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字) 入流亡所—新月、团块、无名之岛

Sorry, this entry isn\\\\\\\’t available in %LANG. For the sake of viewer convenience, the content is shown below in one of the available alternative languages. You may click one of the links to switch the site language to another available language.

关于「对话」(dialogue / r:ead),无可避免地总让我想起「语言」,而关于「语言」,无可避免地让我对準「叙事者」、「发话者」、「画外音」。如果说中国、日本、韩国、台湾的群组分別收纳了第一人称的主词言说以及第三人称的不及物在场观察,那么r:ead活动「对话」的翻译群组则是游移在诸种语言与意识的「介系词」。然无论是哪一种发话词,所有的「对话」都是某种个人诠释的表达。

photo_lin

此次驻村活动让我想起今年初在香港Para Site艺术空间的《大新月:六十年代的艺术与激荡—日本、南朝鲜、台湾》展。展览收录多为重印的纪录影像,以及文字录像文献档案,借此为东亚前卫行为艺术进行局部审视。参与的艺术家包括小野洋子、Hi Red Center、《剧场》杂志、张照堂、零次元/加藤善博(Zero Dimension/ Kato Yoshihiro)等作品,这些异域共史的身体档案企图将台日韩三地因美国而建立的「关系」(三地地理位置上的新月视觉意象与政治位置),进行艺术回应。就此延伸,《大新月》的地理图像同时链接了此次参与驻村的中国艺术家郑波所拋掷的第一个提问—中国位置;以及苏育贤於地理位置上的第二个提问—东南亚位置。如果我们粗略地将东亚作为新月弧形,那么中国无疑为新月旁的巨大团块,而散落在此两者之外的东南亚,或许是圈围四周的、无数星丛碎片体所结构而成的离散岛群。如何在此地域的中节点—台湾—进行诸语对话?或者如果我们将此中节点亦视为一种「介系词」,那么作为观测纪录长期关注东亚问题的艺术家高俊宏的我,又如何以「双重介系词」(纪录其所欲纪录)实存言说?如果说异域共史的「跨」的确存在,那么我们又是在怎样的节点上跨足穿越、发声对话?

韩国艺术家Mixrice在陈述其作品脉络时,曾以非常特殊的话语形容其创作时的身体经验,这些身体经验最终如同「内脏的皮肤」、「内部的外部」、「把照片埋进去,把骨头挖出来」的抽象存在。这样「表里」一致的「矛盾」话语迅速拦截了我的话语视觉感,我不清楚这究竟是译语的直白素描?还是译者约略转化后的理解说明?但无论哪一种翻译,前者视觉、后者触觉,直击共振。便是这样的奇特翻译语感,让我在整个驻村对话中不断地流离在各式各样的精神地域中行住坐臥。这难道不是流亡?当我们无法以本己的存在处境、地理位置进行叠合共行的言说时,我们的话语形式只能以跟处境分离的精神地域话语流泻沟通,此种精神地域话语或许是影像,或许是声音,或许是一个极微的身体动作表情。我窃窃地认为,Mixrice所指的「内脏的皮肤」、「内部的外部」、「抵抗总体性框架扁平化的个人凹凸」,就是不被「标準语/国际化/全球化」所接纳的「个人陈述」语言。 这便是流亡话语之所在。

在与高俊宏至香港关注占领中环事件的同时,我再次目睹了流亡话语的窜动样貌。作为台湾人,我们的介入或许是某种「今日香港明日台湾」的关照。作为创作者,我们的存在或许是艺术家高俊宏口中自我嘲弄的「伪社会运动人类学关注者」的「刚好在场」。我们什么也不是,我们身体在此,意识在彼,内在流亡内战。该如何陈述这样的异域共史影像?国家、母语、国籍、精神地域。当我试图纪录此种「内部的外部」、「把影像埋进去,把骨头挖出来」的事件性格,如何透过剪接蒙太奇出不被「标準语/国际化/全球化」、或者说不被某个巨大团块所接纳的个人凹凸语言陈述?r:ead驻村活动提示我的,与其说是流离於新月、团块、离散岛群的地理结构中对话,倒更像是在此地理结构中不断将自己陌生化、悬浮化的精神迁徙状态。在返回台湾高雄小港机场后直奔三余书店的途中,我的行李装塞着香港序言书室所买,许煜翻译的《无政府主义人类学碎片》、芭芭拉·德米克(Barbara Demick)所著《我们最幸福:北韩人民的真实生活》两本书、马宝宝农场地图,以及高俊宏与左胶份子陈俊辉在序言书室巧遇所意外拍摄的对话影像。语言的切换、地理的位移、人物的对撞、原文与翻译的不均衡关系、翻译书写所指涉的「象征资本」(symbolic capital)…,与所有这些界域逾越所带来的「不可想之物」(the unthinkable),是否足以构成一个少数文学的影像极短篇?是以我将此自己不断陌生化、忘却自身话语与地理位置的内在流亡状态,以剩余的词汇拣选、语法变造、阅读语意,翻译书写为影像进行陈述某种「入流亡所」的边界影像。

《入流亡所》一词借用于楞严经,意指从声音进入,进而意识声音之流的本性,接续忘却主体。忘却的不仅是声音自身、还包括生产声音的环境,是某种主客体都消失流散的状态。影像中的声音取自环境音,但大部份都被静音处理,借此指向在场观者自身的内在声音之生产。《入流亡所》的影像以台湾、香港、冲绳、济州诸岛所结构,交错的影像与叙事文本投映出一个无名之岛,在此岛影中流散、碎片式的话语叙事过往的人、现在的他者、与亡者的对话、与主词的回应,也是一个关于诸语叙事的个人陈述。其中香港以陈黎诗作《独裁》、济州岛以抗争歌手文镇五的诗歌、日本以高俊宏的《小说》局部章节作为文本,进行结构组串。所有场景皆是艺术家高俊宏长期以来关注的命题点,亦是我长期跟拍其命题点的现场。就此点来看,或许是以台湾的视角进行影像叙事结构,但更多的是透过两种(艺术家、观察艺术家)发话词,映射一处无名之岛的内在状态。

이웃집에 있는 자신

일반적으로, 한 나라가 남에 대한 인식은 개인적, 국부의 대외적인 인식들을 쌓였을 것이니 오해가 발생하는 것이 십상이다. 특히 동아시아 역사상, 항상 실체(實體) 간의 인식은 서로 떨어지고, 관념적으로 자신이 상대방을 초월하는 우월감을 가지고, ‘편의의 오해’로 서로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편의의 오해’의 역사: 한국과 중국이 서로 알게 된 궤적” 백영서

나는 이번 r:ead #3 “아시아도시, 도시 속의 노마드(Asian City, Nomad People)”프로그램을 참여하는 계기에, 소위 “대화” 가 무엇인지를 계속 생각해 왔다. 동아시아의 창작자들이 서로 간에 미묘한 관계가 존재한다. 서로 다른 생활, 생명경험, 맥락을 가지고 있지만 지역 정치, 역사, 문화의 발전으로 말하자면 동아시아의 주민들의 관계는 아시아인과 유럽인의 관계, 혹은 아시아인과 인도인의 관계, 심지어 동남아 주민 사이의 관계와 다르다. 그래서 동아시아 서로의 대화는 우선적으로 많은 비슷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 이는 동아시아 서로 대화 시 필수적인 우선 조건이다. 그러나 이 선천적인 지역성으로 한국 학자 백영서가 지적한 ‘편의의 오해’처럼 자기가 자신의 과도한 상상력으로 상대방을 이해하였는지를 주의해야 한다.
r:ead #3 진행하기 전에 모든 참여자가 이미 마음에 동아시아 지도를 그려 놓었을 것이다. 이 지도는 상대방과 대화할 때 관계를 정하기 위해서 상대방의 위치, 자기 자신의 위치를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대화, 브리핑, 방문 등 활동을 시작한 후에 이 이미 표기해 좋은 사물(바로 ‘편의의 오해’)은 약화하기 시작하여 더 많은 미스터리, 의견, 부호, 차이를 상대방에게 넘겨준다. 이는 ‘대화’가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다. 어떻게 이 차이를 넘어 가는 것도 아주 어려운 요점이다.
내가 여기서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진정한 이해를 달성하느냐’ 의 가정적인 문지가 아니다. 모든 이해가 ‘차별’ 을 포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가 명확한 주체의식을 파악한다고 착각했다면 소위 ‘이해’ 는 자기 자신이 가정한 주체에서 투사한 의견일 가능성이 커다. 이것이 바로 ‘편의의 오해’ 의 기본 양태이다. 그러나 가장 어려운 점은 ‘이해’ (오해의 가능성이 있음)가 동아시아 대화 관계 중 가장 중요한 전제이다. 예를 들어 대만의 역사 맥락으로 오키나와나 한국을 비유하면 대만역사를 확장할 보충을 얻을 것이 필연적이다. 그러나 다른 차원에서 그가 대조하는 다른 역사의 중요성과 긴밀성을 약화시켰다. 또는 편면적인 해독은 역사에 대한 오판을 야기할 지도 모르기 때문에 이 결여된 ‘이해’를 피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럼, 우리가 대화 관계에서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내 생각에는 여기서 ‘창작’ 의 개념은 더욱 중요하다. 어떻게 창작할 것인가? 대화가 더 나아가 ‘창작성?’ 이 존재하는지의 가능성이 크다. 자기의 입장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과 교류뿐만 아니라 어느 차원에서 ‘자기가 벗겨진’ 부분도 노출해야 한다. ‘자기가 벗겨진’ 부분은 서로 이해하기에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이번 참여의 경험으로 보니, 일본 작가 온유쥬가 국적, 언어를 스위칭하는 느낌이 ‘자기가 벗겨진’ 상태를 대표로 하여, 여기서의 ‘자기’가 ‘주체’의 개념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 자기 자신에 탈락된 전통 민족주의, 혈통주의, 지역주의로 구성하는 ‘주체’관렴은 동아시아 예술가들의 소통 경로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벗겨진 것’ 과 ‘희행한 것’ 도 다르다. 예를 들어 강렬하고 충격적인 여행을 경험한 다음에 우리가 자기의 신체에 ‘낯선 자기’를 찾게 된다. 특히 이 여행은 동아시아의 ‘이웃집’ 지역에 있어서 완전히 다른 이국적인 감정과도 다르다.
‘이웃집’ 과 ‘먼 곳’의 개념이 다르다. 대만 시인 라지성(羅智成)의 말씀은 ‘먼 곳은 낯선 곳이고, 이웃집은 익숙하지만 생소한 자람과 지역이다. 어느 사람이 우리 이웃집에 살아 같은 물탱크까지 쓰고 있고 날마다 스치고 지나지만 묵연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번 r:ead #3 프로그램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이웃집의 기조로 하여 서로 같은 점에 다른 점을 정탐하여 ‘이웃집’의 개념 속에 자기를 찾는다. 예를 들어 이번 r:ead #3 예술가들이 국제 이민 노동자에 대한 화제에 대한 공통적인 관심, 다큐멘터리의 촬영방법에 대한 공통적인 관심, 나라, 국족, 국어 화제에 대한 공통적인 관심이 있다. 서로 이 화제들을 관심하는 동시에 서로 은밀한 관계를 보이게 된다. 예를 들어 오오카와 케이코가 인도네시아 이민노동자를 촬영, 믹스라이스가 인도네시아 이민노동자 마을에 참여, 그리고 대만 소육현의 인도네시아 뱃노래 등이 있다. 동아시아가 노동 체계, 지구화 과정 속의 공통 처지를 여러 차원에 보여준다. 이 공통성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더욱 창조적인, 기동적인, 그리고 계급화를 없애는 대화를 달성하는 지가 극히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내가 다시 백영서의 관점 ‘감지의 동아시아로서’ 를 인용하여 창조적인 대화의 참고 지표로 한다. 동아시아 예술가들이 직면해야 하는 처지는 자기 자신의 창작 환경과 사회환경이다. 이 이중성에 전통의 면상이 있다. 직면해야 하는 것도 현대주의의 개인-세계의 관계와 상상이다. 그러나 이런 감지를 묘사하는 것은 전통적인 데카르트식의 단점 원근법을 바탕으로 한 것이지만 ‘감지의 동아시아로서’의 관점으로 보면 동아시아의 인간과 사물 자체가 감지할 물건과 대상이 될 가능성이 있다. 그 방법은 데카르트식의 원근법이 아니라 서로 ‘굴절’ 의 사이에 다른 자신을 찾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감지의 동아시아로서’ 라는 큰 명제로 하려면 동아시아의 비슷한 인물과 사물, 역사, 시간관념, 경제처지, 전쟁 등 공통 문제를 창작 주제에 담게 할 것이고 공통적인 협력 창작과 대화를 진행할 것이다. 이는 내가 r:ead #3 프로그램에 대한 참여 소감이자 후속 건의이다.

“주름을 파내고 기억을 묻는다.”에 대한 만남

r:ead 3의 참여 제안을 받고 얼마 되지 않아 우리는 일본에 리서치를 하러 갈 기회가 생겼다. 사실 일본은 최종 목적지는 아니었다. 우리의 리서치의 최종 장소는 아마도 자카르타, 반둥, 혹은 그 둘레의 섬들이 아니었던가. 다시 생각하면 무엇 때문에 이 리서치를 하게 되었는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궁금했기 때문에’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 더 솔직할 수도 있겠다. 그래, 나는 궁금했다. 60년 전에, 근대화가 되기 직전, 더군다나 전쟁의 상황에서 그들이 어디서 무엇을 만났는지가 몹시도 나는 궁금했다.

큰 줄기에서 이 리서치는 과거 아시아의 근대화 상황에서 디아스포라를 겪은 개인들의 상황을 통해 역사가 개인의 정체성을 어떻게 굴절시켰는지, 그 굴절은 어디로 가야 했는지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만났다. 제주도에서 오사카로 이주한 재일조선인에 관한 상황들을,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인도네시아에 남게 된 조선인 군무원의 기록들을, 그리고 그들을 기록하고 재현한 학자 무라이요시노리와 우쓰미 아이코를, 만화가 미쯔키 시게루의 일기를, 재인조선인 소설가 양석일의 과거와 소설들을. 그리고 그것들 사이 사이의 틈들을.
그러나 그것들은 분절되어 있어 보이지만 연결되어 있는 것들이었다. 누군가는 그것을 아시아 근대성의 구멍이라고 불렀고, 나는 아시아의 근대성의 접혀진 부분이라고 표현하였다.
나는 이 종이의 접혀진 부분들을 펴서 고르게 한 뒤, 그 주름들을 손으로 만지면서 꼼꼼히 보려고 한다.

최종의 목적지가 인도네시아였음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거나 자료를 찾을수록 점점 일본에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대 아시아의 대부분 국가가 그렇듯이 자신의 기억과 역사를 스스로 기록하지 못하는 시간을 보냈다. 한국 역시 근대의 많은 자료가 일본이나 기타 다른 나라의 사람들에 의해 연구되었다. 우리는 타자의 손과 입을 통해 기록된 아시아의 근대성에 관한 맥락도 고민해 보고자 한다. 이 타자의 손과 입은 정치적, 윤리적 측면에서 문제가 될 때가 많지만, 진정한 연구 속 타자의 손과 입은 때로는 중요한 관계 맺음으로 확장되기도 한다. 학자 무라이요시노리와 우쓰미 아이코의 기록과 시게루의 만화는 우리 기억 안에 비어 있는 곳을 더듬어 희미하게 연결 할 수 있는 단초가 되었다. 그리고 그런 고리들이 우리를 일본으로 이끌었다.

리서치를 하면서 개인들이 어떻게 버티며 재현했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이는 민족, 제국과 식민 그리고 윤리적 측면에 갇혀서 보지 못한 개인의 경험, 잊혀진 존재, 이어지지 못한 풍경들일 것이다. 이 풍경 안에서 우리는 개인들이 무언가를 땅에 묻고 파내는 것을 반복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주도에서 오사카로 이주한 이주노동자들은 양석일 소설의 <피와 뼈>, <방을 걸고> 주인공들로 재현되었다. 이들은 육체와 정체성을 변화시키며 근대화를 견디는 내면의 괴물로 자리매김한다. 그들은 어둠 속의 땅에서 쇠를 철을 파내어 생활을 유지한다. 이들은 밤마다 땅을 판다. 오사카 성 주위의 폭파된 땅을 어둠속에서 파낸다.
미쯔키 시게루가 그린 <라바울 전기>의 그림에 의하면 태평양 전쟁 시 배가 고팠던 군인들은 파란 바나나를 일찍이 따서 땅에 묻어 놓았다가 파내 먹었다고 한다. 그 당시 비슷한 환경에서 근무 했던 조선인 군무원들 역시 무언가 땅에 묻으며 생활하지 않았을까? 근대 일본영화계에 몸 담았다가 인도네시아 초기 영화를 연출했던 허영은 이름이 세 개다. 허영(許泳), 후융(Dr.Huyung), Eitaro Hinatsu(日夏英太郞). 그는 일제 시대에 친일적 활동을 벌였다고 알려져 있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조선인 군무원을 도와주고, 네덜란드로부터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옹호하며 인도네시아의 독립과정을 다룬 <프리에다>(Frieda)를 제작한다. 이후 그는 수카르노로부터 두 개의 가방을 선물 받았고, 그 가방 속에는 금은 보화가 담겨 있었다고 전한다. 그 가방은 지금도 자카르타 시내 한복판에 묻혀있다고 한다. 다시 앞으로 가면 제주도에서 오사카로 간 재일조선인들은 4.3사건으로 도피한 이들도 일부 있다. 그 4.3 사건 이후 제주도의 밭에서는 종종 사람의 뼈가 파내어 진다.
우리는 군무원들이 땅을 파서 꺼내 먹었던 바나나와 <밤을 걸고>에서 땅을 파서 얻었던 쇠와 고철들, 자카르타 시내에 묻혀 있는 수카르노에게 받았던 허영의 금은보화는 땅속에서 연결 되어 있다고 상상한다.

우쓰미 아이코와 무라이 요시노리가 조선인이 일본의 전쟁 책임을 대신 지고 전쟁범죄인이 된 사실을 알게 된 것은 1970년대의 일이다. 1970년대 인도네시아인들은 ‘코리아가 뭔야?’라고 되물었다고 우쯔미 아이코는 회상한다. 서로가 서로를 잘 몰았던 과거, 지금도 서로가 서로를 기호적으로만 아는 현재에도 그 ‘모름’속에서 이어갔던 작은 역사와 이야기들은 땅속에 묻혀있다. 이 동선은 한국과 일본, 싱가포르, 태국, 인도네시아와 주변 섬들까지 매우 넓다. 과거의 동선을 지나는 시간이 현재보다 훨씬 길다면 그 동선은 지금의 것 보다 시간적으로 지리적으로도 휠씬 길 것이다. 그 방대한 시간과 거리를 그들이 견디고 무엇을 만났을 지 상상하는 것처럼, 동아시아의 가깝지만 먼 시간과 거리에서 우리가 어떻게 견디고 만나야 하는지 생각해 본다. 그리고 그 계기를 R:ead가 마련해 주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온유쥬의 낭독에서 온 몸이 말하는 힘은 다시금 ‘할아버지의 노래’가 ‘할아버지지의 언어’가 무엇이었는지 나를 상기시켰다. 한국의 우리 세대에서 할어버지는 참 낯선 존재라고 생각된다. 나는 한참을 떠올렸지만 ‘할아버지의 언어’가 너무 희미해서 어떤 목소리였는지 어떤 어투였는지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아마도 나는 한 동안은 그것들을 계속 상상해 볼 것 같다.

비분절(非分節) 대화의 힘

서로 다른 언어로, 완성되지 않은 작업계획에 대해 대화를 한다는R:ead의 목표는 처음에는 그저 불가능해보였다. 소통은 일치와 투명함을 기반으로 한다는 선입견을 여전히 붙들고 있던 나로서는 그 불투명한 조건 하에 짧지 않은 대화를 나누는 것에 대해 좀처럼 확신이 들지 않았다. 예술에 대해 고민한다는 최소한의 공통점만으로 낯선 사람, 낯선 언어, 낯선 분야의 사람들과 무엇을 나눌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아시아 도시와 노마드”를 주제로 한 이번 r:ead#3의 프로그램은 다양한 언어의 혼재 속에 불투명한 소통방식의 풍부함을 있는 그대로 “겪어보게” 해주었다.

액체 상태의 이미지 읽기: 믹스라이스(mixrice)와의 태평양전쟁 이주민들에 대한 대화

나는 완성된 (혹은 완성된 상태를 가정하고) 작품에 대해 글을 쓸 때마다 늘 무언가가 불편했다. 작품이 만들어진 과정에 대한 간단한 설명과 눈에 보이는 결과만으로 그 의미를 읽어내야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것은 언제나 고체가 된 작품 위에 딱딱한 프레임을 덧씌우는 느낌이었다. 또 그 프레임이 어쩐지 작품에 정확히 맞지 않는다는 자책감이 들곤 했다. 하지만 리드에 참여한 믹스라이스는 아직 완성하지 않은 작업의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해주었고, 나는 그것이 어떤 형태로 완성될 지 예측하는 일에 집중하지 않았다. 그저 그 이야기에서 떠오르는 이미지들과 지식들을 논리적 연관성 없이 늘어놓았다. 그것은 마치 액체상태에 조용히 미끄러져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믹스라이스는 r:ead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전 태평양 전쟁의 이주민에 대한 리서치를 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이주(移住)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주로 “누가 어느 지역에서 어느 지역으로 얼마나 많이 이동하였는가”라는 수평적인 움직임에 주목한다. r:ead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믹스라이스와 대화를 나누기 전에는 나 역시 그런 움직임에만 주목하였다. 하지만 이주에는 또 다른 움직임이 있는데, 바로 이주한 지역에서 정착(定着)을 하고 뿌리를 내리려는 수직적인 움직임이다. 이런 관점에서 디아스포라(diaspora, 離散)라는 단어의 어원을 찾아보니, 사실 이 단어는 이미 두 가지 움직임을 모두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단어는 씨를 “흩어서” + “심는다”(dia+spora)는 어원을 가지고 있어서, 널리 퍼뜨리는 수평의 이동과 땅에 심는다는 수직의 움직임을 모두 포함하고 있었다. 믹스라이스가 진행하고 있는 태평양 전쟁의 이주민에 대한 리서치는 수평적 움직임뿐만 아니라 수직적 움직임에도 주목하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예술가 믹스라이스는 리서치를 하면서 역사학자의 태도로 객관적 자료를 수집하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신체적이고 물리적인 행위인 땅을 파고, 묻고, 캐내는 행위에 주목했다는 점이다.
무언가를 파묻고 캐내는 행위는 그 자체는 매우 원초적(原初的)이고 단순한 행위이지만, 우리는 거기에서 여러 가지 이미지를 읽어낼 수 있다. 묻고 캐내는 행위는 일단 한 지역에 일정 시간동안 머무르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이 행위에서 정착(定着)의 이미지를 읽을 수 있다. 또한 이런 행위는 때로 사회적으로 빼앗기기 쉬운 것, 허락되지 않은 것, 심지어 불법적인 것을 감추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 허락되지 않은 행위 역시 뿌리를 내리는 한 방법이기도 하다. 이렇게 믹스라이스가 읽어낸 구체적인 이미지들에 대해, 아직 작업으로 완성되기 이전 단계에서 이야기하면서, 역사에 대한 예술가의 리서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예술가의 리서치

앞에서 말한 이주의 두 가지 움직임, 즉 수평과 수직이 이미지로 표현되는 방식을 찾아보니 두 가지 움직임은 아주 다르게 재현되었다. 이주의 수평적 움직임들은 대부분 객관적인 통계에 근거한 지도나 다이어그램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았다(구글에서 “Korean Diaspora”를 검색하면 대부분 지도 이미지가 나온다). 반면에 수직적 움직임, 즉 정착에 관한 이야기들은 대체로 구체적이고 생생한 개인적 경험에 의존한 것이기 때문에 매우 주관적인 이미지들이 많았다.
믹스라이스가 수집한 자료들은 대부분 공식적이고 객관적인 통계자료들이 아니라 주로 만화, 소설, 일기, 영화 등 개인이 기록한 것, 기억에 의존한 이미지들, 허구(虛構)를 가미한 것들, 심지어 누군가 재현(再現) 한 것을 다시 재현한 이중적 재현(二重的 再現, double representation)의 이미지들이다. 이런 이미지들은 객관적 자료가 아니기 때문에 역사학적 연구의 보충자료는 될 수 있지만 사실여부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사료(史料)는 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지를 예민하게 읽어내는 예술가에게는 역사에 접근하는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다. 이런 객관화되지 않은 재현된 이미지들에서 다시 이미지를 읽어내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술가가 역사를 리서치 하는 하나의 중요한 방식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분절되지 않은 역사와 언어

믹스라이스가 주목한 이주의 이야기들은 정확한 역사적 사실들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명확한 마디로 나누기 어렵다. 그것들은 생생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들이지만 어떤 역사적 사실들을 변형한 이미지로 표현된 것들이다. 그런데 이런 분절되기 어려운 성격은 바로 이주의 역사와 긴밀하게 얽힌 언어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프로그램에 참여한 일본작가 온유주는 일본어가 모국어인 대만인으로, 할아버지에게 배운 대만어로 쓴 시를 낭독했고 오오카와 케이코는 그녀가 언어와 지역의 경계를 차분히 되짚는 장면을 절제된 영상에 담았다. 나는 대만어를 알아듣지 못하지만, 그녀의 낭독과 인터뷰에는 분명 일본어가 모국어인 그녀의 독특한 발음이 전달하는 울림이 있었고, 아마도 표준 중국어로는 표현할 수 없었을 역사적 특수성에 의한 묘한 정서가 압축되어 있었다. 그것들은 흔히 말하는 분절언어의 소통에서 고려되지 않는 부분으로, 명확한 마디로 나누어 설명하기 힘든 요소였다.
다시 말해 이들 예술가들은 분절되지 않은 역사와 분절되지 않은 언어에서 강렬한 이미지를 포착하려 했다. 이런 이미지들은 객관적이고 규범화된 역사나 언어와는 거리가 멀지만 실제로 적지 않은 아시아의 이주의 이야기들은 바로 이런 분절되지 않은 차원에서 쓰여졌고, 또 역사와 언어가 그런 차원에서 긴밀하게 결합되기도 하였다. 성서에 등장하는 시볼레트 이야기처럼 아시아에서도 이주민들이 현지의 언어를 사용하지만 다르게 발음하면서 차별이나 학살의 희생자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번 r:ead 프로그램을 통해 새삼 주목하게 된 것이 바로 이런 분절되지 않은 대상들을 예술가들이 읽어내는 과정이었다. 아시아 예술가의 눈으로, 목소리로 기록한 이런 대상들은 아마도 정통적인 역사학 연구에서는 간과되기 쉽거나, 또는 섬세하게 설명하기 힘든 부분들이다. 예술가들이 이 분절되지 않는 언어와 역사들을 어떻게 시각적, 청각적 이미지를 통해 기록하는지를 또 다른 R:ead 프로그램에서 지속적으로 논의했으면 하고, 나 역시 좀더 장기적인 연구 과제로 삼으려 한다.

에필로그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동안 많은 참여자들이 홍콩의 시위와 그를 지지하는 상징인 노란 리본을 매달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한국에서도 이 노란 리본이 세월호 침몰사고의 원인규명을 위한 연대의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다. 각국의 시위대가 서로를 지지하고, 서로의 민주주의를 기원했다는 점에서 작은 상징을 통한 큰 연대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짧지 않은 프로그램 내내 세심하게 일정을 기획하고 엄청난 집중과 시간을 요하는 통역을 담당한 스태프들의 노력은 그 자체로 감동인 동시에, 이 프로그램에서 단순한 조력자의 역할이 아니라 핵심적인 부분이었다. 물론 모든 내용이 원활하게 전달된 것은 아니었지만, 동아시아에서 각자의 모국어를 사용하면서 통역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서양 언어로 번역될 때는 소실되었던 언어의 정서들을 간직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각 나라의 예술과 전문용어들에 익숙한 2개 언어 이상을 사용하는 예술전문 통역 및 기획자들이 프로젝트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언어와 연관된 예술적 주제들을 발전시키는 데 핵심적인 촉매 역할을 했다. 리드 프로그램이 아시아의 다른 나라로 계속 이어지면서 새로운 연대와 예술적 상상력이 플랫폼이 되기를 기원한다.

국제주의를 다시 찾아서

1

이번 ”노마드”를 제목으로 하는 r:ead #3를 참가하게 하는 계기는 제가 홍콩에서 만든 작품 “암베드카르 – 그녀를 위한 노래(Ambedkar – Sing For Her)” 이었다. 이 작품은 또한 2010년 “서천중토계획(西天中土計劃)” 의 요청을 받아 인도 델리에 가서 레지던스를 한 것이었다. 북경에서 델리, 이어서 홍콩, 타이남까지. 이것은 만난 적이 없었던 미묘한 여정(旅程)이었다.
“그녀를 위한 노래” 란 작품은 내가 홍콩에 있는 필리핀 노동자 단체와 함께 창작한 것이었다. 홍콩은 수십만 명의 가정고용 노동자가 있는데 주로 필리핀과 인도네시아에서 온 것이다. 그들이 얼마나 거주한 지와 무관하여 영구거주권을 얻을 수 없단다. 작품은 한 커다란 마이크와 노래방 시스템으로 구성했다. 컴퓨터 프로그램은 관객을 강제로 참여시켰다. 아니면 TV 화면이 여전히 첫 상태인 “to start the system shout” 에 멈출 것이다. 관객이 강제로 배우게 된 노래가 “빛의 노래(O Ilaw)”라고 하여 지난 세기 30,40년대에 필리핀에 널리 전하는 사랑 노래다. 가사는 아래와 같다.

오, 빛이야
이 춥고 어두운 밤에서
너는 마치 그 하늘에서의
한 별과 같아

오, 빛이야
이 조용하고 어두운 밤에서
너의 사진, 아가씨
사람을 슬프게 만들었어

깨어나라
꿈나라에서
혼수 중에서
무겁게

너의 창문을 열어
나를 바라보라
네가 이제야 이해했어
나의 진정한 슬픔을

이 노래가 사랑의 노래뿐만 아니라 미국 점령을 당한 필리핀 독립 운동의 암호이었다. 가수가 깨어내려는 대상은 각루 위에 있는 아가씨뿐만 아니라 필리핀 주민들이다. 중국 대륙 사람들에게는 ‘혼수’, ‘슬픔’, ‘깨어나라’ 등 이미지는 생소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들은 우리의 혁명 언어를 주도했기 때문이다. 20세기에 혁명, 해방, 민족독립 등은 제삼세계의 주민들이 공통 추구와 행동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중국 사람들)가 자기가 필리핀 시람과 관련이 있지 않게 느껴져 우리의 꿈은 중국이 미국과 같은 세게 패권으로 되는 것이다.

2

요 몇 년 동안 내가 아시아 교류를 참여했다. 한 새로운 냉전 짜임새가 아시아에서 떠오르는 중이라고 미묘하게 느껴진다. 홍콩, 대만, 한국, 일본은 이미 공업화 시대에서 후공업화 시대에 발을 밟았고, 민주 전형을 경력했거나 추구하고 있다. 이들의 인구와 영토 규모가 중국보다 작고 공산주의 혁명과 사회주의 실천의 경험이 없었다. 이런 지역의 예술가와 학자가 만났을 때 각자가 비슷한 문제를 직면하고 있으니 서로 참고하여 거울로 삼을 수 있고 평등하게 존중하기도 한다. 그러나 중국의 경우가 다르다. 나라 규모가 크고 20세기의 대부분 시간은 공산주의의 꿈으로 주도되었고, 30년 동안의 개혁개방 이후 공업화의 최고봉에 있다. 국가 측면에서 보면 세계 2위에 올라갔지만 일반인의 생활은 여전히 주변 지역의 거리가 멀다. 만약에 동아시아 각 지방의 문화 사업자들은 ‘서양문화’를 우리의 ‘타자(他者)’로 보면 공통 위기로 교류의 원동력이 될 것 같다. 그러나 외부의 가상적(假想敵)을 상실되면 중국과 홍콩, 대만, 한국, 일본의 차이성을 쉽게 드러나게 하여 교류의 걸림돌이 될 것이다.
동아시아 사람들 (문화 사업자 포함) 서로 연대를 건립했는데 혹시나 민족나라의 경계를 약화시켜 다시 “우리가 다 피압박자다” 라는 감정 인정과 20세기 각국을 연결되는 무산계급의 국제주의를 다시 주워야 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이것이 바로 점령운동(Occupy Movements)의 정수(精髓)다. 점령운동은 다시 계급을 정치 언어의 중심을 위치하여 ‘we are the 99% and you are the 1%’ 라고 한다. 여기서의 ‘우리’는 미국 인민뿐만 아니라 중국, 대만, 한국 인민까지 포함한다. Thomas Pikkety 등 학자의 분석결과로는 “신 자유주의가 전 세계를 석권하는 현대에서 각 지방의 주민들이 다 빈부 차이의 악화하는 공동 재난을 직면해야 한다.” 고 지적했다.
내 경험 중에 국제주의의 정신을 가장 공감되는 것은 동지군락이다. 어느 나라에서 와도 서로 동지인 줄 알고, 더 많은 우정, 더 많은 도움이 있을 것이다. 이는 “우리가 다 피압박자다”라는 생각과 분리할 수가 없다. 이것도 우리에게 ‘피압박자, 무산자’등 계념은 다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는 것을 깨우쳤다. 우리가 다시 계급 시각을 취할 때 신분정치와 생태운동의 성과와 추구를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광범하고 차이를 보유하는 연맹을 건립해야 한다. 우리가 그 광범한 99%에 속한다니까.

3

이 피압박한 99%는 아마 사람 외의 식물, 동물, 토지, 하류를 포괄해야 할 것이다. 작년 여름 대 내가 상하이 “서안 비엔날레”의 요청을 받아 참여했다. 전시장은 서회구(徐匯區)의 상하이시멘트공장(上海水泥廠)의 옛 집터이다. 내가 현장을 시찰할 때, 공장 이전한 후 인적이 없어서 식물이 큰 토지를 점령한 것을 발견하여 아주 기뻤다. 내가 원림(園林) 사업을 한 친구를 부탁해 여기에 있는 식물을 판별해 달라고 했다. 뜻밖에도 닥나무, 계요등, 개똥쑥, 박주가리, 마편초, 그리고 감소종에 속하는 돌콩 등 20종을 넘었다. 전시 주최자가 원래 이 넓은 ‘잡초’를 제거하여 한 시멘트 광장으로 바꾸어 만들 계획이었다. 큐레이터 유소(劉瀟) 씨가 저를 위해 그들을 설득했다. 이 ‘초지(생태학자에게는 도시에 잔존한 근-자연생태환경’)’ 를 보류했다. 그러나 공사팀의 공인들은 내 의도를 몰라 한손간에 1/4의 초지를 불도저로 팠다. 이것은 다른 작품과 달리 마술처럼 무슨 수단으로 보수할 수가 없다. 아무리 재능이 있는 예술가라도 자연환경을 창작하지 못한다. 그 다음에 누가 공사팀을 지시해 초지 주변에 구멍을 파 나무를 심었다. 초지에 원래 자연스럽게 자른 녹나무는 아주 웅장하게 생겼지만 원림 회사가 이식해 온 녹나무는 몇일도 지나지 않아 반이나 죽어 버렸다. 전시 시작하기 전에 청소부들이 와서 작은 건물안에 있는 담쟁이덩굴을 다 없애버렸지만 초지 속에 있는 일회용 도시락은 여전히 남아 있다. 식물은 마치 우리의 한 거울이 되는 것처럼 우리의 고집과 교만을 반사하였다.
초가을 때, 초지에 ‘양미역취’ 가 만발하였다. 양미역취는 지난 세기 30년대에 관상용 식물로 캐나다에서 중국으로 수입한 식물종이다. 천적이 없기 때문에 중국에 침입한 다년생식물로 발전하였고 화동 지역의 큰 땅을 차지하였다. 농민들이 아주 싫어하는 잡초 중 하나다. 사실상 외래 식물이 많이 있는데 올해 봄에 심천(深圳)에 현지 ‘야초’ 를 조사했을 때야 길가에 있는 물중은 전반적으로 중남 미주에 온 것을 발각했다. 오늘날, 나라가 물중을 국경을 넘어가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지만 양식, 과일 등 식물 상품은 자유무역의 논리를 따라 세계 각지에 유통한다. 양자가 자본주의의 수요로 인했다. 국가 폭력이 자본주의 체계의 안정을 유지하고자 한다. 그러나 더욱 격렬한 유통으로만 자본의 가치를 높일 수가 있다. 식물은 피압박자와 연합하여 새로운 국제주의를 발전할 수 있는가?

4
내가 “혹농국제(酷農國際, Queer Farmers International, 약칭 QFI)” 라는 조직을 만들고 퀴어(queer)의 생활, 재직실천, 국제주의 3자 간의 연결을 탐색할 것이다. ‘배움’ 은 이 계획의 핵심이다. 우리는 배움만을 통해 불확정한 미래를 묘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퀴어가 간단히 ‘동지’ 의 신분으로 동등하게 하지 않고 주류 생활방식의 검토와 반항을 강조한 것이다. QFI의 멤버로 되는 것은 ‘퀴어시험’ 을 통과해야 한다. 시험의 내용은 중인의 토론으로 결정한다. 재식한 측면은 현지 전통 부족(部族)에게 배울 것이고 입체재식 등 신기술도 차용할 것이다. 새로운 국제연대를 형성한다. 다른 구역에 재식하는 약용식물은 상품이 아닌 선물로 다른 지역에 필요한 사람에게 줄 것이다. 국제주의는 실제적인 느낌과 진실한 감정으로 통해야 뿌리가 내리고 싹이 틜 수 있다. 선물, 치료는 감정과 갈라놓지 못한다.
공조준 교수, 소마치아키 여사, 그리고 모든 참여자에게의 도움으로 내가 타이남에서 밀접한 토론을 통해 요 사이의 작업을 검토할 수 있게 하여 국제주의를 다시 찾아야 할 긴박함과 가능성을 다시 보이게 하는 것에 대해 매우 감사드린다.

2014년 11월 16일 홍콩에서.

역사에 기생하다: 개왕전(開王殿)의 이야기

타아남에서 몇 걸름만 가면 한 절과 만나게 된다. 무슨 신명을 모시는지 무관하여 다들 중중첩첩하고 극히 염려하다. 반짝반짝한 현대화적인 등불을 더하여 마치 도시에 가장 활기찬 곳같다. 신명은 인간의 일상생활, 그리고 도시 공간에 이렇게 혁혁한 자리에 차지하는 것은 다아남에만 있는 느낌이다. 그라나 가우숑에 있는 개왕전(開王殿)은 완전 다른 면목이다.
가우숑의 개왕전에 온 시기는 한 무더운 오전이었다. 멀지 않는 곳은 ‘국정 고적’ 인 중도 당영전요창(中都唐榮磚窯廠)이다. 이 사이에 모든 건축물을 없애버려 초라한 황무지이자 잡초들이 즐겁게 자라 있다. 개왕전은 타이남의 절의 큰 광경과 빛깔이 환하고 아름다운 것이 없다. 작고 열린 한 칸이 불과하다. 모든 진열 상황은 이를 지키는 늙은이처럼 나이를 많이 먹었다.
우리가 방문할 것을 알게 돼서 노인 몇 명이 이를 위해 오셨다. 그들은 가우숑 대학교의 양 선생과 같이 우리에게 개왕전의 역사를 소개한다. 중도 당영전요창(中都唐榮磚窯廠)의 전신은 일본인이 1899년에 이곳에 건설한 공장이었다. 창립 이래 애하천(愛河)의 운송과 자원의 우세로서 연안의 점토와 주변 시산(柴山)이 제공하는 나무 재료로 공장의 장사가 번창하여 펑후와 타이남에서 큰 규모의 이민을 끌어왔다. 그 후에 신중국의 창립하고 국민당이 대만으로 이전하여 역사의 흐름 속에 공장의 주인도 바꾸었지만 TB벽돌의 판매량이 대폭 올랐고 심지어 홍콩의 학교 건설까지 지원했다. 우리를 열정하게 접대하는 아저씨도 그 당시 공장에 일했던 소년노동자였다.
벽돌공장과 같이 나타난 것은 바로 개왕전였다. 그 당시에 이곳으로 이민하여 벽돌 만들기로 생활을 유지하는 남녀노소는 밤낮을 구분하지 않아 노동력을 제공하고 있었다. 그러나 의료적과 생활적 보장을 얻지 못하였고 치료과 약을 구하는 길도 없었다. 그래서 노동자들이 자기가 만든 벽돌로 개왕전을 지었고 자기 고향의 신명을 모신다. 양 선생의 말로는 그 잔혹하고 착취하는 시대, 의료 조건 최악의 상황에서 개왕전은 그들의 의탁이고 의료와 사회 보장의 중심이었다. 한 아줌마가 개왕전의 기록부를 집에서 가져왔다. 그 안에 수백 년간 가가호호가 도움을 청하는 이야기를 기록하였다. 어느 집에 며느리가 미쳐버리고, 어느 집에 누가 불치병을 앓았고, 어느 사람이 말할 수가 없었고……. 이 기록을 쓴 다음에 주사자(主祀者)가 처방을 적고 약을 내어 신명을 청한다. 부지불식간에 한 신체와 정신적인 긴장감을 확 찬 사회 생활사를 기록하였다. 아줌마가 기록부에 있는 글씨를 판독하면서 개왕전의 신명이 얼마나 신통하는지, 당시에 먼 사람까지 와서 모신 성황를 강조했다. 아저씨가 개왕전의 신명이 이렇게 신통하는 이유가 중국 대륙에서 직접 분가해 오는 것이었고 대만에서 차례가 아주 높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 후에 많은 대만 절의 신명들은 개왕전에서 분가 나간 것이고 법력이 부족할 때 다시 돌아와 개왕전의 신명에게 가르침을 요청해야 한다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신명 신양 세계에 성장하지 않았는 저에게는 이 신명 간의 관계, 그리고 노인들이 개왕전에 대한 신양과 감정을 이해하기 그리 쉽지 않았다. 그러나 작고 낡은 개왕전과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벽돌 공장이 내 머리에 극히 선명한 화면을 성형시켰다. 이 벽둘 공장을 세웠을 때 그 당시 최첨단의 벽돌 공예를 수입했다고 한다. 오늘날에 이 폐기한 벽돌 공장을 보아도 기세가 없지 않는다. 그러나 하루 중일 노동하는 노동자를 보장하고, 요괴를 퇴치하고, 질병을 없애 현대화적인 벽돌 공장을 계속 운영하고 영리하게 하는 것은, 노동자들이 고향에서 모셔 온 신명이 주관하는 이 눈에 띄지 않는 개왕전일 뿐이다.
알다시피, 그 당시의 ‘현대화’ 벽돌 공장은 가우숑의 땅의 자연 자원에 기생하고 있었고, 노동자들의 분발한 노동력에 기생하고 있었고, 여러 곳에 온 신명을 모시는 ‘봉건․미신’적인 개왕전에 기생하고 있었다.
그러나 집정자가 이러한 현대사를 정시하기를 원하지 않을 것 같고, 이 기생성(寄生性)의 현대사를 이해하는 능력조차 없다. 그래서 그런지, 내가 인터넷에 아래와 같은 ‘고적’을 인정하는 이유를 읽어봤다.
1. 당영전요창(唐榮磚窯廠)은 대만 20세기 벽돌 재료 생산 공업의 중요한 입증이다. 현존하는 건물 중에 팔괘요(八卦窯)와 굴뚝의 연대가 멀고 오래며 공법 섬세하다. 보존 상황은 상당히 완정하다.
2. 벽돌 재료는 대만 지역에 혼응토와 강철 재료 기술 발전 전의 가장 중요한 건축 재료다. 공장 현존 시설 팔괘요와 두 굴뚝은 깊은 역사와 문화 의의를 가지고 있어 보존 가치가 극히 크다.
3. 유사한 벽돌 재료 생산 시설은 대만 각 지역에 이미 보기 힘든 것이다. 당영전요창(唐榮磚窯廠)의 규모가 가장 크고 후기에도 신식 생산 시설을 증가하는 것으로 생산 기술의 진화․발전을 보인다.
4. 각각 다른 생산 시설을 공존하여 산업 문화의 희귀성, 대표성, 완정성을 가진다.
5. 산업 관점으로 말하면 가우숑 시 공업화의 진행 과정에 중요한 입증이다. 이는 건축 재료를 제공하는 산업 차원에서도 대만 공업과 경제 발전 진보의 역사적 가치와 의미가 있다.”
이것으로 판단해 보면 역사에 대한 존경하는 척하는 집정자가 실제로 말하려는 것은 ‘경제’ 에 대한 중시와 ‘현대’에 대한 경앙뿐이다. 그들의 눈으로 보는 ‘가치가 있는 역사’ 가 무엇이냐면, 바로 ‘경제비상’ 과 ‘기술진보’ 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진화와 비상을 시킨 땅에서 무슨 기생하는 생활을 발생했는지 완전히 무시하였다.
오늘날, 이 기생적인 성격이 있는 현대사를 잊히거나 삭제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세계 각 지역의 발전주의자의 통폐다. 그래서 가우숑의 새로운 토지개발과 애하 연안 고급주택의 건설과 수반하여 중도 당영전요창(中都唐榮磚窯廠)은 ‘현대’ 의 화신(化身)으로 보류되었다. 그러나 개왕전 대표로 벽돌 공장을 지지하는 생활 마을은 이미 깨끗이 제거되어 아무도 남지 않았다.
타카하시 테츄야(高橋哲哉)가 후쿠시마 문제를 토론할 때 이렇게 “희생의 체계” 를 정의하였다. “희생의 체게 속에서, 어떤 사람의 이익은 타자의 생활(생명, 건강, 일상, 재산, 존엄, 희망 등)을 지속적으로 희생하여 생산되는 것이다. 비희생자의 희생이 없다면 희생을 요구하는 쪽은 이익을 발생하는 것은 불가능하여 이익을 유지하기도 못한다. 그러나 이 희생은 항상 은폐되거나 한 공동체(나라, 국민, 사회, 기업 등)의 ‘존귀의 희생’으로 미화됐거나 정당화되었다.
만약에 타카하시에게의 초점은 희생은 어떻게 일본 문화 속에 공통채의 명의로 정당화와 숭고화이라면, 그럼 저에게는 더욱 흥미로운 질문은, 여러 가지 식민과정으로 발전되는 아시아 나라와 지역에게 특수 발전을 위한 희생을 요구되는 체계는 어떻게 계속 은폐할 수 있는가? 서양에 대해 말하자면 이 희생 체계는 ‘암흑의 마음’ 혹은 동양주의 속에 더욱 많이 체험되었다면 아시아나라나 지역의 사람들에게 적나라한 희생과 식민지 개척자의 기생하는 것보다 더욱 생동적인 역사 경험이 없다. 이는 희생 체계를 저항할 만한 말씀이고 그리고 단순한 현대적인 환상을 벗어날 만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결코 이와 같지 않다. 식민을 당한 여러 아시아 나라들은 이에 대한 특수한 면역력이 따로 없는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경제주의의 말씀으로 역사경험을 바꾸어 쓰는 것은 이 시대의 주류가 되어 버렸다. 희생을 당한 역사경험은 도대체 어떻게 문화 측면의 경제주의 조작으로 은폐되었는가? 이르기까지 이 희생이나 기생한 감각구조를 양성하는 것을 받아드리고 무시하게 됐다? 자기 자신을 정의감 충만한 인간으로 여기는 현대 도시인에게는 비슷한 구조인 희생 체계는 그들의 도덕 이념과 공존할 만하는가?
이를 말하자면 개광전의 이야기는 간혹 답안을 제공하였다. 정부가 주도하는 모든 현대 역사의 상상과 교육이 이에 대한 미를 수 없는 책임이 있다. 만약 소위 ‘현대화 발전의 유적’ 은 항상 ‘중도 당영전요창(中都唐榮磚窯廠)’등 경제비상의 상징을 보존하지만 ‘개왕전’등 실제적으로 이 경제비상의 사회생활을 지지하는 것을 삭제한다면 ‘희생이 필요 없는 발전’ 혹은 ‘자기 원만의 현대화’는 역사교육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속까지 고정화시킨 발전방식이 되었다. 이 기초로 하는 발전에 대한 상상은 자연스럽게 오늘날의 생활 기석이 되었다. 역사를 분해하여 국부적인 경제 발전적인 ‘역사교육’으로 사람들이 살제 존재했던 희생/기생을 안 보이게 한다. 더하여 천진난만하게 생각하되 현대역사가 희생을 하는 사람과 기생하는 토양이 없어도 스스로 형성할 수 있다고 한다.
떠나기 전에 동행자가 농담을 삼아 말했다. “개왕전의 신명이 이렇게 영통하신다면 자기를 가우숑 시 정부의 개발계획을 피해 없애버리지 않게 하지 않아?” 그 어렸을 때부터 벽돌공을 해 온 아저씨가 말했던 ‘고적 보호’ 에 대한 평가를 생각난다. 그 아저씨가 ‘건축 수선 공사는 공장 구조를 숙지한 우리 늙은이들을 배제하고 공장 구조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 진행했다. 표면적으로 보기 좋게 수복 강화를 했는데 실제적으로 건축물의 부담을 가해 더욱 쓰러지기 쉽게 만들었을 뿐이다.’고 말했다.
이렇게 보면 역사의 어느 부분에 있는지 물론 벽돌공장과 개왕전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기생자와 피기생자의 조합이다. 벽돌공장이 ‘국정 고적’ 이 될 때 개왕전과 이를 사랑하는 노인들까지 보존하고 상속해야 한다. 만약에 이 전체성과 피기생자에 대한 존중과 이해를 무시하고 현대화가 스스로 완성됨의 환상에만 매두몰신하면, 현대화 ‘고적’ 은 와르르 무너질 때가 멀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혹시, 신명의 위력, 혹은, 역사의 신판이라고 한다.

2014년 10월 27일 상하이에서.

꺼져가는 과거를 타인의 마음에 어떻게 남길 것인가

내가 이번 r:ead #3에 참여하게 된 것은 소설가의 온유쥬씨의 권유로 인해서이다. 나와 온씨의 만남은 일년반 전의 일이다. 2013년 3월, 나는 일본 문학작가 리비 히데오(リービ英雄)가 52년전에 가족과 보낸 대만 타이중에 다시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 여행에서 만났다. 그 여행의 기록을 『이경 속의 고향』이라는 영상작품으로 만들었다. 그 여행의 동반자 중에 한명이 온씨였다.
영화의 내용과 배경을 간단히 설명 드리자면, 리비 히데오(リービ英雄)는 서구출신의 첫 일본문학작가이다. 중국어학자였던 아버지의 일때문에, 6세부터 10세까지 4년간을 대만 타이중에서 보냈다. 그가 4년간 생활한 지역은 일제시대때「모범마을 (Model Village)」이라고 불리워졌던 곳. 일본이 만든 모범적인 (이상적인) 도시였던 것이다. 거기에는 큰 정원이 있어 일본가옥이 세워졌고, 전쟁 전과, 전쟁 중에는 타이중 시장등 일본인이 살고 있었다. 즉 일본이 식민지로 만들려고 한 실험적인 유토피아였다. 1949년 이후에는 같은 위치에 마흔가구 정도의 미국인 가족이 생활했다. 그 중 한 가구가 리비 가족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중국어학교의 교장을 하고 미국인에게 중국어를 가르쳤다. 집 안에는 아버지를 찾아오는 늙은 장군의 중국어가 울려, 살고 있는 집은 전쟁 전의 일본인이 세운 문화주택, 일본인이 남기고 간 책이나 레코드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가 사는 집의 높은 담 건너편에는 현지인들이 사는 마을이나, 돼지가 뛰어 다니는 시장에서 대만어가 울리고 있었다. 스스로 선택 방법도 없이 그의 어린 시절은 그런 환경 속에서, 즉 일본과 아시아의 역사 관계 사이에 있었다. 그리고 그의 가족은 그곳에서 붕괴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 땅에서, 대륙에서 온 상해 여성과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혼을 하고, 그와 어머니, 그리고 동생은 그 땅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간다. 리비 히데오(リービ英雄)가 보낸 1950년대의 그 대만은, 결코 그 당시의 많은 현지 사람들이 잘 아는 타이중 세계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히려 현지 사람들의 생활에서 고립된 유토피아 같은 곳이었다. 지리적으로만 그랬었던것 뿐 만이 아니라, 그에게 그 장소는 가족 4명이 유일하게 함께 보낸 곳이기에, 그의 기억 속에서는 영원한 유토피아 인것이다. 그는 이 52년 동안 결코 이곳을 다시 방문하지 않았다. 그 감정을 잘 설명하는 문장이 있으므로 인용한다.
‘- 그 섬은 나의 나라가 아니다라고 그 곳을 떠나서야 잘 알게되었다. 그러나, 나의 집은 어디에 있는지, 아니면 어디에 있었는지라고 질문을 받는다면, 그 섬이라고 대답 할 것이다. (중략) 그러나 「나의 집」이 있던 현실의 장소를 다시 방문하는 것은 아니었다. (중략) 바로 그 섬에 가기 위하여, 나는 오랫동안 주저하고 있었다. 주저 한 이유는 정치적이었다. 우리집은 남의 집이 되었다. 그리고 나를 감싸고 있던 풍토 자체가 사라진 것이다. 우리집이 있던 섬은 풍토를 지워 버릴 정도로 경제발전을 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우리집이 있던 섬은 동내가 수십년 동안 변하지 않는 서양과 달리, 집도 집의 풍경들도 어쩔 수 없이 단기간에 완전히 바뀌는 동아시아에 있기 때문이다.’
리비 히데오(リービ英雄) (이랴 · 포르 모사 – 43년만의 대만『월경의 목소리』(越境の声)이와나미서점, 2007년부터)
리비 히데오의 반세기 만인 고향의 재방문 배경에는 이처럼 지극히 개인적인 사적인 소설적 요소와, 동아시아 역사의 요소가 뒤섞여 있었다. 한편으로는 개인 감정의 이야기속에는 동아시아에서 반복된 침략과 식민지지배가 개인에게 남긴 트라우마, 그 곳에 남겨진 흔적을 강하게 느끼는 부분도 있었다. 나는 이 작품의 편집단계에서 이 개인의 감정과 역사적 배경을 어떻게 작품으로 만들어나갈 것인가를 신중하게 생각하는 작업을 계속했다.
과거에 존재했던 시대배경과 그 곳에 있었던 개인의 감정은 이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 보이지 않는 것.
개인의 기억 속에만 살아있는 것을 영상으로 촬영하고 표현한다는 것은 냉정하게 생각하면 무모하게도 생각되어진다. 동시에 항상 업데이트되는 시간축에서, 다음 순간에는 지난 시간에 휘말려가는 그 자리에 있던 개인의 감정, 공간과 시간을 어떻게 잡아 그것을 재현, 재구축할 것인가에 대한 시도는, 스스로가 그 곳에 있었던 역사에 대해 알고, 그리고 말할 수 있는 것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것을 실감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완성된 작품이 시도에 도달하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실제로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 때 “이 시대의 대만, 중국, 일본, 미국의 관계에 대해 아무것도 작품 속에서 언급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개인적인 테마만 그렸던가?”라는 의견과 질문을 받았다.
이 작품에서 또 한 사람의 주인공이기도 한 온유쥬씨는 작품이 완성 된 후, 상영 활동에 거의 매번 참여하여 상영 후 관객과의 토론을 함께 진행했다. 그로 인해, 온씨와 나는 표현방법은 달라도 서로 공통적인 주제를 의식하고 있는 동지인것을 알 수 있어, 만나서 의견을 교환 할 때마다 더욱 소중한 존재가 되어 갔다. 상영 때 마다 우리는 이 작품을 여러 번 관객과 함께 보면서, 관객들로부터 다양한 반응을 얻었다. 관객과의 대화 속에서 나는 온씨의 말에 많은 용기를 얻었고, 영상작가로서 소설가로서 그 시간을 공유하고, 서로의 의견을 나누는 과정에서 무언가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 끝에 r:ead #3에 참여하게 되었다. 온씨와 나는 이 체재기간 동안, 대만, 한국, 중국의 아티스트와 큐레이터 여러분들과 많은 토론을 하게 되었고, 타인의 의견에서 새로운 자극을 받았으며, 그것에 대해서 다시 논의하여, 우리들만의 생각으로는 떠오르지 않았던 주제와 의견에 대해 생각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반면에, 우리가 지금까지 쌓아 온 대화를 더 명확한 언어로 대체 할 수 있었다. 그것은 온씨가 최종 프레젠테이션 중에서도 말했던 “개인적 것에 역사를 포함한다.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개인이 인용되는 것은 아니다. 개인이 존재했기 때문에 역사는 존재한다”라는 말. 나는 온 씨가 말했던 말을 지금까지도 계속 몇번이나 머리속에서 반복하고 있다. 두사람 다, 이 일에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창작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리고 r:ead #3의 2주일 간의 체류를 끝내고 일본에 돌아온 후, 한가지 더 추가하고 싶은 것에 대해 생각하게되었다.
“나는 영상으로 표현하는 재현・재구축은 지금의 진보된 기술에서 예전의 사건을 리얼하게 복제한 그대로를 재현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나는 거짓말의 세계를 믿게 할 수 있는 것을 마치 자신이 이해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영상이 가지고 있는 위험성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유사체험을 함으로써 자신도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금 현재의 영화가 저지른 죄가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허구의 세계를 사실이라고 생각해서, 자신의 몸에 다가오지 않는 즉, 방관자인 채로 그 사건이나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감정까지도 공유 해버리는 무서운 도구를 손에 가진 것 처럼 생각한다. 그럼 우리가 과거의 개인사에 대해, 거기에 있던 개인의 감정을 마주대하고, 그것을 작품으로 만든다는 것은, 어떻게 마주대해야 하는 것인가. 또한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도대체 어떤 것인가? 그 자리에 없었던, 경험하지 못햇던 사람이 그 때의 이야기를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지 않는 것은 간단하다. 그러나 그때의 사건은 지금과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어떻게 지금 시대에 반입할 수 있는지, 시간이 지나 희미해져가는 그 기억과 감정 그리고 역사를, 그 희박함을 인식하면서 우리가 표현하는 수법을 사용해서 어떻게 이어나갈 수 있을까,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잊혀지지않고 어떻게 남겨갈 수 있을 것인가 …”
r:ead #3의 기간 동안, 여러 번 반복해서 나는 아직 모색 중인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참여자인 아티스트 앞에서 말하고, 같은 공간을 공유하면서 다른사람의 의견도 들을 수 있었다. 이로인해, 자신의 말에 위험성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고, 한번 더 생각해볼 수 있었다.
이야기가 앞뒤 바껴버리지만 『이경 속의 고향』은 완성했지만, 몇번 봐도 아직도 나는 리비 히데오라는 작가에 대한 신비와 관심을 계속해서 가지고 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화면에 비치는 그의 모습은 동아시아의 복잡한 역사의 이야기와 그 속에서 흔들리는 개인의 감정이 혼재되어 있기때문일 것이다. 그 사실이 내 마음을 북돋우게하고, 동시에 가슴이 막힐 듯 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감정과 유사한 감정은 온씨의 존재에서도 느낄 수 있다.

영화나 소설을 통해 역사와는 다른 방법으로 역사를 알 수 있다고 우리는 믿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정보로는 알 수 없는것. 표현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

자신의 인생은 모든 논픽션이지만 논픽션을 만들면서 사람은 그 의미를 알 수 가 있다고, 어떤 토크때 리비씨가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작가가 창작함으로서 사람들은 그것에 관심을 가지게되고 적극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 그리고 잊지 않고 기억한다. 그것을 몸으로 행동하고 창작하는 작가가 내 앞에 두명이 있다. 그것으로 나는 용기를 얻고, 이 작가와의 관계가 다음의 새로운 작품의 형태로 연결되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역시r:ead #3 의 참여는 내게 새로운 전개의 기회를 제공했다. 나와 의견을 교환하고 서로 자극을 주고 받는 여행의 파트너였던 소설가 온유쥬의 존재가 이번에는 피사체가되고 있었다. 그것은 언젠가 그렇게 될 것이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상상이상으로 빠른 전개였다.
이 체류 동안, 온씨가 태어난 대만에서 직접 소설의 원문을 찾아, 보고 듣고 체험하고 그것에 대해 말로 표현 했다. 최종프레젠테이션에서 그녀는 마지막 부분에 「대만 할아버지에게 편지」라는 시를 대만어로 낭독하고, 그 자리에 있던 우리는 그 육성을 들었다. 나는 한명의 소설가가 앞으로 창작의 영역에 발을 디뎌가는 출발점을 목격하고, 그로 인해 나 스스로 새로운 창작도 시작했다. 우리들은 이 체류 동안 말로 표현한 신념을 가지고, 어떻게 사람들에게 과거 역사의 트라우마로 인해 침묵하게된 개인의 말을 표현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이끌어, 잊을 수 없는 것으로 바꿀 수 있을까?
이하 최종프레젠테이션을 인용하겠습니다.


불과 일년반 전에『이경속의 고향』촬영을 계기로 나는 온씨를 알게 되었다.
그녀의 소설은 일상의 개인의 삶과 거기에서 서로 감정을 떠오르게한다.
그녀는 그렇게 독자에게 접근하여 부드럽게 작품세계에 끌어들여 뭔가를 뉘우치게한다.
생각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는, 나는 알지 못했다, 무지였던 것을 알게 된다. 나는 그녀의 창작 방법에 공감을 느꼈다, 나 스스로도 영상표현에서 그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우리는 표현방법이 달라도 서로 같은 방법으로 (예를들어 과거와 현재의 사람들의 감정에 대해, 장소와 기억에 관하여) 전하려고 하고있다.
온씨가 먼저 말했듯이 “개인이 있었기 때문에 역사가 존재한다”는 것을 평소 생각하고있다. 그녀와 함께 이 r : ead에 참여한 여러분과 함께 토론을 하면서 우리는 더욱 이런 생각을 강하게 가지게 되었고,“개인이 있었기 때문에 역사가 존재한다”는 것을 재확인 할 수 있었다.
이 부분을 더 탐구하는 동반자로 온씨는 나를 이 r : ead 프로젝트에 초대 해 준 것이라고 송구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그녀가 쓰는 소설과 마찬가지로 나는 살아있는 온씨가 매력적이다. 그녀의 이 작은 몸에는 많은 갈등과 혼돈과 말과 감정과 시대와 역사와 풍토가 뒤섞여있는 그 몸과 거기에서 나오는 육성 또한 나를 흔든다.


최종프레젠테이션을 향한 2일간의 준비시간 동안, 온씨는 대만문학관에 『로혁약 소설』을 찾아갔다. 세세한 내용은 온씨의 설명대로이기에 생략한다. 온씨는 여기에서 로혁약의 소설 『백목련(白木蓮)』하고 감동적인 조우를 한다. 내가 여기서 조우한 것은, 소설「백목련(白木蓮)」과 현대 소설가 온유쥬가 만난다는 것이다. 문학관에서 찾았던 그의 일기를 둘이서 열심히 보고 있었는데, 70년전에 쓰여진 소설『백목련』을 다른 동행자였던 ZOE가 찾아왔다. ZOE는 대만에서 태어나 자라 여기에서 우리의 말을 통역 해준 사람입니다.
ZOE씨는 유창한 일본어와 대만어를 사용하고 r:ead기간 내내 우리의 일본어 통역으로 곁에 있으면서 지원해 주었다. 온씨와 저, ZOE씨는 일본어라는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일상의 농담, 또 진지한 토론까지 모든 이야기를 공유하고 말을 주고 받았다. 아무런 위화감도 어색함도 느끼지 않으면서.
로혁약의 소설『백목련』을 통해, 두사람이 대화를 시작했다.
그냥 일상을 보내고만 있다면 떠올리지 못하고 스쳐지나가고 말 두사람의 대화가 거기에서 시작되었다.
그 순간부터 나는 카메라 뒤에서 투명한 존재가 되는 감각을 느꼈다.
내가 촬영자로 피사체와 마주할 때의 신체 상태.
눈앞에 나타난 공간과 거기에 흐르는 감정과 말을 나누고 싶을 만큼 나의 존재는 투명하게 되어간다, 두사람과는 대조적으로 나에게는 언어로 말하는 감각이 없어져 간다.
두사람의 모든 대화가 그대로 직접 몸 안에 들어간다.
그때 내 머리는 매우 뉴트럴한 상태이다.

70년전에 일본어로 작성된 대만인 소설작가를 둘러싸고 지금을 살고있는 동세대의 두 사람이 말했다.
책상 위에는 70년 전에 쓰여진 로혁약책이 놓여져 현재 시간이 흐르는 이 공간에서 마주 보면서 두사람이 이야기하는 것은 공공의 준비된 장소에서는 좀처럼 말하지 못하는 두 사람의 삶의 이야기이다.
그 대화와 감정이 보일 듯 말 듯 하는 두사람의 표정과 몸짓을, 나는 영상으로 받고 그 배경에 있는 시각화 할 수 없는 요소를 이미지로 잡으려고 한다.
그 화면 밖에 있는 시간과 공간과 감정을 잡으려 온 신경을 쓰고 있었다.

이렇게 우리는 2주일 간의 타이난에서의 체류를 끝내고, 새로운 창작이 시작하는 예감을 함께 느끼고 있다.
일본에 돌아간 후 온씨는 분명 새로운 번역의 형태로 그녀의 해석으로『백목련』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를 내가 찍어가는 것이다.

내가 그 동안 찍은 소재를 여기에서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다. 아직 제대로 된 윤곽은 잡혀져 있지 않기때문에, 이 소재를 사용하게 될지도 어떨지 모른다.
단지 지금의 단계에서 내가 제안할 수 있는 것은, 초기단계의 이 소재를 여기서 보고 나 자신 이 소재에서 뭔가를 재발견 할 수 있는지도 모르고, 여러분과 이 단편을 공유함으로써 서로 생각이 발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0분의 라슈 (편집에 이르지 않은 소재를 늘어놓은 상태 시사)를 보아주세요.
(※이하 그 자리에서 흘린 라슈에서 뽑아 낸 것)

Okawa1
(로혁약의 소설『백목련)의 일본어 원문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중국어로 번역 된 것을 발견한다)

Owaka2

Okawa3

Okawa4

Okawa5
(온씨와 Zoe는 로혁약 책을 끼고 각각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시작도 되지 않은 프로젝트의 보고와 제기가 되어 버렸습니다만, 이것으로 내 프레젠 테이션을 끝마치겠습니다.


온씨와 나의 최종프레젠테이션 후 r:ead #3에 한국에서 참여한 아티스트 mixrice의 조 지은씨는 온씨의 표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것이 인상에 남는다.
“온씨가 하고 있는 것은 재현에 대한 재현의 시도, 아시아의 굳어버린 역사를 풀어내는 작업”그리고 큐레이터인 안서현씨도 “온씨의 육성 시 낭독은 말로 만이 아니라 온 씨의 생각이나 느낌이 음성에 압축되어 있다… 온씨의 문장에서 떨어져버리는 것을 영상으로 표현한다. 소설과 영상, 두 작품이 아니라 하나의 작품이 될 것 같은 작품 작업을 하고 있는 느낌을 가진다.”체류동안 많은 대화를 거듭한 이 두분의 말에 나는 지금 다시 감사하고 있다.

r:ead #3 체류로 인해, 온씨와 나는 확실한 새로운 전개의 시작을 하는 계기를 찾을 수 있었다.

Nov.20 2014

『옥란화(玉蘭花)』와 할아버지의 소리

실제로 있었던 과거를 그대로 재현(再現)하는것은 결코 있을 수없다. 왜냐하면 재현은 모두다 잠정적인것이며, 다양한 해석에 좌우되기 때문이다.사실 그 자체를 더이상 말하지는 않는다(……) 역사에있어서 역사를 만들어내는 과정과 마주보지않으면 안 때가왔다 (셸리 와리아)

r:ead의 제3회째가 대만,타이난에서 개최된다고 소마치아키(相馬千秋)씨의 전화로 들었던것은7월 중순이었다.
“-온씨 일본의 아티스트로서 참여해주시겠습니까?”
소설가인 자신이「아티스트」로「r:ead #3」에 초빙된다는것도 어딘가 어색했지만, 그것보다 자신이 「일본」을 대표하는 사태에 나는 가벼운 현기증을 느꼈다.어쨌든 나는 「일본」에서 자란 「대만」사람이다. 그러므로, 「일본」과 「대만」이라는 두나라 사이에서 어느 나라도 자신의 나라이며 동시에 자신의 나라가 아닌것을 느끼고있는것이다.
다시한번 강조하고 싶은 것은,내가 자기스스로를 설명할때,나는 일본에서 자란 대만인이라는 요소와 내가 일본에서 자란 대만인을「대표」해서 말하고 싶다는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일본인」「대만인」 또는 「일본 에서 자란 대만인」.
나는 내 자신이 그 모두를「대표」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다. 말하자면 나는, 자기 자신을「대표」하는것 만으로도 힘에 부치며, 그것조차 부담을 느낄 정도이다. 그런것을 나는 확실히 소마씨에게 말했다. 소마 씨의 반응은 재빠르고 따뜻했다.
“-그런 온씨 이기에 꼭 참여를 부탁하드리고 싶어요.”
그리고 대화는 나의 큐레이터 역할에는 누가 좋겠스냐에 이르렀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오오카와 케이코(大川景子)였다.
『이경(異郷)속의 고향 – 작가 리비 히데오52 년만의 타이중 재방-』(2013)의 감독이다.
이 영화의 제작을 계기로 우리는 알게 되었다. 그녀가 거의 혼자 촬영 편집 완성시킨『이경속의 고향』을 처음 봤을때 나는 감동했다. 피사체에 대한 거리,소재의 편집을 통해 작품을 구축하는 감성……영상작가로서 그녀의 역량에 감격을 한것이다. 다행히 나는『이경속의 고향』의「관계자」로 오오카와감독과 함께 영화 상영회를 해왔다. 각 지를 돌아서니 우리는 급격히 친해졌다. 함께 지내는 동안 알게 된 사실이있다.
권위자가 말하는 전체의 역사가 아니라,익명의 개인사의 축적에 의해 보여지는 역사. 대문자의 역사가 잡아내지 못했던 무수한 개인의 감정. 개인이 거기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압도적인 사실이,감촉이,감정이, 거칠게 생생하게, 담겨져있는것 같은…그러한 표현에,나도 오오카와씨도 마음을 빼앗기는 경향이 있었다.
개인적인 것안에 역사가 포함된다.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개인이 인용되는 것은 아니다. 개인이 존재했기 때문에 역사는 존재한다.
바로 그것이 나와 오오카와씨의 근본적인 생각인 것이다.
큐레이터보다는 영상작가나 영화감독, 즉 표현자로서의 오오카와케이코와 함께r:ead #3에 참여하고 싶다고 느꼈다. 그녀의 이름을 말하자면 소마씨도 나의 파트너로서 최상의 조합이라고 판단했다. 그날바로 오오까와싸에게 메일을했다. 곧바로 지나지 않아r:ead #3에 흔쾌히 참여하겠다는 오오카와씨의 회신이 도착했고, 나는 날아 갈 정도로 기뻤다.
2014년9월30일 오오카와씨와 나리타공항에서 만나 같은 비행기에 탑승했다. 소마씨를 비롯한 일본 스탭들은 하루 빨리 타이페이로 출발했기 때문에 마치 두 사람 만의 여행같았다. 그러나 타이페이,타오웬 공항의 입국카운터 앞에서 우리는 일단 헤어져야 했다. 일본의 친구와 대만에 도착했을때는 항상 그렇다. 「외국인」레인에 친구들이 선,나는 그엽의「본국인」의 라인에 선다. 반대로 말하자면,나는 일본에서는 지금도「외국인」취급이다. 표지에 중화민국 (Taiwan)이라고 새겨진 여권을 가진, 나 또한 「이경 속에서 자란 아이」인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입국」과 「귀국」의 절차를 각각 끝내고 다시 합류한 오오카와씨와 나를, 타이페이 도착 로비에서 맞아 준 것이 우리의r:ead #3에있어서 절대적 존재인 ZOE(葉佳蓉)녀사 였다.
영어가 유창하고 한국어도 조금 할줄아는 그녀의 일본어는 훌륭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녀에게 일본어를 가르쳐준것은 일본통치시대에 교육을 받은 그녀의 할아버지 였다. 타오웬공항에서 첫 대면 을 하였기에 조금의 긴장감을 느끼면서 서로 인사를 했던 우리 세사람이 며칠 후 타이난국립문학관 에서 각각의 할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전혀 상상도 하지못했다.
ZOE인葉佳蓉이,일본팀인 우리의 통역겸 안내역을 담당해주었기 때문에 우리는 작품과 감동적인 만남을 할 수 있었다. ZOE는 나나 오오카와씨의 직관,감촉,감정을 민감하게 감지하고, 대화 의 상대가 되어 주었다. r:ead #3의 ZOE의 존재가 우리에게 단순한 통역이상이었던것은 두세번 강조해도 지나치지는 않을것이다.
2014년10월11일 최종프레젠테이션에서는 ZOE의 통역에 의해, 작품과 그리고 나와 오오카와감독이 어떻게 관계를 이어갈지에 대해 발표했다.따라서 * 이하 문장은 그때의 발표원고를 수정,가필한것이다. 기록과 중복되는 부분도 많이 있습니다만 양해 바랍니다.


지금부터71년전, 1943년에 대만에서 발표된『백목련(白木蓮)』이란 소설이 있습니다.
저자는 로혁약(呂赫若). 일본통치하의 대만에서 교육을 받은 그는 식민지대만을 방문한 일본인 청년 스즈키요시베이(鈴木善兵衛)가 7살 소년인 도라보(虎坊) 들과 접촉하는 스토리인 소설「백목련(白木蓮)」을 일본어로 집필했습니다.
내지 일본에서 온「스즈키요시베이」에 대해 대만의 여성들과 아이들은 동경의 눈빛을 가졌습니다. 스즈키는 현대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사진기,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며 남국정서(南国情緒)가 넘치는 대만 풍경과 사람들의 모습을 촬영합니다. 마을사람들은 스즈키를 연모하고 스즈키도 녹색이 우거진 자연 속에서 친절한 사람과 느긋하게 보냈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그는 병에걸리고, 마을의 의사가 고칠 수 없었기때문에 내지 일본에 돌아가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스즈키는 식민지 대만에서는 일시적인체류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 증거로 그는 대만의 풍경과 사람들을 일본에서 가져온 카메라라는 기계의 렌즈를 통해 봤지만, 자신은 마지막까지 대만의 풍경이 될 수 없었다.
이 이야기를 작가 인 로혁약은 7살 소년 도라보(虎坊)의 눈을 통해 그립니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미 성인이 된 도라보(虎坊)가,어림시절 스즈키가 마을에 체류했던 그때를 회상하는 방식으로 그립니다.
어른이 된 도라보(虎坊)의 손에 자신이 7살 때 마을에 일시 체류한 스즈키요시베이가 남긴 스무여장의 빛바랜 사진이 있다. 모두 스즈키가 찍은 것입다.
촬영자였던 스즈키의 모습은 어떤 사진에도 찍혀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즈키가 없는 사진들은 오히려 스즈키가 확실히 여기에 있엇던 사실을 강하게 연상시킵니다.

……사실, 난 아직 이 작품을 읽지 않았습니다.
지금 이야기한 줄거리를 알고 있을 뿐 입니다.
나는 이 소설의 존재를『대일본제국의 크리올언어』란 학술적인 책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이 책의 원문은 영어로, 저자는 「페이 갠 쿠리만(フェイ・阮・クリーマン)」이라고합니다. 재미(在米)대만인 여성입니다.
얼마 전 링시이(林欣怡)씨가 r:ead는 통역자의 존재가 인상적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의 공간 속에서 다양한 이야기가 다양한 언어로 진행된다. 통역자의 말이 여러 문화와 문화사이를 요괴처럼 방황한다는 표현을 하셨고, 나또한 그러하다고 느꼈습니다.
일제시대의 대만인이 일본어로 쓴 소설의 존재를, 대만인이면서 일본에서 자란 내가 영어로 쓰여진 이 연구서로, 게다가 일본어번역에 의해 알게되었다.
이런 상황 또한r:ead적인 경험이다라고, 지금 돌이켜 생각합니다.
나는 쿠리만씨의 책을 통해 1943년 12월 「대만 문학」에 게재된『백목련』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읽어보고 싶다고 느꼈습니다.
그것은 약 한달정도 전의 일입니다.
사실, 나는 처음부터 원본을 원해서 타이난에 온 것이 아닙니다. 타이난는「일제시대에 일본어로 쓰여진 문학작품을 다수 소장한」국립대만문학관이 있다고 알게 된것은 우연에 의한것이었고, 혹시 이 문학관을 방문하면 로혁약의『백목련』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때도 아직 가벼운 기분이었습니다.
ZOE의 협력으로 미리 알아보았을때,『로혁약 일기(呂赫若 日記)』라면 확실히 있지만『백목련』은 알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일단 가보자라고 이야기가되여, ZOE의 안내를 받으면서 오오카와감독과 셋이서 가보기로 했습니다.

문학관은 1942년 ~ 1944년 사이의『로혁약 일기』외에도 『달구지(牛車)』를 비롯해『풍수(風水)』『린거(隣居)』등 일본에서는 구하기 힘든 로혁약의 다른 작품이 게재된 선집도 있었습니다.중요한『백목련』은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충분했습니다. 특히 손으로 쓴 일기장을 복사한『로혁약 일기』는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매우 재미있었습니다.

일본인에게는 익숙한 「토요 일기(当用日記)」라고 불리는 3년 일기로, 로혁약은 일기를 적었습니다. 같은 날짜의 내용을 3년분, 같은 페이지에 세로로 쓴 형식의 것입니다. 같은 책을 함께 들여다보고 있던 오오카와감독이 그녀의 할아버지도 같은 형식의 노트에 일기를 쓰고 있었다고 알려줍니다. 그것을 들으면서 혹시 우리 할아버지도 그랬었지 않았을까 란 생각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그 일기에『백목련』에 관련 된 기술이 없는지를 찾고 있었습니다만, 점점 목적을 잊고 나는 로혁약의 육필을 정신없이 쫓고 있었습니다. 「졸려 죽겠다」 「저 녀석은 말도 안돼」
문학관과 철학등, 그야말로 고상한 기술보다 그러한 감정이 재밌다고 케이코씨와 웃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뱄은 것은 그런 매우 개인적인 감정이었습니다. 이때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저편에 확실히 존재하고 있던 로혁약라는 개인의 감정과 접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것을 느끼면서 우리가 로혁약 일기를 들여다보고 있을때 ZOE가 “『백목련』이 중국어로 번역 된 것이라면 있었습니다”라고 말하고,

『短編小説巻・日據時代 呂赫若集 冷酷又熾熱的彗眼』(前衛)
『小説全集 呂赫若 台湾第一才子』(聯合文学)

라는 두권의 책을 가지고 왔습니다.
일본어의 원작은 찾을 수 없었지만, 그 소설이 중국어로 번역 된 것이라면 눈 앞에 있다.
나는 이 상황에 대해 이상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 상황은 나의 제1언어 일본어로 작성된 로혁약 작품이, 중국어로 된 모습으로 지금 내 눈앞에 있다는 상황입니다.
원래 중국어로 쓰여진 것으로 읽어보고 싶은 대만소설은 얼마 든지 있습니다. 하지만 내 실력은 역시 일본어 번역에 의지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중국어원작 책을 일본어 번역을 통해 읽을 때 나는 이런 기분이 듭니다.

만약 대만에서 자랐다면 이렇게 돌아가지 않고 끝나는데!

그런데 로혁약의 경우 원문은 일본어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읽으려고 생각한다면, 일본어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중국어가 모국어 대만인이라면 조금 돌아가야합니다.
그러나 나는 일본어 모국어인 대만인입니다. 그렇기에 로혁약의『백목련』에 집접 가깝게 갈수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눈 앞에는 중국어판의『백목련』
『옥란화(玉蘭花/yu4 lan2 hua1)』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그것은 전후의 대만식민지문학을 연구하는데있어, 중국어로 번역된 것이었습니다.
『옥란화』라는 중국어로된로혁약과 나와의 거리가, 가까우면서도 먼, 멀면서도 가까운.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사실 이때까지 나는『백목련』에는 두 버전의 중국어 번역이 있다는 사실을 중요시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쪽 하나 또는 둘, 혹은 양쪽을 보면서 중국어를 해독하면서 여기에없는 로혁약의 일본어 문장을 상상 할 수 밖에 없다. 차라리 내가 번역할까 란 농담을 했는데, 두번역은 각각 취지가 다르다고 ZOE가 설명 해줍니다.
ZOE에 의하면, 「일본어를 잘 아는 사람이 읽으면 곳곳에서 일본어의 느낌을 느끼게 하는, 중국어로는 어느 쪽이냐하면 찌그러진 문체」와「일본어를 전혀 모르는 독자에게도 부드럽게 읽을 수 있도록 좀 더 표준적인 중국어로 다듬어진 문체」인 것이다.
즉, 하나 밖에 없는 일본어의 원작에 대해 그 번역문인 중국어쪽이 번역 될 때의 시대와 사회와 정치적 맥락의 요청에 따라 변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 오오카와감독이 한제안을 했습니다.
지금 여기에있는 두 개의 『옥란화』를 바탕으로 온씨가 자신의『백목련』을 써보면 재미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번역보다는 일종의 창작이라고 케이코씨는 설명합니다.
이 중국어를 일본어로 번역한다라기보다는 온씨 자신의 상상력으로 해석 한 자신의 소설을 쓰게 되면 분명 흥미로운 일이 될것이다.
그 제안은 나의 흥미를 이끌어 주었습니다.

예를 들어 일본의 독자를 향해 한때 대만에는 일본어로 이렇게 좋은 소설을 썼던 작가가 있다는것을 소개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나보다 더 적합한 번역자가 있을 것입니다.
또한 단지 로혁약가 무엇을 썼는지 연구하는것이 목적이라면 두버전의『옥란화(玉蘭花/yu4 lan2 hua1)』를 철저하게 엄격하게 비교검증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굳이 말하자면, 난 그 둘다 목표로 하지 않습니다.

사실 제가 로혁약을 비롯해 주금파(周金波),진화선(陳火泉) 등의 대일본제국에 의한 황민화교육을 받은 세대의 대만인들의 책에 접하려고 한것은, 조부모에 대해 더 알고 싶다는 극히 개인적인 욕망으로부터 입니다.

여기에서 조금만, 내 할아버지에 대해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아버지의 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기때문에 나에게「할아버지 (아공)」라고하면, 외할아버지입니다.
살아있엇다면 이제 곧 90살이 됩니다.
내가 어릴때 할아버지는 자주 NHK방송에서 스모와 고시엔(야구)을 보고 있었습니다. 치요노후지(千代の富士)가 활약한 시대, 나에게「요코즈나」란 일본어를 가르쳐 주신 것도 할아버지였습니다.
어린 나는 대만인인 할아버지가 일본에 대해 일본에서 살고 있는 부모님 보다 잘알고 게신것에 대해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할아버지는 그런 것이다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아버지와 어머니보다 훨씬 열심히 내가 학교에서 쓴 작문이나 일기장을 읽어주었습니다. 할아버지에게 작문을 칭찬받는 것은 나에게 매우 자랑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할아버지가 70세에 돌아가셨을때 나는 고등학교 1학년 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多桑』란 영화의 존재를 알았을때 이미 할아버지는 세상에는 없었습니다.
대학생시절 나는 언제나 근처 비디오렌탈집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多桑』도 그 시기에 알았습니다. 「Duo1 san1」라고 발음하는 그 제목은 「아빠」라는 일본어에서 유래합니다. 『多桑』는 아빠라는 뜻입니다.
오년진 (呉年真/Wu2 nian2 zheng4) – 일본사람에게는 『양양 여름의 추억』에서 양양의 아버지를 연기 한 배우라고 하면 아실 분도 많을지도 모릅니다 – 감독의 이 대만 영화는 일제시대에 교육을 받은 대만인,본성인(本省人) 남자의 비애를 그린 것입니다.
 
국립대만문학관의 열람실에서 책상 위에 로혁약의 책을 펼치며 서로의 할아버지에 대해 ZOE 하고 이야기 했을때 나는『多桑』생각이 났습니다.
나와 ZOE할아버지는 매우 엉성해서 말하자면 어느정도『多桑』같은 사람 이었습니다.여기에에있는 저와 동세대의 대만인분들은 비슷한 생각을 품고 있는 분도 계실지도 모릅니다.

그날 저와 ZOE는 각각 할아버지한테서 배운 일본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내 인상에 남아있는 것은 내가 유치원때 “다녀오겠습니다(잇떼키마스)”라고 힘차게 말하면 “여자니까, 다녀 오겠습니다(잇떼마이리마스)라고 말해야하지”라고 할아버지가 나무랐습니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지금의 일본에서는 여성이 “다녀 오겠습니다(잇떼키마스)”라고해도 결코 이상하지 않습니다.
ZOE 또한 「스포츠」라는 일본어를 할아버지한테서「운동」이라고 배운 에피소드 등을 이야기 해주었습니다.
– 그래서 나는 어른이 되어 다시 일본어를 스스로 공부했습니다.
나와 ZOE의할아버지가 기억한 일본어는 어딘가 옛스러움이있고 그도 그럴것이, 그들이 말하는 일본어는 1930년대부터 1940년대라는 시기에 걸쳐 습득한 것인 것입니다.

1945년을 계기로 대만의 언어는 일본어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그 후는 아시다시피 특히 일제시대에 교육을 받은 지식인 남성에게 굉장한 시대가 시작됩니다.
장계석이 이끄는 국민당은 대륙탈환을 목표로 대만섬 전도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몇 년전까지 대만에 있었던 황민화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일본에 노예화된 사람으로 취급합니다.

1950년대에 태어난 부모님은 윗 세대가 대일본제국의 황민으로 일본어를 습득한 바와 같이 중화 민국의 국민으로서 중국어를 습득합니다.

불과 반세기. 세대로치면 삼세대 정도의 시간 속에서 대만의 역사는 이처럼 복잡하게 찢겨 있습니다. 어린이였던 나는 자신의 부모보다 훨씬 유창한 일본어로 말을 걸어준 자신의 할아버지, 아공이 윗 세대로부터도 아래 세대로부터 「일본」과의 관계의 깊이에 따라, 어딘가 경시되었던 세대에 해당한다고는 젼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ZOE하고 대하에서 흥미로웠던 것은 우리 집에서도 그녀의 집에서도 정치를 화제로 하는 이야기는 되도록 하지않았다는 점이었습니다. 예를들어 「일본시대」를 둘러싼 평가가 180도 다른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그것을 화제로 이야기했을때 온화한 분위기로 할수 있을가요?
내 어머니와 동갑인 재일대만인 여성이 이런 식으로 말한 것을 기억합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가 외성인(外省人) 애인을 만들었을때 딸에세 격렬하게 화를 내였다.
(외성란것은 장계석과 함께 1949년 이후 대만에 온 사람들을 의미한다).
그런일도 있고 그녀는 연인과 헤어졌습니다. 이후, 인연이 있어 일본인라 만나 사귀게됩니다. 외성인과의 만남은 그토록 반대했는데, 외국인인 일본인과의 결혼을 그녀의 아버지는 허락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이제 곧 90살이 된다고합니다.
그녀는 지금도 고향에 가있는동안 아버지와 정치이야기는 하지않도록 주의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아버지는 심장병을 앓고 있어 흥분하면 안되는거야. 하구만 정치 이야기가 되면 그에게는 용서 할 수 없는 것이 아직도 많고 반드시 분노하는거야”
도대체 무엇이 그도록 그녀의 아버지를 분노시키게 만드는것일가요.
도대체 누가 그녀의 아버지나, 나와 ZOE의 할아버지들에게 진정되지 않는 침묵을 강요하는가?

그런데 자백하지않으면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이 결과발표회를 위해 주어진 준비기간의 2일, 나는 대만 문학관의 열람실에 긴시간있었습니다. 로혁약와 마주하면서 할아버지 시대의 사람들을 계속 생각 하고있었습니다. 그런긴 날을 꼬박 이틀 끝내고 10월 9일, r:ead #3의 멤버들과 함께 가오슝에 갔습니다.
가오슝경용대학의 양(楊雅玲)교수가 가오슝 마을을 안내해 주셨습니다만, 逍遥園이라는 장소에 도착해서 울창한 나무사이로 거의 폐허가 되여 있는 큰 집을 보았습니다. 그 가옥은 일제시대에 오오타니코오주이(大谷光端)라는 다이쇼천황의 딸과 결혼한 사람이 지은 별장이었습니다. 오오타니을 「와일본황실유관계(和日本皇家有関係)」라고 양교수가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나는「황가 (皇家/huang2jia1)」라는 중국의 울림에 뭔가 불길한 것을 느꼈습니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페허는 그 오오타니가 자신의 별장으로 삼았던 집입니다. 양수은 계속 이야기합니다. 「這裡是眷村的時候……」
“여기가 군인 마을이었던 그당시……”란 뜻의 중국어로,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眷村 (Juan4 cun1)」는 일본인에게는 조금 생소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眷村」는 군인 마을이라는 의미입니다. 모택동이 이끄는 공산당과의 국공내전에서 패한 장계석은 수많은 군인을 이끌고 대만으로 왔습니다. 그렇게 대륙에서 쫓겨 대만에서 지내야 할 수 박에없게 된 군인은 많이 있었습니다. 「眷村=겸손」은 그런 군인들이 모여 살던 마을입니다. 逍遥園의 폐허를 가리키면서 양교수는 말합니다. 한때 이곳에는 100세대 정도의 군인 가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나는 현기증이 나는 듯하였습니다. 일본 황실의 친척인 오오타니가 식민지의 별장으로 유유히 살았던 집에, 대륙에서 쫓겨나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꿈꾸었던 군인들이 백명 이상이 살았다는 사실.
2일간 대만문학관에서 할아버지와 같은 본성인 -1945년 이전부터 대만에 있는 대만인- 의 「비애」에 대해 집착하고, 어딘가 황홀한 기분이었던 나는 逍遥園에서 본 폐허와 거기에 얽힌 역사적경위는 충격이었습니다.
할아버지와 동세대이면서 전혀 다른 이야기를 살았던 대만인들의 기색이 거기에 꿈틀 거리고 있었습니다.
물론 나는 대만의 국적모순의문제, 특히 할아버지 세대의 외성인과 본성인의 대립에 대해 지식으로는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때의 나는 대만의, 한편으론 아무것도 아닌 풍경의 한 부분에, 마주쳐 동요된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또 하나 기억도 되살아납니다.
그것은 r:ead #3에 있어서 반환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10월 6일의 일입니다. 그 날 오후 우리는 임야야씨(林牙牙)를 비롯해 대만스탭 여러분의 안내를 받으면서 龍果 (드래곤과일) 밭이나 어촌 등을 방문해서 너무 재미난 날을 보냈습니다. 나에게 가장 인상에 남은 것은 타이난예술대학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오사키농촌(大崎農村)을 산책하는 동안 발생했습니다. 증조부모가 살았던 집을 방불케하는, 나에는 어딘가 그립게 느껴지는 閩南식 가옥이 이어지는 곳이었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와 산의 초록이 기분 좋은 길이었습니다. 그런 길 옆에 작은 의자를 내고 앉아있는 사람들이있었습니다. 근처에 사는 분들 같았습니다. 대만스탭 누군가가 대만어로 말을 걸었습니다.
“- 할머니, 이분들은 한국, 일본, 중국에서 온 사람들이에요.”
그것을 들은 2명의 노인이 수줍어 하듯이 웃었습니다.
“- 할머니, 일본어를 기억하고 계십니까? 이분들은 일본인입니다.”
대만어로 누군가가 말을 걸고 있는 것이 들립니다. 생각하면 이 순간은 이미 뭔가 불안 기분이었습니다. 나는 대만여행에서 만난 노인이 유창한 일본어로 친절하게 대해주셔서 감동했다고 순진하게 말하는 일본인에 대해 항상 복잡한 생각을 안고 왔습니다. 오사키농촌(大崎農村)에 있는 사람은 옆에서 보면 그런 일본인 밖에 안보이는걸까…… 그 순간에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그러나 그 예상을 반대로 노인들은 일본어를 전혀 모른다는 말을 합니다.
“- 전쟁 중, 우리들은 학교에 갈 수 없었다니까요.”
……생각해보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일제시대 황민화정책이라고 해도 고급교육을 받을 처지에 있었던 사람은 소수의 대만인이였기 때문입니다. 여성이라면 더더욱 그 수는 제한 될 것입니다.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지만 할머니와 동세대의 그녀들이 일본어를 전혀 모른다는 사실에 내가 아는「대만」역시 매우 제한되어 있다고 통감했습니다.
나는 로혁약과 나 자신의 할아버지를 통해서 자신이 생각하려고 하는 것은 역사에 갇혀 있는 그들의 목소리를 떠올려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사람의 목소리를 지워 버리는 것이면 안된다고 자숙하고 있습니다. 즉 본성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어가기 위해, 그들이 일종의 필연성으로 인해 증오해야 했던 외성인을 하나로 묶어 할아버지들의 적으로 단순히 생각하는 것은 절대 하고 싶지않다. 또한 같은 본성인이면서 일본어를 습득할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의 존재도 무시하고 싶지 않습니다.
1945년이후 할아버지의 「일본어」는 역사에 봉쇄되고 방치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침묵당한 할아버지의 고통과 마주할 때 자신의 가족인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와 비슷한 사람들의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는 태도를 취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물며 그것이 역사의 「진실」이라고 소리높여 외치는 것은 절대하고 싶지않습니다.
내가r:ead #3에서 조우한 「대만」은 로혁약 뿐만이 아닙니다.
逍遥園과 오사키농촌(大崎農村)에서의 경험은 할아버지가 살았던 대만에 대해 생각하려고 하는 나에게 「문학적이기는 하지만」 더욱 강하게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나에게「문학」은 수잔 손타그(Susan Sontag)가 강조하는 「상투적인 담론과 단순화와 투쟁하여 복합적이고 애매한 현실을 단단히 다루다」는 태도입니다.
 
이상의 것을 토대로, 일본에서 자란 대만인으로 자신과 일본어의 관계에 대해 다시 질문하자
면, 역시 어린 자신을 일본어로 귀여워해 준 할아버지가 기억이 납니다. 엉뚱한 말일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일본어는 할아버지의 일본어가 「격세유전」한 것 같은 것이 아닌가하고 느낄 수 있습니다.
지금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나를 알면, 할아버지는 어떻게 느낄 것 일까.
그러나 벌써 할아버지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없습니다.
일제시대의 대만인이 일본어로 쓴 소설을 읽고 싶은 것은 거기에서 할아버지를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나의 그런 생각을 직관적으로 알았던 오오카와감독은 중국어로 쓰여진 로혁약의 『옥란화』앞에서 어찌 할 바를 모르는 나에게 제안합니다.
『옥란화』의 두개의 버전이 존재하는 것은 각각의 중국어가 시대와 문맥의 요청에 따라 쓰여져 있는 것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지금 현재 온씨가 거기에서 받아들인 것을 자신의 말로 응답하는 것이 가장 적합한 방법인 것은 아닌가.
그래서 로혁약의 일본어로 『백목련』이 이 체류기간 동안에 발견되지 않았던 것이 오히려 나를 흥분시켰습니다.
그것은 스즈키요시베이가 남긴 수십장의 사진 속에 스즈키 자신이 전혀 찍혀 있지 않았기때문에 스즈키의 존재감이 한층 두드러지고 있는 것과 아주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원작의 일본어가 부재이기때문에 문학연구자로서도 아니고 번역자는로도 아닌, 어디까지나 한 「문학가」로 자신의 말로 로혁약의『백목련』을 재창조한다.
이것은 이 타이난체류를 통해 내 안에서 터져나온 희망과 욕망입니다.
이 욕망을 시간을 들여 최선을다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대만문학관에 하루 종일 지낸 후 나는 하나의 짧은 문장을 썼습니다. 일본어로 쓴 것이지만 그것을 ZOE가 중국어로 번역해주고 그 중국어를 밑받침으로 ZOE와 대만어로 번역했습니다. 그것을 낭독하고 싶습니다. 대만어는 중국어와 함께 제가 일본어를 배우기 이전 어린시절에 항상 들었던 언어입니다. 중국어은 대학생때 제2외국어로 배웠습니다만, 대만어는 배운 적이 없습니다. 대만어로 낭독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들어주세요.


아침 저녁으로 추워졌다. 타이페이에서 도쿄로 돌아가 약 2주가 지났다.
두꺼운 2권 세트의 『로혁약 일기』를 곁에 두고 내가 다시 할아버지를 생각하려 하고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할아버지들의 생각을 하고 싶었다.
오지이짱, 아공, 할아버지, 에에……그 날, 낭독하는 내 뒤의 화면에는 3개의 언어로 구성된 문장이 비추어지고 있었다.
「원문」의 일본어, ZOE에 의한 중국어, 그리고 조순혜씨가 단 하룻밤에 번역해 준 한국어.
일본, 한국, 중국 그리고 대만사람들에 서투른 대만어로 이야기 할 수 있는 순간이 나에게 허락된 것은 지극히 운이 좋은 것이었다. 대만어가 포함된 텍스트를 소리내어 읽을 기회는 지금까지 몇 번인가 있었다. 그러나 짧은 문장이지만 모든 문장을 대만어로 낭독한 것은 첫 경험이었다. 전날 밤, 그 문장을 완성시킨 후 나는 ZOE에게 발음 체크를 이유로 그녀를 돌려보내지 않았다. ZOE는 나의 대만어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성조와 어미의 「n」와 「m」의 구별 등 세심한 부분을 지도해주었다. 그런 연습을 몇 번 반복한 후, ZOE가 말하였다. 온씨, 내 대만어의 발음은 표준적이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걱정하지 말라고 답했다.
“- 좋아. 왜냐하면 나는 「올바른」대만어를 들려주고 싶은 것이 아니다. 자신의 대만어를 낭독하고 싶으니까.”
지금 눈앞에있는 ZOE의 목소리를 통해 들리는 대만어가 자신의 대만어가 되어가는 느낌을 나는 즐기고 있었다. 낭독 후 나의 대만어가 이상하다고 지적하는 사람이 있어도, 그것은 ZOE의 책임이 아니다. 나의 책임이다. 그러한 지적을 받을 각오라면 벌써 서 있다.
그랬기때문에, 안소현씨가
“- 낭독하는 목소리 속에 당신의 생각, 느낌이 압축되어 있는 것을 느꼈다.
고 평했을때는, 가슴이 철렁했다.”
“- 당신은 당신의 안에서의 웅성거림을 그 목소리로 감싼다. 그리고 당신이 말로 포함할 수 없는 것을, 당신의 파트너인 케이코씨는 카메란 눈을 통해 표현한다.”
그것은 나도 느끼고 있었다.
오오카와씨가 촬영한 자신의 모습이 스크린에 비춰지자 『옥란화』라는 두 중국어와 조우했을 때의 흥분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국립대만문학관에서 ZOE와 이야기한 나는, 기억속의 자신 이상으로 들떠있었다. 그 몇분을, 긴 시간을 걸쳐 언어로 반복하면서, 스스로는 비교적 이성적으로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그렇지 않다는 것에 쑥스러웠다. 『옥란화』와 조우한 그 순간이 오오카와씨의 카메라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은, 앞으로『옥란화』를 참고로 자신의『백목련』을 재창조하는 과정에서 나에게 점점 무게가 늘어나는 것이다.
(프레젠테이션때에는 일본어를 모르는 관객도 나와 ZOE의 대화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영어자막을 붙였다. 한정된 시간속에서 우리의 의도를 파악하고 번역작업을 해준 타무라카노코씨 감사합니다!)
그래서 안씨의 말로 인해 우리는 기뻐하고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오신 mixrice의 조지은씨가 우리의 프레젠테이션에 대해 말해 준 것도 잊을 수 가없다.
“- 역사 안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던 목소리. 그것을 섬세하게 따르는 행위는 어려운 동아시아의 상황을 풀어내는 것으로 연결된다. 앞으로도 너희와 함께 그것을 탐구하고 싶다.”
그때 지은씨는 아공(할아버지)에게 말을 거는 당신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의 할아버지 기억이났다고 말해주었다.
……지금 안씨와 지은씨의 말을 그녀들의 목소리가 말한대로 즉, 한국어로 재현 할 수 없는 것이 나를 조금 답답하게 한다. r:ead #3기간 동안 안씨와 지은씨의 목소리를 통해 한국어의 울림을 나는 그리운 친밀감을 안고 있었다. 자신이 전혀 모르는 언어에 그런 생각을 품은 것은 처음이었다 (물론 그것을 말하고 있었던 것이 지은씨와 안씨였기때문에 그렇게 느껴졌다). 특히 지은씨가 「온유쥬(オン・ユジュ)」라고 내 이름의 발음소리를 들을 때마다 자신의 성명이「온유쥬(オン・ユジュ)」라고 쓰이는 세계가, 세상에는 확실히 있다는 것이라고 따뜻하게 알려주는 느낌이 들었다.
온유쥬
온유쥬는 「温又柔」이라는 한자로 갖춰지는 두 울림 중「웽요우로우」와는 전혀 비슷하지 않다. 「온유우쥬우」와 닮았다.
태어난 대만에서 자랐으면「웽요우로우」라고 쓰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온유우쥬우」로 일본에서 자랐다.
일본의 대표로 r:ead #3에 참여했다.
그런 나의 대만 할아버지에게, 편지를 대만어로 한국, 일본, 중국, 그리고 대만 사람들이 이야기를 들어준 것은, 지금 돌이켜봐도 나에게는 작은 사건이 아니었다고 느껴진다. 특히 공죠쥰(龔卓軍)씨가 나의 낭독을 접하면서,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언급했을 때의 희미한 목소리의 떨림을 생각하면, 지금도 나의 마음은 세차게 흔들린다.
도쿄로 돌아온 지금, 일본, 한국, 중국 그리고 대만……동아시아의 현재를 살아가는 친구들의 할아버지에 대해 좀 더 알고싶어졌다. 동아시아에서 사는 우리 할아버지들의 이야기를 서로 나누고,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대화를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나에게 있어서 r:ead #3은 그 시작을 예감하는 여행이었다.
「국가」단위로 언급되는「역사」는 우리에게 다른 이야기를 강요한다.
이전보다도 그 위태로움을 느끼고있다. 우리는 더,「국가」로부터 자유로워져야하는 것이 아닐까? 
자신이 속한 국가의 이야기야말로 역사의「진실」이다.
「국가」를 주어로 이야기되는 역사는 동아시아의 현재를 사는 우리를 찢어내려고 한다. 이러한 상황하에 이웃나라가 유일한「진실」을 놓고 경쟁하는 사태는「국가」단위로 자신을 설명하려고 하면 반드시 차이가 생겨버리는 나 같은 인간은, 매우 불모한 광경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동아시아의 친구와 마주 볼때 우리는 좀 더「개인적」이어도 좋다. 「국가」가 강요하는 이야기에 따르고 있어, 이웃친구의 생생한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는 것은 외롭기 그지 없다. 적어도 나는 그것이 어떤 언어로 말해지고 있든, 자신의 개인적인 목소리에 최대한 귀를 기울이고 싶다. 이렇게 r:ead #3에서 만난 친구들이 내 말에 귀를 기울여 준 것처럼.

November 2, 2014

비기념비적 수법에 따른 기념비 만드는 방법

본 사업 타이틀 r:ead(=residency, east, asia, dialogue)에서도 명확하게 알 수 있듯이, 이 프로그램은 동아시아라고 묶이는 한국、중국、대만、일본을 출자로 한 멤버의 「대화」와 「사고」를 위한 자리였다. 이 전제조건인 프레임을 얼마나 포지티브하게 받아들여, 거기에다 탈구축 할 수 있게 확장할 수 있는가에 대해, 일본팀으로 초청받은 시타미치 모토유키와 나는 강하게 의식하며 작업을 하였다. 다시말해, 최종적인 아웃 풋으로서의 큰 글자의 작품을 이 레지던스에서 만들어 내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고, 그 몇 발자국 앞에 있는 하나의 방향으로 사정을 정하기까지의 프로세스를 어떻게 연결 할 것인가를 의식하고, 사람들과 대화의 장에서 적극적으로 즐기며, 불완전하고 단편적인 것을 억지로 눈에 띄이게 하는 것에 주목하였다. 모뉴멘털(=상징적)인 「작품」이라는 형태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논의와 사고의 과정을 투명화하여 공개해 나가는 것을 바람직스럽게 여기는 것은 굉장히 드문 현장이다. 그것으로 인해, 직접「동아시아」라는 것이 주제가 안되더라도, 이러한 장소 그 자체가 r:ead라는 프로그램을 지지하는 골격이 되고 있다고 말 할 수 있다.
단지, 일주일간의 참가였었기에 결과적으로는 프레젠테이션이라는 아웃 풋을 향해 집중해야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반드시 충분한 시간이었다고는 말 할 수 없으나, 대화와 사고를 위한 장소를 준비해주었기에, 거기에 응하는 방법으로서 새로운 방향으로의 키를 정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는 몇가지의 반모뉴멘털(=비기념비적) 적인 단편을 발견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들은 최종적으로 『「부재」의 형태─모뉴멘트 재고(再考)』라는 타이틀로, 얼터너티브적인 모뉴멘트(=기념비적 존재)라고 정의 할 수 있는 물건들을 수집한 아이디어 스크랩북을 제작하였다. 누구라도 한 눈에 인식 할 수 있는 모든 모뉴멘트에서는 벗어나지만, 다른 지점에서 그 존재를 바라보면 상징성이나 기념비적 성격을 볼 수 있는 것이나, 혹은 어떤 대상자에게 있어서는 기억을 건드릴 수 있는 것 등, 한번 보면 명확한 윤곽선을 가지고 있지 않은 측면에서는 기념비성을 가진 존재를 광의로 「모뉴멘트」로 받아들이고, 조금 벗어난 관점을 제시한 것이다.

여기에서, 「모뉴멘트」나 「모뉴멘털」이라는 말에 대해서 조금 설명하고 싶다.
모뉴멘트는,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인 사건이나 인물을 공공적, 영구적으로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작물 혹은 건조물. 또한 문화재 관계의 용어로서는 유적지에 대해, 지상에 세워진 모든 건조물, 기념물을 포함한 모뉴멘트이다.」
(브리타니카국제백과사전)이라고 한다. 조금 더 간략하게 말하자면「기념건조물. 기념비・기념상 등. 유적, 불공의 업적, 금자탑」(일본국어사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원천적인 의미를 조금 확대 해석해서, 기념비성이나 상징성을 만들어내는 우리들 인간의 행위에 착목하여, 형태를 가지지 않는 「행위」등을 기억으로 새긴 기념비(=모뉴멘트)로서 정의하려고 하는 시도이다. 강고한 물질으로서의 모뉴멘트가 아니라, 부드러운 행위나 기억을 남기는 조그마한, 근처에 있을 법한 당연한 존재. 바꾸어 말하자면, 어떤 특정한 관점을 부여함으로서 기념비성을 획득하는 반모뉴멘털(=비기념비적)인 모뉴멘트의 탐구를 시도한 것이다. 작품이란 것은 원래 기념비적(혹은 상징적)인 존재이지만, 그 기념비까지 이어지는 프로세스에 따라 자각적으로 된다는 것이다.

이번 우리들이 탐구한 것은 비기념비적(=반모뉴멘털)인 기념비(=모뉴멘트)
라는 언뜻 보면 모순된 것이다. 작품을 제작발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라는 기념비로까지 이어지는 과정을 현재화(現在化)하는 것, 그리고 불특정다수의, 말하자면 「모두」를 향한 것이 아니라, 조금 더 특정한, 명확한 대상에게 울려퍼지는 모뉴멘트의 형태를 탐구하는 것이다. 그러한 모뉴멘트를「상온의」「부드러운」「형태가 없는」이라고 하는 대강의 모뉴멘트와는 떨어진 이미지를 부여하는 말로 변용하는 것으로, 형태가 아니라 상태나 행위에 중점을 두어, 별도의 각도에서 기념비성이나 상징성을 고찰하였다. 강고한 물질성이나 절대적인 존재감이라는 모뉴멘트의 기존의 이미지를 표상으로하는 특징과는 장반대인 「부재」가 가지는 상징성을 탐구한다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절대적인 형태나 존재가 아닌, 생성변화하는 「부재의 재(在)」 혹은 「부재의 형태」를 추구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시타미치가 지금까지 만들어 온 작품군을 돌이켜보고자 한다. 제2차세계대전까지 일본 안에서 만들어진 전쟁을 위한 건조물인 토치카나 엄폐호, 포대터 등 수년간 후의 현재의 모습을 풍경으로 찍은 사진시리즈《전쟁의 형태》(fig.1), 그리고 현재 일본의 국경선 밖에 남겨진 토리이의 모습을 찍은 《torii》(fig.2)의 시리즈 등이 있다. 예를들어, 《전쟁의 형태》에 등장하는 기능을 박탈당한 전쟁유구가 매몰되어 있는 현재의 풍경은, 시간의 경과와 함께 전쟁을 경험 한 세대가 떠나, 많은 사람의 의식에서 지워지려고 하는 전쟁의 기억을 불러들이고, 《torii》는 토리이가 있었던 장소에는 이전 일본인의 생활이 있었던 것을 말한다. 어느 쪽도 본래의 의미나 형태의 일부가 소실 됨으로 인해, 그 당시의 것을 상기시키는 소프트적인 기념비(=모뉴멘트)로서 기능하는 것을 찍은 풍경이다. 또한 시타미치로 인해 잊혀져간 존재를 사진이란 단면을 통해 모뉴멘트화 되는 행위이기도 하다. 어떤 목적을 위해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세월이 흐름과 동시에 그 기능을 소실하고, 존재 이유를 보류해 둔 형태로 풍경 안에 남겨졌다. 이것들은 보존이라는 명목에 의해 울타리로 둘러쳐지면, 전형적인 모뉴멘트로 변모한다. 시타미치는 그러한 획일적인 사고정지에 빠지게 하는 모뉴멘트화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고, 반대로 그대로의 현재의 풍경을 부감적으로 취해, 사진으로서 수집하는 행위로 인해, 소프트한 모뉴멘트화를 계획했다.

fig.1《戦争のかたち》
fig1_戦争のかたち
Courtesy of Motoyuki Shitamichi

fig.2《torii》
fig2_torii_NewTaichungTaiwan
Courtesy of Motoyuki Shitamichi

또한, 포대터에서 불꽃을 쏘거나, 토치카를 일시적으로 불법거주하는 방법으로 전쟁유구의 재이용계획을 만들어 낸《Re-Fort Project》(fig.3)는, 누구도 그 존재에 눈길을 두지 않는 조용히 배회하는 유구에, 유희적인 방법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 이전에 있었던 전쟁에 대한 기억을 두루 생각하게 하는 장소로 만들어낸다. 어떤 행위를 함에 있어서 유구의 기능을 일시적으로 선명하게 변환시키고, 동시에 그 유구군을 사람에게 메시지나 역사를 전하는 모뉴멘트로 소프트하게 변환시킨다.
또 한편으로, 지진으로 생긴 재해 후, 바이크를 타고 일본 전국을 일주하는 여행에서 찍은 논두렁길에 있는 한 장의 나무판이나, 단차를 해소하기 위해 쌓아 올린 콘크리트 블록 등, 어디에도 존재하는 주변의 최소한의 요소에 의해,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여기저기를 연결시키는 극소한 것이 「다리」라고 규정하고, 그것을 스냅으로 수집한《bridge》(fig.4) 시리즈가 있다. 이것들은 많은 사람이 그냥 지나쳐 버리는 당연한 것으로, 동시에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기에, 다음날이면 없어져 버릴 수 있는 덧없는, 이거야 말로 이른바 모뉴멘트와는 정반대적인 존재이다. 어떤 시대, 어떤 장소에도 존재하는 어떤 종류의 보편성을 가지고 있는 덧없음이나, 그것들을 생성한 누군가가 가지는 무의식의 창조성이나 미의식을 가지고 정착시키는 것으로, 역시 소프트한 방법으로 모뉴멘트화 시켰다.

fig.3《Re-Fort Project》
fig3_1refort4

fig3-2_Re-Fort5
Courtesy of Motoyuki Shitamichi

fig.4《bridge》
fig4_bridge1103161751
Courtesy of Motoyuki Shitamichi

이 외에도 설국의 길 이 안보이는 장소를 사람들이 걸어가면서 남긴 발자국으로 인해 새로이 만들어진 길을 찍은 《crossover》등도, 눈에 찍힌 발자국이라는 수시간 후에 없어지고 마는 「형태」를 정착시키는 행위로, 이것도 시타미치 다운 모뉴멘트화라고 말 할 수 있다. 다시말해, 시타미치는 본질적인 반모뉴멘털(=비기념비적인)적인 존재로 망각되어 진 것이나, 형태가 지워져가고 마는 부재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처럼, 소프트한 모뉴멘트를 작품화에 따라 계속해서 생성해 내고 있는 것이다.
이 연장 선상에서, 「부재」그 자체의 본연의 자세를 탐구하는, 보다 의식적인 반모뉴멘털적인 모뉴멘트를 생성하는 과정을 r:ead라는 대화의 테이블에 가지고 옴으로 인해, 공유나 단절을 통해, 새로운 방법론을 획득하는 것을 시도한 것이, 본 프로젝트의 프레임에 대한 하나의 해답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최종 프레젠테이션에 게스트로서 참가한 미디어 비평가인 카츠라 에시시(桂英史)
씨는 「모뉴멘트는 반드시 장소 특수성(Site-specific)이다」라고 간략하게 말했다. 원래 시타미치와 내가 지금까지 관계해 온 것은, 각자 직업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장소 특수성/모뉴멘트와는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것으로, 카츠라씨의 발언은 사후적으로 우리들의 활동에 한가지 보조선을 부여해 주었다.

다음으로 본인의 지금까지의 활동에 대해 조금 언급하고자 한다. 나의 거점은 아티스트.인.레지던스를 주 사업으로 하고 있는 작은 기관으로, 그 성질(性質)적으로도 많은 사람보다는, 필요성을 느끼는 사람을 향한 것을 탐구해 왔다. 레지던스에서는 최종적인 전람회나 완성된 작품을 기념비(모뉴멘트)로서 생성하기 보다는, 거기까지 이르는 과정을 얼마나 경험하는 가를 중시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 경로의 보다 좋은 설계를 계속해서 생각해 왔다. 커다란 규모로 하나의 명해한 것을 생성해 내는 것 뿐인 것에는 왠지모르게 위화감이나 회의를 가지고 있었던 것 뿐 만 아니라, 제한 된 조건 안에서 별도의 길이나 방법을 만들어내는 것, 다시말해, 제약 안에서「얼터너티브」한 길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계속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필연적으로 소위 기념비적인 것인 아닌 방법으로, 형태를 부여하는 것을 실천해 오고 있다.
또한, 지금까지 약 10년가까이 야마쿠치나 아오모리라는 작은 지방도시를 거점으로 활동해 왔지만, 왜 그런 선택을 해 왔는가에 대해 이번 r:ead를 통해 자신 안에서 조금 클리어 되는 부분이 있어, 여기에서 그것에 관해 조금 이야기 하고자 한다. 원래,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계기는 건축을 전공한 대학원시절에 바르셀로나에서 1년간 생활 한 것에 있다. 거기에서 가장 인상에 남았던 것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가치관이었다. 역사있는 도시이지만, 현재의 지정학상은 유럽 주변의 토지라고 밖에 말 할 수 없는 도시에서 「주변」이기에 가질 수 있는 평온한 모습과 다양성을 알게 되었다. 신자유주의적 사고와는 확실하게 거리를 두고, 경제활동이나 편리성이 아닌, 그 장소다운 생활을 영위해 가는 것에 대한 사람들의 강한 의식이 굉장히 신선했다. 시간에 대한 감각도, 어딘가 주관적이며 시계의 시간에 얽매이지 않는 감각이 매우 흥미로웠다. 확실하게 다른 가치관이었다. 이 경험을 계기로, 일본에 있어서 전후의 자본주의경제를 기초로 하는 체계 안에서는, 주변과 서열을 정하게 되는 지방도시의 존재나 가능성을 의식하게 되었다. 그 결과, 본주(本州)의 양극 토지에서 10년간 자신의 신체와 생활의 거점을 두고, 예술을 기점으로 지방이라는 문제와 가능성을 탐구하게 되었다. 그것은, 큰 이야기가 아니라, 작은 수맥을 발견하고 연결하려고 하는 시도였다. 그리고 약하지만, 여러가지것에 대해 다양성과 복잡성이라는 가치로 판단하고 싶다고 생각해왔다.

이 배경에는 「비판적 지역주의(=Critical regionalism)」 라는 생각의 영향이 있다. 이 표현은 1980년대 건축이론가인 알렉산더 초니스와 리안느 루페부루가 처음으로 표제하고, 그들과는 조금 다른 용법으로 건축사가(史家)인 케네스 프램톤이 사용한 건축론을 전개한 것으로 널리 퍼져, 근년에는 가야트리 스피박과 구디스 버틀러가 문화연구나 정치이론에도 채용하고 있다. 프램톤은 현대문명을 긍정하고 모더니즘 건축이 가지는 보편적・진보적 특질을 비판적인 시점을 가진 상태에서 받아들이고, 동시에 그 건축의 지리적 문맥에 가치를 두어야 한다고 했다. 건축에 있어서의 무특정 장소나 장소의 아이덴티티의 결여를, 시각만이 아니라 촉각이나 청각등 신체감각에 종합적으로 호소하는 것으로 지역적 특색을 부여, 저항의 건축으로서 독자적 존재가 성립한다고 제창한다. 물론 현재의 사회에 프램톤의 이 사고는 단순하게 적용하는 것은 너무나도 안이 할 수 있지만, 글로버리제이션의 진행과 다양한 격차 문제가 분출하고 있는 현재에 있어서, 그러한 커다란 흐름에 부주의하게 휩쓸리지 않기 위한 「저항」의 수단으로서 개별로 이 사고법을 적용하는 것은 유효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신화적인 하나의 큰 이야기를 그리는 것으로 가치를 끄집어 낼 수 없게 된 현상에 있어서, 먼저 자신의 발 밑부터 수정하여, 각각의 토지가 가지고 있는 작은 가능성을 끄집어 내어, 정보 환경의 발전과 함께 어떤 장소나 사람과도 비교적 용이하게 다이렉트로 연결되는 것을 인식하는 것으로, 적절한 장소로의 그 가능성을 접속해가는 것이 될 것이다. 다시말해, 별도의 장소, 별도의 가능성으로의 접속법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단순하게 현상을 한탄하며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저항의 수단으로서 얼터너티브를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것을 큰 기념비적인 구제와 같은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작아도 여러가지 방향성을 가진 자발적인 내발(内発)적인 활동으로서 탐구해가고 싶다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작년 큐레이터로 관계한 토와다오이라세(十和田奥入瀬)예술제 를 조금 소개하고 싶다. 이 예술제는, 예술제라고 부르기에는 아주 작은 규모와 예산으로, 인구 6만명 정도의 작은 지방 소도시인 토와다시에서 개최한 것이다. 장소는 크게 두군데로 나뉘어, 한군데가 토와다시 중심가에 위치한 토와다시 현대미술관, 그리고 또 한군데는 중심가에서 차로 30분정도의 거리에 있는 토와다시 주변의 오이라세・토와다호(湖) 지역이다. 토와다시 중심가에서는 현대미술관이 오픈해 방문자 수가 매년 증가하고 있지만, 한편, 80년대 관광지로서 번영했던 오이라세나 토와다호 주변은 관광산업이 크게 쇠퇴하여, 취업인구도 줄어들고 있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토와다시 내에서도 중심과 주변은 큰 격차를 보이고 있는 현상이다. 예술제에서는 쇠퇴하고만 시 주변부에 활기를 불어넣으려는 의도도 있어, 미술관 뿐 만아니라, 오이라세 지역 일체를 개최장소로 했다. 오이라세나 토와다호에는 아주 아름다운 풍경이 있고, 그것은 관광산업이 얼마나 쇠퇴하던지 상관없는 재산이다. 그리고 이 자연도 실은 인간이 관계하는 것으로 유지되고 있는 풍경이며, 자연이란 어떠한 상태를 말하는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끔 한다. 단, 어떤 자원을 가지고 있던, 결국 그것을 누구를 향해 어떻게 어필 할 것인가가 어느정도 해결되지 않으면, 그 가치는 전달되지 않는다. 버블 붕괴 후에, 기업의 위안여행이나 여행대리점이 만든 단체패키지여행의 유행이 사라지자, 현재와 같은 보다 적은 단위(개인이나 가족, 친구)로 여행이 주류가 된 상황에 대해서도, 결국 단체여행에 대응했던 관광지의 모습 밖에 제시하지 못했던 이 지역이 쇠퇴한 것은 필연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존재하지 못하게 된 대상을 향해서 발신해도, 그것은 전달되지 않는다.
그러한 배경을 고려하며 수단도 없이 넓은 이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보인 것은 몇가지의 모뉴멘트였다. 토와다호반에 세워진 타카무라 코우타로우(高村光太郎)에 의한 《처녀의 상(像)》, 오이라세지역에 다수 존재하는 오오마치 케이게츠(大町桂
月)에 의한 시비(句碑)등의 기념비군, 혹은 토와다신사 등의 건조물이나, 《궁중의 폭포》와 같은 이름을 부여받은 오이라세 계류를 따라서 폭포나 강, 바위 등의 명소가 그것이다. 이것들이 토와다오이라세의 겉쪽의 아름다운 역사를 나타내는 정(正)의 모뉴멘트라고 한다면, 그 뒷면에는 폐업한 무수의 여관이나 호텔군 등의 부(負)의 모뉴멘트가 존재한다. 통상의 관광여행에서는 정의 모뉴멘트 만이 사람 눈에 담기고, 부의 모뉴멘트는 덮어 숨긴다. 그러나, 이 부의 모뉴멘트야 말로, 지방도시가 더듬어 온 역사나, 왜 현재의 상황에 빠지고 말았는가를 나타내는 여러가지 힌트가 숨어 있음에 틀림없다. 그라운드 제로나 아우슈비츠, 혹은 체르노빌 등 재해 피해 적지(跡地)나 전쟁 적지 등을 돌아보는, 인류의 죽음이나 슬픔을 대상으로 한 투어를「다크 투어리즘」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역사적인 비극이나 부의 역사를 경험하는 것으로 인해, 이해되는 것은 다수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에는 아즈마 히로키(東浩紀) 등에 의해 후쿠시마 제일 원자력발전소 관광지화 계획 등에 대한 비판도 있지만, 다크 투어리즘에 의한 후쿠시마라는 부의 유산으로서 라벨이 붙는 장소를 부흥시켜 가는 하나의 가능성과 비평성을 갖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예술제에 참가한 PortB를 주군하고 있는 타카야마 아키라(高山明)는 Port관광리서치센터라는 단체를 실제로 일반사단법인으로 설립하고, 그 리서치활동의 일환으로서 토와다오이라세에서 관광에 얽힌 언론 이벤트를 개최, 다음 날에는 그 다큐멘트 영상을 이벤트를 실시하고 있는 같은 장소, 같은시간에 전시작품으로 상영했다.
오이라세 지역과 같이 단체여행의 감소와 함께 쇠퇴하게 된 관광지는 일본전국에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러한 토지에 아트작품이라는 새로운 모뉴멘트를 다수 설치해서, 그것을 순례하는 여행의 형태는 에치고츠마리(越後妻有)나 세토우치(瀬戸内)등에서 이미 시도하여 많은 관광객을 획득해, 예술로 인한 지역이나 관광의 재흥(再興)이라는 일종의 성공모델로서 이야기 되고 있다. 그러나 토와다오이라세에 있어서는, 거기에 있는 역사나 부(負)의 경험을 새로운 모뉴멘트로 뒤엎는, 위에서 언급한 방법이 아니라, 현상을 긍정하는 것 부터 시작하고 싶었다. 이미 있는 부의 모뉴멘트를 어떠한 형태로 재생하고, 정(正)의 모뉴멘트와 함께 공개하는 것으로, 그 토지의 보기 좋은 표면만이 아니라 뒷면에 있는 현재의 곤란도 포함해서 보여주려는 방법을 모색해, 이른바 순례 기념비로서의 아트작품의 설치를 배제한 것이, 토와다오이라세예술제이었다. 물론 그 이념과는 정반대로, 실현되지 못했던 것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 토지나 건물 등의 역사에서 눈을 돌리는 일 없이, 그것들이 발하는 조그마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으로, 보여지는 지역의 미래라는 것도 있지 않는가라고 생각하고 있다.
사운드 아티스트 우메다 테츠야(梅田哲也), 퍼포먼스유니트 콘탁트곤조(コンタクトゴンゾ), 그리고 사진가 시가리에코(志賀理江子), 3명의 아티스트가 6개월 동안 협동하여 만들어 낸, 수년 전에 휴업한 호텔 건물 자체를 작품화 한《수산보양소》
(fig.5)는, 이러한 예술제의 태도를 상징하는 반모뉴멘털(비기념비적)인 모뉴멘트였다. 이 작품은 반폐허가 된 호텔을 아티스트가 철저하게 청소하고, 불필요한 것을 없애는 것을 기본으로 하였다. 「뺄셈의 방법으로 만들다」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작품스러운거나 오브젝트와 같은 것을 첨가하는 것을 피하고, 물의 흐름을 바꾸거나, 빛을 유도하는 정도의 방법으로 기능을 잃은 건축을 조금씩 주변 환경에 가깝게 하는 작업을 실시했다. 극단적으로 요소를 빼앗겨버린 호텔 내부를 돌아보면, 조용히 떨어지는 물소리가 들리고, 날씨가 좋은 날은 여러가지의 빛이 들어오고, 불온한 공기를 느끼기도 하지만, 상쾌한 바람을 맞이하기도 한다. 인공과 자연의 중간에 있는 듯한 불가사이한 상태에서, 폐허나 유적처럼 느끼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버블기 호텔의 모습도 울타리의 틈으로 보이는, 불가사이한 장소의 경험이다. 무대의 클라이막스와 같이 상징적이며, 누구라도 부풀어오르는 상황은 떨어지지 않고, 조금씩 사소한 변화만이 연속된다. 거대한 스펙타클을 철저하게 배제한 공간은, 어떤 종류의 패럴렐 월즈를 경험하는 감각과도 가깝다. 일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거기에는 신경을 예민하게 하면 보이는, 들리는, 냄새나는, 사소하면서 풍부한 경험이 있다. 스펙타클한 모뉴멘트가 아니라, 비스펙타클하며 사소한 경험을 생성한다. 명확하며 거대한 형태는 아니지만, 눈을 돌리려는, 귀를 기울이려는 사람에게는 풍부하게 울리고, 그 경험을 기억에 새기는 얼터너티브하며 반모뉴멘털적인 모뉴멘트이다. 특가품이 되는 옥외조각과 같은 이른바 기념비적인 모뉴멘트를 설치하는 것이 아니라, 오이라세라는 지역에 흐르는 시간이나 펼쳐진 공간을 반모뉴멘털적인 작품군을 통해서 경험하는 것이, 지방도시에서의 이 예술제의 시도이었다.

fig.5 수산보양소》

Courtesy of the artists, Taketoshi Watanabe and Towada Art Center

이러한 경험 위에, 나와는 다른 각도에서 「모뉴멘트」의 모습을 창작활동을 통해 탐구해 온 시타미치 모토유키와 같이, 대화와 사고를 위한 r:ead라는 장소에서, 기념비적인 작품만들기가 아닌, 현상을 철저하게 공유하는 것으로 새로운 전개의 가능성을 모색했다. 서로가 35세라는 연령에 달해, 지금까지의 약10년을 돌이켜보면서, 앞으로 향해 가기 위한 충분한 자극을 주는 이웃 사람들과의 시간은 정말로 귀중했다. 시타미치의 말을 빌리면 「미래에 개봉되어야 하는」 새로운 모뉴멘트의 모습을 탐구해 왔다. 무언가 커다란 결과를 이 자리에서 만들어내기 보다는, 그 사고 과정을 일단 쏟아내는 것에 집중했다. 아직 확신을 가지지 못한 부화 한지 얼마 안된 여린 아이디어를, 감히 프로페셔널한 이웃사람들에게 좌우간 주저하지 않고 개시하는 것으로, 헤매거나 위화감, 이상함 마저도 공유하면서, 새로운 길을 계속해서 찾았다. 작품이나 전람회와 같이 고결하게 결정화된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지 않은 「확실하지 않은」것이나 모뉴멘트적인 상태에 다다르지 않은 것을 개시하는 것에 대해 논의하는 것을 요구받는 것은 굉장히 자극적인 경험이었다. 안이하게 이해될 수 있다고 생각되어지는 결과 만이 요구되어지는 현재 사회에 있어서, 그렇지 않은 시행착오나 불가능한 것, 실패까지도 긍정적일 수 있는 작은 저항의 장소를 더욱 공(公)이 만들어야만 한다. 분쟁 등은 서로가 향하고 있는 것이 조금 다른 것이나, 사소한 사항의 불이해가 계기가 되어 일어난다. r:ead와 같은 자리에서 큰 총의나 신화적 감동을 생성하는 것이 아니기에, 언뜻 봐서 불모라고 생각 할 수 도 있지만, 이러한 작은 저항의 현장이야 말로, 각 문제에 대한 다른 해결법을 제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있을 수 있다. 아티스트・인・레지던스라는 것은 원래 그러한 창작 프로세스에 의식적으로 되기 위한 반모뉴멘털적인 장소이다. 그 프로세스에 최대한의 가치를 두는 이러한 자리가, 제일 순화된 얼터너티브적인 아티스트・인・레지던스의 방법으로서 여러군데에서 각각의 방법으로 구축하여 발전해 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얽힌 실을 조금 풀어보려고 한다

r:ead는 기본적으로 전시회장이 아니기에, 완성된 작품을 타인에게 보여 줄 필요도 없다. 이것은 작가에게 있어서 「체제기간 중, 억지로 작품을 만들어 보여 줄」필요가 없이, 각자가 실험하는 것에 있어서는 굉장히 흥미로운 기획이었다.(반대로, 억지로 제작하는 과정에 있어서 생겨나는 것도 있지만)
통상 레지던스 체재제작의 경우, 어떤 테마가 정해져 있고 수년 혹은 수개월 에 걸쳐, 그 장소에서 리서치나 필드워크를 통해 토지나 장소의 특성을 이해하면서, 그곳에서 전시하는 경우가 많다. 단기간에 작품의 완성을 요구하면서, 언제나 자신이 해오던 수법과 연결지어 제작하는 경우를 말한다. 이 기획의 경우, 공유할 수 있는 테마를 발견하기 위해 투어가 이루어지거나, 자신들이 여행을 기획 할 수도 있다. 단, 4주간이라는 짧은 시간이다. 대화를 하는 곳은 교실 같은 곳. 공유하는 많은 시간은 여기에서 보내도록 설정되어 있다. 좋든 싫든, 교실안에 있을때에는, 여기가 일본의 동경이라고 의식하는 경우가 별로 없다. 대화는 교실안에서 책상을 원형으로 셋팅하고, 한, 중, 일, 대만의 작은서미트와 같은 분위기.
처음에는 나 자신도, 눈앞에 있는 그들도, 각국의 대표자로서 모여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천천히 한사람 한사람 마음 속에 각자가 복잡하게 뒤얽힌 세계를, 다른 방법으로 배우거나 느끼고 자라 온 동시대의 개인 개인이 그곳에 있는 것 뿐이다, 라고 느껴지게 된다. 한, 중, 일, 대만은 4면이 아니라, 언제나 다면체(多面体).
마지막날 다 같이 식사를 하러간 이케부쿠로의 중화「연변」요리는, 북한의 국경 근처에 있는 중국북동부의 조선족이 많이 살고 있는 지역. 중화요리집 이지만, 매운 양고기에 “가벼운 안주”로 김치나 땅콩이 나오는, 중국, 한국 어디든지 혹은 그렇지 않은 부분을 가지고 있다. 맛도 그렇지만, 사람도 다면(多面)적으로 깊이가 있는 그러데이션 안에 있다.

이 기획의 특별한 포인트로서는, 한, 중, 일, 대만 사람이 모여 있지만, 각 집단에서 조금 떨어진 장소에서, 한사람 한사람의 작가가 마주보고 이야기하고 생각하는 장소, 일 수 도 있다.
예를들자면,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들이 국경을 넘어서 성장이나 일,가족에 대해 이야기하고, 각자의 생활이나 놓여있는 상황의 다른 점에 대해 느끼면서 한때 시간을 공유하고 헤어지는, 그런 경험. 얼마 전, 우연히 비행기 안에서 영화「로스트인트렌스레이션」을 보고 생각난게 있다. 어떤 만남이, 각각의 생활권이 아닌, 서로에게 있어서「어디도 아닌 장소」에서 일어나는 해프닝성(性). 이 r:ead는, 그런 장소일 수 도 있다. 그리고 그런 장소이기에 입장을 넘어서서 만나고, 한사람의 인간으로서 각자의 차이점을 받아들이면서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이번에 나는 작가들과 될 수 있는 한 같이 먹고, 술을 마시며 여러가지 이야기를 했다. 물론 그것은 의무감이 아니고 그냥 좋아서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갑작이 자신의 제작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요구하지 않는 이러한 기회이기에, 만남에서 무언가가 생성하는 타이밍을 기다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특히, 슌순(孫遜/중국인작가)과는 밤마다 미팅이라는 빌미로 빈번히 술을 마셨다. 마치 자취하는 대학생처럼 서로 웃으며 아주 재밌는 시간이었다.
마지막날 우리들의 프레젠테이션이 끝난 후, 슌순은 그 감상으로서 오래된 중국의 시를 우리들에게 읽어주었다. 그것은 진자앙《등유주태가(登幽州台歌)》라는 것으로, 「하늘과 땅을 눈앞에 두고,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있는 존재나 시간의 작음을 느낀다」라는 슬픈 시. 중국 당나라때 만들어진 시로, 이번 r:ead에서의 한달간의 교류를 생각하게 한 멋진 시였다. 최종 공개프레젠테이션 장소에서 일어난 갑작스러운 시낭독으로, 그 장소가 조금 떠들석 해졌다. 다음 날, 나는 그가 읽어준 시에 대한 답으로 동물사진가인 호시노미치오(星野道夫)씨의 엣세이「또 다른 시간」을, 교실에서 모두 앞에서 읽어주었다.「대자연을 앞에 두고 감동받았을때 사람이 남기는 것은, 자신이 바뀌는 것이다」라는 문장. 낭독은 첫 경험.

이번에 같이 페어를 한 큐레이터 핫토리(服部)씨는, 아티스트인레지던스에서 10년정도 일을하고 더욱이 스스로가 작은 공간도 운영하며, 작가와 공동작업이나 체제제작의 노하우와 의문을 하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이번 r:ead에 추천을 한것은 적임이었다. 그와는 둘이서 몇군데의 장소를 방문하며, 자신들의 과거뿐만 아니라, 각자의 미래에 대해서도 이야기 할 수 있었다.
나는, 작년말에 6년에 걸쳐서 해오던 시리즈가 막 끝난 상태로, 자신이 제작해 오던 소재나 수법, 테마에 대해 의심을 품으며,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다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여기에서 내가 얻은 것은, 우연히 누군가와의 대화 안에서나, 지금부터 시작하는 몇개의 프로젝트 기획회의, 여기저기에서 시작되고 있지만, 얻은 것을 눈에 보이는 형태로 만들고, 의심없는 말로 발신하기 위해서 조금 더 시간이 걸리것 같다.
이 기획에 의해, 가장 성과가 나타나는 장소는 아마도 참가자 각자의 내면의 변화이지 싶다. 그것을 외부의 사람이 볼 수 있는 장소/때는 조금 미래의 것일 수 도 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참가자라는 것은 작가 그리고 큐레이터 뿐만아니라, 통역가, 스탭, 디렉터, 이 기획(대화)의 모든 장소에 있던 사람들이다.

어떤 기획이라도 기획자나 지원자(국가나 지역, 기업)등의 제한 혹은 컨트롤은 발생하고, 그것을 인지하고 참가하지 않으면 스스로가 그 일부로 휩쓸리고 만다. r:ead는 “제작환경”으로서의 레지던스임에 틀림없다. 단, 모든 말은 우선 일본어로 통역되는 시스템이나, 이 “동아시아”라는 말처럼 대동아내제국주의적(서구중심으로의 반사로서의 제국주의)인가 라거, 처음부터 스스로가 몇번이나 의문을 품은 것은 사실이다. 단, 이r:ead는 어디에도 없는 떠다니는 배와 같은 장소로, 존재하는 가능성을 많이 가지고 있다. 조타수를 참가자 전원의 대화에서 정하는 것도 재밌다. 아직 시작한지 얼마안되기는 하지만.
이러한 기획이 계속 진행되는 것, 더욱 발전된 형태로 변화해 가는 것, 예를들어 이러한 기획이 이웃나라에서 같이 개최되어 일본인이 참가하는 것, 그러한 것이 계속 축적되어 가는 것으로, 이웃나라 사람들과의 관계성이 부정이나 배제가 아니라 존중을 베이스로 한 관계가 축적되어 갈 수 있을 것이다. 이 교류의 형태를 발전시키기 위한 하나의 과정으로서 내가 여기에 참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라고도 느낀다.

오늘에는 복잡한 국가 간의 상황이 있다. 정부나 미디어에 의해 국민의 감정은 오셀로처럼 하얀과 검정으로 바뀐다. 얽힌 실을 의도적으로 다시 뒤얽히게 만드는 자들도 있다. 단, r:ead와 같은 기회로 인해 생성된 개개인의 안에서의 밸런스감각은 이후에도 자극해가면서 어떠한 폭풍이 부는 시대가 와도, 조금씩 모국에 뿌리를 두고 행하는 것이 아닌가.
나 개인으로서는 손때가 묻은 스스로의 수법에 대한 의문의 시작, 그리고 이웃나라의 작가들과의 교류, 그것은 뒤얽힌 실을 조금 풀어보는 시간이었다.
가까운 시일내에 재회하길 바란다.

01
滞在時東京に降った記録的大雪を固めた雪碑(冷凍庫に保存中)

02
服部さんと制作した冊子[不在のかたちーモニュメント再考ー]

03
服部さんと制作した冊子[不在のかたちーモニュメント再考ー]

04
服部さんと制作した冊子[不在のかたちーモニュメント再考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