遥園에서 본 폐허와 거기에 얽힌 역사적경위는 충격이었습니다.
할아버지와 동세대이면서 전혀 다른 이야기를 살았던 대만인들의 기색이 거기에 꿈틀 거리고 있었습니다.
물론 나는 대만의 국적모순의문제, 특히 할아버지 세대의 외성인과 본성인의 대립에 대해 지식으로는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때의 나는 대만의, 한편으론 아무것도 아닌 풍경의 한 부분에, 마주쳐 동요된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또 하나 기억도 되살아납니다.
그것은 r:ead #3에 있어서 반환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10월 6일의 일입니다. 그 날 오후 우리는 임야야씨(林牙牙)를 비롯해 대만스탭 여러분의 안내를 받으면서 龍果 (드래곤과일) 밭이나 어촌 등을 방문해서 너무 재미난 날을 보냈습니다. 나에게 가장 인상에 남은 것은 타이난예술대학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오사키농촌(大崎農村)을 산책하는 동안 발생했습니다. 증조부모가 살았던 집을 방불케하는, 나에는 어딘가 그립게 느껴지는 閩南식 가옥이 이어지는 곳이었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와 산의 초록이 기분 좋은 길이었습니다. 그런 길 옆에 작은 의자를 내고 앉아있는 사람들이있었습니다. 근처에 사는 분들 같았습니다. 대만스탭 누군가가 대만어로 말을 걸었습니다.
“- 할머니, 이분들은 한국, 일본, 중국에서 온 사람들이에요.”
그것을 들은 2명의 노인이 수줍어 하듯이 웃었습니다.
“- 할머니, 일본어를 기억하고 계십니까? 이분들은 일본인입니다.”
대만어로 누군가가 말을 걸고 있는 것이 들립니다. 생각하면 이 순간은 이미 뭔가 불안 기분이었습니다. 나는 대만여행에서 만난 노인이 유창한 일본어로 친절하게 대해주셔서 감동했다고 순진하게 말하는 일본인에 대해 항상 복잡한 생각을 안고 왔습니다. 오사키농촌(大崎農村)에 있는 사람은 옆에서 보면 그런 일본인 밖에 안보이는걸까…… 그 순간에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그러나 그 예상을 반대로 노인들은 일본어를 전혀 모른다는 말을 합니다.
“- 전쟁 중, 우리들은 학교에 갈 수 없었다니까요.”
……생각해보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일제시대 황민화정책이라고 해도 고급교육을 받을 처지에 있었던 사람은 소수의 대만인이였기 때문입니다. 여성이라면 더더욱 그 수는 제한 될 것입니다.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지만 할머니와 동세대의 그녀들이 일본어를 전혀 모른다는 사실에 내가 아는「대만」역시 매우 제한되어 있다고 통감했습니다.
나는 로혁약과 나 자신의 할아버지를 통해서 자신이 생각하려고 하는 것은 역사에 갇혀 있는 그들의 목소리를 떠올려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사람의 목소리를 지워 버리는 것이면 안된다고 자숙하고 있습니다. 즉 본성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어가기 위해, 그들이 일종의 필연성으로 인해 증오해야 했던 외성인을 하나로 묶어 할아버지들의 적으로 단순히 생각하는 것은 절대 하고 싶지않다. 또한 같은 본성인이면서 일본어를 습득할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의 존재도 무시하고 싶지 않습니다.
1945년이후 할아버지의 「일본어」는 역사에 봉쇄되고 방치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침묵당한 할아버지의 고통과 마주할 때 자신의 가족인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와 비슷한 사람들의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는 태도를 취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물며 그것이 역사의 「진실」이라고 소리높여 외치는 것은 절대하고 싶지않습니다.
내가r:ead #3에서 조우한 「대만」은 로혁약 뿐만이 아닙니다.
逍遥園과 오사키농촌(大崎農村)에서의 경험은 할아버지가 살았던 대만에 대해 생각하려고 하는 나에게 「문학적이기는 하지만」 더욱 강하게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나에게「문학」은 수잔 손타그(Susan Sontag)가 강조하는 「상투적인 담론과 단순화와 투쟁하여 복합적이고 애매한 현실을 단단히 다루다」는 태도입니다.
 
이상의 것을 토대로, 일본에서 자란 대만인으로 자신과 일본어의 관계에 대해 다시 질문하자
면, 역시 어린 자신을 일본어로 귀여워해 준 할아버지가 기억이 납니다. 엉뚱한 말일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일본어는 할아버지의 일본어가 「격세유전」한 것 같은 것이 아닌가하고 느낄 수 있습니다.
지금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나를 알면, 할아버지는 어떻게 느낄 것 일까.
그러나 벌써 할아버지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없습니다.
일제시대의 대만인이 일본어로 쓴 소설을 읽고 싶은 것은 거기에서 할아버지를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나의 그런 생각을 직관적으로 알았던 오오카와감독은 중국어로 쓰여진 로혁약의 『옥란화』앞에서 어찌 할 바를 모르는 나에게 제안합니다.
『옥란화』의 두개의 버전이 존재하는 것은 각각의 중국어가 시대와 문맥의 요청에 따라 쓰여져 있는 것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지금 현재 온씨가 거기에서 받아들인 것을 자신의 말로 응답하는 것이 가장 적합한 방법인 것은 아닌가.
그래서 로혁약의 일본어로 『백목련』이 이 체류기간 동안에 발견되지 않았던 것이 오히려 나를 흥분시켰습니다.
그것은 스즈키요시베이가 남긴 수십장의 사진 속에 스즈키 자신이 전혀 찍혀 있지 않았기때문에 스즈키의 존재감이 한층 두드러지고 있는 것과 아주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원작의 일본어가 부재이기때문에 문학연구자로서도 아니고 번역자는로도 아닌, 어디까지나 한 「문학가」로 자신의 말로 로혁약의『백목련』을 재창조한다.
이것은 이 타이난체류를 통해 내 안에서 터져나온 희망과 욕망입니다.
이 욕망을 시간을 들여 최선을다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대만문학관에 하루 종일 지낸 후 나는 하나의 짧은 문장을 썼습니다. 일본어로 쓴 것이지만 그것을 ZOE가 중국어로 번역해주고 그 중국어를 밑받침으로 ZOE와 대만어로 번역했습니다. 그것을 낭독하고 싶습니다. 대만어는 중국어와 함께 제가 일본어를 배우기 이전 어린시절에 항상 들었던 언어입니다. 중국어은 대학생때 제2외국어로 배웠습니다만, 대만어는 배운 적이 없습니다. 대만어로 낭독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들어주세요.


아침 저녁으로 추워졌다. 타이페이에서 도쿄로 돌아가 약 2주가 지났다.
두꺼운 2권 세트의 『로혁약 일기』를 곁에 두고 내가 다시 할아버지를 생각하려 하고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할아버지들의 생각을 하고 싶었다.
오지이짱, 아공, 할아버지, 에에……그 날, 낭독하는 내 뒤의 화면에는 3개의 언어로 구성된 문장이 비추어지고 있었다.
「원문」의 일본어, ZOE에 의한 중국어, 그리고 조순혜씨가 단 하룻밤에 번역해 준 한국어.
일본, 한국, 중국 그리고 대만사람들에 서투른 대만어로 이야기 할 수 있는 순간이 나에게 허락된 것은 지극히 운이 좋은 것이었다. 대만어가 포함된 텍스트를 소리내어 읽을 기회는 지금까지 몇 번인가 있었다. 그러나 짧은 문장이지만 모든 문장을 대만어로 낭독한 것은 첫 경험이었다. 전날 밤, 그 문장을 완성시킨 후 나는 ZOE에게 발음 체크를 이유로 그녀를 돌려보내지 않았다. ZOE는 나의 대만어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성조와 어미의 「n」와 「m」의 구별 등 세심한 부분을 지도해주었다. 그런 연습을 몇 번 반복한 후, ZOE가 말하였다. 온씨, 내 대만어의 발음은 표준적이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걱정하지 말라고 답했다.
“- 좋아. 왜냐하면 나는 「올바른」대만어를 들려주고 싶은 것이 아니다. 자신의 대만어를 낭독하고 싶으니까.”
지금 눈앞에있는 ZOE의 목소리를 통해 들리는 대만어가 자신의 대만어가 되어가는 느낌을 나는 즐기고 있었다. 낭독 후 나의 대만어가 이상하다고 지적하는 사람이 있어도, 그것은 ZOE의 책임이 아니다. 나의 책임이다. 그러한 지적을 받을 각오라면 벌써 서 있다.
그랬기때문에, 안소현씨가
“- 낭독하는 목소리 속에 당신의 생각, 느낌이 압축되어 있는 것을 느꼈다.
고 평했을때는, 가슴이 철렁했다.”
“- 당신은 당신의 안에서의 웅성거림을 그 목소리로 감싼다. 그리고 당신이 말로 포함할 수 없는 것을, 당신의 파트너인 케이코씨는 카메란 눈을 통해 표현한다.”
그것은 나도 느끼고 있었다.
오오카와씨가 촬영한 자신의 모습이 스크린에 비춰지자 『옥란화』라는 두 중국어와 조우했을 때의 흥분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국립대만문학관에서 ZOE와 이야기한 나는, 기억속의 자신 이상으로 들떠있었다. 그 몇분을, 긴 시간을 걸쳐 언어로 반복하면서, 스스로는 비교적 이성적으로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그렇지 않다는 것에 쑥스러웠다. 『옥란화』와 조우한 그 순간이 오오카와씨의 카메라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은, 앞으로『옥란화』를 참고로 자신의『백목련』을 재창조하는 과정에서 나에게 점점 무게가 늘어나는 것이다.
(프레젠테이션때에는 일본어를 모르는 관객도 나와 ZOE의 대화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영어자막을 붙였다. 한정된 시간속에서 우리의 의도를 파악하고 번역작업을 해준 타무라카노코씨 감사합니다!)
그래서 안씨의 말로 인해 우리는 기뻐하고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오신 mixrice의 조지은씨가 우리의 프레젠테이션에 대해 말해 준 것도 잊을 수 가없다.
“- 역사 안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던 목소리. 그것을 섬세하게 따르는 행위는 어려운 동아시아의 상황을 풀어내는 것으로 연결된다. 앞으로도 너희와 함께 그것을 탐구하고 싶다.”
그때 지은씨는 아공(할아버지)에게 말을 거는 당신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의 할아버지 기억이났다고 말해주었다.
……지금 안씨와 지은씨의 말을 그녀들의 목소리가 말한대로 즉, 한국어로 재현 할 수 없는 것이 나를 조금 답답하게 한다. r:ead #3기간 동안 안씨와 지은씨의 목소리를 통해 한국어의 울림을 나는 그리운 친밀감을 안고 있었다. 자신이 전혀 모르는 언어에 그런 생각을 품은 것은 처음이었다 (물론 그것을 말하고 있었던 것이 지은씨와 안씨였기때문에 그렇게 느껴졌다). 특히 지은씨가 「온유쥬(オン・ユジュ)」라고 내 이름의 발음소리를 들을 때마다 자신의 성명이「온유쥬(オン・ユジュ)」라고 쓰이는 세계가, 세상에는 확실히 있다는 것이라고 따뜻하게 알려주는 느낌이 들었다.
온유쥬
온유쥬는 「温又柔」이라는 한자로 갖춰지는 두 울림 중「웽요우로우」와는 전혀 비슷하지 않다. 「온유우쥬우」와 닮았다.
태어난 대만에서 자랐으면「웽요우로우」라고 쓰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온유우쥬우」로 일본에서 자랐다.
일본의 대표로 r:ead #3에 참여했다.
그런 나의 대만 할아버지에게, 편지를 대만어로 한국, 일본, 중국, 그리고 대만 사람들이 이야기를 들어준 것은, 지금 돌이켜봐도 나에게는 작은 사건이 아니었다고 느껴진다. 특히 공죠쥰(龔卓軍)씨가 나의 낭독을 접하면서,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언급했을 때의 희미한 목소리의 떨림을 생각하면, 지금도 나의 마음은 세차게 흔들린다.
도쿄로 돌아온 지금, 일본, 한국, 중국 그리고 대만……동아시아의 현재를 살아가는 친구들의 할아버지에 대해 좀 더 알고싶어졌다. 동아시아에서 사는 우리 할아버지들의 이야기를 서로 나누고,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대화를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나에게 있어서 r:ead #3은 그 시작을 예감하는 여행이었다.
「국가」단위로 언급되는「역사」는 우리에게 다른 이야기를 강요한다.
이전보다도 그 위태로움을 느끼고있다. 우리는 더,「국가」로부터 자유로워져야하는 것이 아닐까? 
자신이 속한 국가의 이야기야말로 역사의「진실」이다.
「국가」를 주어로 이야기되는 역사는 동아시아의 현재를 사는 우리를 찢어내려고 한다. 이러한 상황하에 이웃나라가 유일한「진실」을 놓고 경쟁하는 사태는「국가」단위로 자신을 설명하려고 하면 반드시 차이가 생겨버리는 나 같은 인간은, 매우 불모한 광경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동아시아의 친구와 마주 볼때 우리는 좀 더「개인적」이어도 좋다. 「국가」가 강요하는 이야기에 따르고 있어, 이웃친구의 생생한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는 것은 외롭기 그지 없다. 적어도 나는 그것이 어떤 언어로 말해지고 있든, 자신의 개인적인 목소리에 최대한 귀를 기울이고 싶다. 이렇게 r:ead #3에서 만난 친구들이 내 말에 귀를 기울여 준 것처럼.

November 2,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