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

어떤 것에 대해 명확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장 뤽 고다르 감독의 영화 ‘필름 소셜리즘’에는 be동사를 쓰는 사람과는 말하지 않겠다고 have 동사를 선호하는 아이들이 등장하는데, 나 또한 레지던시 프로그램 동안 여러 가지 키워드를 두고 그것들에 대해, 혹은 일본에 대해 be동사의 언어로 단정짓지 않고 새로운 조합의 가능성으로 남겨 두기 위해 노력했다.

단어들
가장 큰 공간을 차지하고 있던 생각은 민주주의, 가상성, 익명, 마음의 코스프레, 오타쿠와 잉여, 파국(破局) 등이었다. 그 이유는 전에도 언급했듯이 대통령 선거와 마야력 멸망 이벤트 같은 작년 말의 상황들을 거치며 시스템에 대한 심각한 불신과 재고, 묘한 상상력이 있었던 한편, 남아도는 에너지 등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구
처음엔 키워드를 염두하며 인터뷰하는 방식으로 리서치를 진행했는데 인터뷰이로는 마쓰모토 하지메(松本哉), 오자와 야수오(小沢康夫), 아즈마 히로키(東浩紀), 안천(安天)씨가 있었다. 그 밖에도 겐론카페 이벤트에 참가하거나 공연을 보고, 도쿄 여기 저기를 어슬렁거리며 리서치를 했는데 진행을 하면 할수록 원래 가지고 있던 키워드들이 모두 분해되어 큰 쓸모가 없게 되었다(고 당시엔 생각했다.).

발표
작업을 하는 초기단계에 있었고 나조차 정리가 안 된 것을 과정 중에 공개함에 있어 어떠한 형식으로 풀어나가야 할 지 고민이 많았다. 심지어 프로그램을 위해 사전조사 했던 것들도 현지에 와서 상당 부분 와해된 상태였다. 궁여지책으로 일전에 겐론카페에 갔을 때 흥미롭게 보았던 이벤트에 착안해 퀴즈쇼의 형식으로 나의 질문들을 콜라쥬같이 늘어놓긴 했는데 그것이 어떠한 의미가 있었는진 솔직히 모르겠다.

이후
각각 1주와 3주의 레지던시 기간 동안 했던 것들이 이후 무엇이 될 수 있을지 당시엔 조금 모호해 보였으나 한국에 돌아온 후 몇몇 계기로 말미암아 따로따로 섬처럼 존재하던 아이디어들이 이제야 말이 되는 무언가가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현재 움직이지 않고 유목하는 여행사의 사업과 더불어 새로운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 중에 있다. r:ead 프로그램을 통해 나온 새 프로젝트에 대해선 따로 설명하지 않겠다. 언어보단 이미지를 제시하고 싶다. 퀴즈………?

리포트: 도쿄에서의 첫 번째 체재기간

일본에 머물던 12월 16일에 일본에서는 중의원 선거가 있었고 이는 ‘r-ead(Residency East Asia Dialogue)’에 모인 사람들에게도 연신 화제의 중심이 되었다. 결과는 전문가들의 예상대로 자민당이 의석 과반이 넘는 294석을 차지해 정권을 잡고 아베 신조가 일본의 총리가 되었다.
r-ead 프로그램을 끝나고 돌아온 바로 다음날, 한국에선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결과는 75.8%라는 이전 대비 높은 투표율의 절반이 넘는 51.6%의 득표로 박근혜가 차기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로부터 이틀 뒤, 진지하게 믿지는 않아도 전세계인들에게 실로 묘한 기대감을 안겨준 마야력의그 날도 별 일 없이 지나가고 내가 알고 있던 세계는 그대로 찝찝한 의문이 되었다.

일본의 사상가 아즈마 히로키는 2011년 저작 ‘일반의지 2.0’에서 루소의 말을 빌어 소통을 통해 다양성을 감소시킨 대의 민주주의가 아닌 다양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직접민주주의로서 ‘소통 없는 민주주의’를 제안하며 민주주의 개념의 업데이트 가능성을 논한다. 루소의 일반의지와 웹 2.0이 합쳐진 일반의지 2.0은 시민 각 개인들이 인터넷에서 벌이는 검색 패턴이나 트윗 등의 생활이력들이 데이터베이스화 되면 집합적 무의식이 되고 이것이 일반의지로서 정치에 이용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의사소통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다양한 의견을 몇 가지 대립축으로 환원해버리기 때문에 오히려 다양성을 억압하고 만다. 소통 없는 의견의 집약이 가능해지면 원래의 다양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인민의 일반의지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는 ‘집단지성’의 원리에 비추어 볼 때, 의사소통을 경유해서 단순화를 거친 판단에 비해 보다 정확한 판단을 이끌어낼 것이다”(일반의지 2.0)
하지만 한국 최대 포털사이트인 ‘네이버’의 경우만 보더라도 검색어 순위 조작이나 어뷰징 등의 개입을 통해 대중들의 미디어 소비와 여론에 큰 영향을 미치고 그 자체로서 막강한 권력체가 된 것처럼, 집합적 무의식이라는 통계치를 산출해내는 인터넷의 플랫폼이 시장 논리에 의해 구성된 것이고 이미 특정한 정치성향이 반영돼 있는 것이기 때문에 물론 이 통계치 자체는 간접 반영된다 하더라도 그 위험성이 존재하는 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즈마 히로키가 주장한 합의를 향한 의사소통이 아닌 개인의 의사표현이 데이터베이스를 이루고 그 값이 정치에 반영되는 회로를 구성하는 것, 민주주의와 정치의 재구성은 여러모로 흥미로워 보인다.
r-ead의 두번째 기간 동안에는 동아시아의 문제와 관련해 아즈마 히로키의 방법론을 적극 활용해보고자 한다. 구상중인 내용의 골자는 접선의 방식, 의사표현의 방식과 도구의 재설정으로 인한 새로운 관계 설정을 토대로 아즈마 히로키가 말한 집단 무의식=일반의지의 발현과 그 새로운 플랫폼의 탐구이다.

덧붙여, 일주일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행해졌던 r-ead의 첫 만남에서 우리는 East Asia라는 지점의 사실관계로써만 문제를 다소 경직되게 다루지 않았나 싶다. 우리가 만약 Dialogue와 공유의 패러다임 자체를 전환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