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glish) r:ead ボランティア大募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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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在r:eadでは2月17日(月)より滞在を開始するアーティストのサポートやディスカッションの通訳など、さまざまなかたちでプログラムをサポートしてくださるボランティアを募集しています。

・東アジアのさまざまな事柄に興味がある
・日本・中国・韓国・台湾のアーティストやキュレーターと対話し、思考を深めたい
・今活躍する若手アーティストやキュレーターが何を考えているのか知りたい、制作過程を間近で見たい

など、r:eadの活動に共感していただける方なら年齢・国籍・経験は不問です。
中国語、韓国語が堪能な方は大歓迎!!
みなさまのご応募お待ちしております。

期間:2014年2月17日(月)-3月14日(金)
活動内容:アーティストの生活面のサポート、制作サポート、通訳、翻訳、その他期間中に行うイベントやアクティビティーのサポート
場所:にしすがも創造舎、ほか
※ 交通費支給 / 出勤日や時間は応相談

こちらからお気軽にご応募ください。
ボランティアに関する質問もこちらからお願いします。
[ボランティア応募フォーム]

(English) r:ead × comos-tv × 森美術館 特別企画トークイベント開催決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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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とは?—東アジアにおけるコミュニケーション・プラットフォームを目指して」

今回で2年目を迎えたr:ead(レジデンス・東アジア・ダイアローグ)。「東アジア地域(中国、韓国、台湾、日本)のアーティストや、キュレーター、ドラマトゥルク、批評家のためのコミュニケーション・プラットフォーム」というコンセプトを掲げ、対話とプロセスを重視したレジデンス・プログラムとして実施されています。
今回のトークイベントでは、「そもそもr:eadとは?」という問いに答えつつ、このプログラムの全体像やビジョンを明らかにします。昨年の参加アーティストである小泉明郎氏、現在参加中の下道基行氏に、それぞれr:eadで得た対話や体験を語って頂きつつ、アジアのアートシーンで多くの実績をもつ森美術館の片岡真実氏をゲストにお迎えし、東アジアにおける同時代芸術と社会の関係について議論を深めます。司会は本プログラムのディレクター、相馬千秋が務めます。

《comos-tvとの連携により、森美術館の一角より完全生中継が実現!ぜひご視聴下さい!》

日時:2014年2月27日(木)19:00~21:00
視聴URL:http://www.ustream.tv/channel/comos-tv
※今回はUstreamの放送のみです。

■出演
片岡真実(森美術館チーフキュレーター)
小泉明郎
下道基行 
相馬千秋(r:eadディレクター)

主催: NPO法人アートネットワーク・ジャパン
共催:comos-tv
特別協力:森美術館
協賛:アサヒビール株式会社
助成:台北駐日経済文化代表処 台北文化センター
平成25年度 文化芸術の海外発信拠点形成事業(アーティスト・イン・レジデンス事業)

1930년대의 아시아 단편에 관해

시간이 흐른 물품에서, 처음의 철골 건축에서, 초기의 공장 건축에서, 옛날 사진에서, 없어진 물건에서, 큰 피아노와 5년전의 양복에서, 시대에 뒤쳐진 호텔에서, 그는 혁명의 에너지를 보았습니다.
Walter Bendix Schönflies Benjamin

노스탤지어는 과거를 그리워하는 것, 모더놀로지는 과거에 대한 이해를 현
재에의 전용(転用)이다. 라고 한다면, 현대 작품 안에는 노스탤지어와 모더
놀로지의 융합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기묘한 타임머신과 같이, 이 레포트
의 시간 축을 1930년으로 설정한다. 예술가는1930년대를 중심으로 노스탤
지어와 모더놀로지를 어떻게 이루었는가를 고찰하고, 그것과 동시에 아시아
의 현재 상황에서 출발하여, 결론도 아시아에 멈춘다.
일반적으로 노스탤지어라는 생각은 낡은 것에 착목하는 것에 지나지 않고, 물건의 질감을 타임머신이라도 된 듯, 시간에서 태어난 거리감과 에너지를 다시 파악한다. 하지만, 만약 우리들이 앤틱 상인(商人)적인 시야에서 벗어나 한번 더 고사해 보면, 노스탤지어의 기분이 제일 일어나기 쉬운 것은 사람의 변화. 즉, 인간의 태도나 생활스타일은 돌이키기 어려운 것이다. 다시말해, 시간의 교차를 제일 느끼는 것은 생명 형태의 변화 일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에 나오는 말처럼 「1910년 이후, 사람에게 격변이 일어났다」 현대사회는 옛날 사람이나 생활스타일에 조금씩 침투되어 돌이키기 어려운 변화를 일으켰다.
아시아의 생명 형태의 변성(変成)을 나타낸 소설에는 「명인(名人)」이 있다.이 작품은 작가인 카와바타 야스나리(카와바타康成)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것으로, 굉장한 기교의 작품으로 불리고 있다. 1938년 6월 부터 12월에 일어난 「홍인보우 슈우사이(本因坊秀哉) 은퇴시합」이 모델. 신문의 보도나 철학적인 분석, 객관적인 논평을 종합해, 추상적인 타임머신으로 만든 카와바타는 몽타쥬와 같이 이 슈우사이 명인과 오오타케 시치단(大竹七段)의 바둑시합을 표현했다. 슈우사이 명인은 집중력을 보이면서 느긋한 분위기를 보인다. 병으로 3개월의 휴가를 보내지만, 느긋한 분위기는 여전하다. 슈우사이에게 있어서 바둑은 예술작품이며, 잘난 척 하지 않는 태도에서 바둑시합에 임한다. 시합이외의 시간은 하나미(花見, 꽃놀이), 당구, 마작이나 친구를 만나는 등으로 기분전환을 하며, 스트레스를 해소한다. 그 반대로, 오오타케 시치단은 살의와 같은 분위기를 가진 자로, 전장(戦場)에서 싸우고 있는 전사와 같이 날카로운 감각과 빠른 움직임에서 긴장감을 풍긴다. 휴식 시간에도 바둑을 계속 생각하며 조금도 기분을 늦추지 않는다. 결과, 30살의 오오타케 시치단은 5번째 하얀 바둑알을 가진 명인 슈우사이에게 이기고, 1940년 1월 시합 종료 후 얼마지나지 않아 슈우사이는 병으로 사망한다.
카와바타에게 있어서 65살에 타계한 슈우사이는 한 시대의 종료를 의미하고 있는 것 뿐 만 아니라, 아시아에 있어서 미의식에의 최후의 카운트펀치가 되었다. 카와바타에게 있어서 노스탤지어는 꺼져가는 품성에 대한 고찰이 아니라, 인격과 생명의 지표가 된다. 바둑 시합 도중, 갑자기 이탈하거나 부채를 부치거나, 머리를 들어 정원의 풍경을 바라보거나, 그런 슈우사이의 정신에 대해 아쉬움을 가지며, 예술의 길을 걸어 온 슈우사이에게 존경의 마음을 가진다. 오오타케에 관해서는 아시아의 현대화에 있어서 웨스턴의 훈련에 지나지 않는다. 살인을 느끼게하는 괴물이라 해도, 수단을 가리지않고 규정을 지키는 기계와 같다고 말 할 수 있다. 따라서 카와바타 소설의예술구조는 그 자신의 미학적 감성에 따른 것이다. 그의 소설은 현대 아시아의 타임머신이 되고, 노스탤지어가 아닌 오래된 좋은 미학이 현대에 이어지고 있다. 즉, 노스탤지어는 모더놀로지가 된다.
2007년 연말에 타이페이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전람회 「명인-카와바타 야스나리를 따르다」에서, 수메체(Tse Su-Mei, 謝素梅)는 카와바타의 미학철학을 인용, 현대예술과 「예도(芸道)」정신의 관련성을 나타냈다. 바둑판의 선은사라지고, 바둑돌은 무한 공간 안에서 대결했다. 유럽의 룩셈부르크에서 재주하고 있는 화인 예술가에게, 그녀의 모더놀로지 안에는 아시아 예술정신의 가치가 없다고 평 받았다. 이것은 한번 더 호소 할 만한 과제이며, 노스탤지어라는 것에서 멀리떨어져 모더놀로지를 통해 예술의 실천과 창조를 해나간다.
나는 큐레이터로서 동경의 레지던스・동아시아・다이얼로그(r:ead)에 참가했다. 동경예술대학의 카츠라 에이시(桂英史)교수는 모더놀로지 연구에 있어 현대적인 힌트를 세가지 제안했다:공원, 조각, 암시장.
나는 야스쿠니신사의 오오무라 마스지로우(오오무라益次郎)의 조각을 보러 갔다. 오오무라는 일본의 육군을 확립한 인물이다. 유우슈칸(遊就館)에서 제로전(戦)의 전투기를 보고, 오시이 마모루(押井守)의 영화「타치구이시레츠덴(立喰師列伝)」을 봤다. 전후 식량부족에 따른 신바시(新橋), 시부야(渋谷),신주쿠(新宿) 주변에 있는 암시장의 실태나, 당시 화교인과 조선인, 일본인 사이에서 일어난 토지관리의 분쟁 등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동시에 신바시의 현상(現状)도 고찰했다.
그 중에서 제일 흥미가 있었던 것은 우에노(上野)공원이다. 대만총독부의 건축사 「모리야마 마츠노스케(森山松之助)」는 1907년 우에노공원에서 열린 「내국권업(内国勧業)박람회」에서 「대만파빌리온(pavilion)」을 담당해, 절대적
인 평가를 받았다. 특히, 「대만 찻집」의 설립은 혁신적이었다. 그때 마침,
대만총독부는 신청사의 설계 공모를 하고 있었다. 모리야마는 적극적으로 그 공모에 참가해, 공모에서 이긴 모리야마는 대만에서 신청사의 공사주임으로 부임했다. 현재는 안타깝게도 당시의 「대만파빌리온」의 모습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1929년 조선박람회의 대만파빌리온이나, 1935년 타이페이 에서 이뤄진 「시정(始政)40주년기념 대만박람회」, 1936년 기후(岐阜)에서 이뤄진 「약진(躍進)대일본박람회」 및 「후쿠오카시(福岡市)하카타시(博多市)
박람회」 등, 남겨지지 않은 「대만파빌리온」은 대만산물이나 식민지문화의 상징으로 빛났었음에 틀림없다.
과거의 풍경이 더이상 남아 있지 않음에 당황스러움도 있었지만, 타카야마 아키라(타카야마明)씨가 제작한 「동경헤테로토피아」는 나에게 조금의 희망을 가져
다 주었다. 독일에서 연극을 공부한 타카야마씨는 현재 동경에 있는 아시아 각국의 정치난민이나 이민 등과 관계하는 13개의 지역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이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 프로젝트의 컨셉은 「동경에서 아시아를 찾다」. 이른바 걷는 「여행 연극」이다. 참가자는 가이드북과 휴대라디오를 손에 들고 여러 공간을 방문한다. 목적의 장소에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예전에 그 장소에서 살고 있었던 사람, 연(縁)이 있는 도시나 나라의 이야기. 관객은 미
지의 아시아, 그리고 헤테로토피아로서 동경과 만난다.
먼저, 동경예술극장의 지하에 있는 츠키치(築地)소극장. 혁신적인 아시아
연극 공연이 다수 이뤄졌던 극장이다. 예를들어, (구)러시아 연출가 트레티야
코프(Tretiakov,1892- 1939)의 「외쳐라, 중국(叫ぼう、中国)」은 1929년 부터 이 극장에서 공연되었다. 또, 조선독립운동의 대표 극장작품「김옥균」은 1928년
부터 이 극장에서 공연되었다. 그 외에, 저우언라이(周恩来)가 1917년 일본에 유학왔을때, 칸다진보쵸(神田神保町)의 「칸요로(漢陽楼)」에서, 고향의 맛인 고기만두를 먹기 위해 자주 들렸다. 54살의 메이지(明治)대학 교수, 스가케이
지로우(菅啓次郎)는 1976년의 「제 1회 천안문사건」을 중심으로 한 작품을 제작, 라디오 방송으로 나왔다.
13개 장소의 작품 중, 제일 흥미로웠던 것은 이케부쿠로 카나메쵸우(池袋
要町) 근처의 왕가(王家)의 묘. 대만 이민자 옹유주우(温又柔)가 만든 작품의 중심인물은 대만의 언어학자, 독립운동의 추진자인 오우이쿠도쿠(王育徳)
(1924-1985). 1957년에 출판 된 오우이쿠도쿠의 저서이자 세계최초였던 「대만
어 상용단어」를 소재로 한, 오우이쿠도쿠의 이야기이다. 오우이쿠도쿠는 일본
에서 유학, 대만어에는 발음표기가 없다는 것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제2차세
계대전 중 재학했던 동경대학 중국철학 박사과정을 중단하고 대만으로 돌아온
다. 그 후, 타이난 제1고교에서 교사가 된다. 대만어로 현대연극을 창작했다. 하지만 그 후에 일어나는 228사건 와중에, 홍콩 경유로 일본으로 망명했다. 그 후, 박사과정에 복학하여 1969년 동경대학 역사상 최초의 대만 인문학박사
가 되었다. 1960년 코우쇼도우(黃昭堂), 료우켄류우(廖建龍) 등의 6인과 「대
만청년사」를 설립. 그와 동시에 「대만청년」의 일본어판을 출판했다. 오우이쿠
도쿠는 생애, 대만어나 대만독립운동에 몰두하며 1985년 동경에서 서거했다.
나는 예술가인 옹유주우 작품의 구체적인 내용은 모르지만, 대만인으로서 이케부쿠로라는 기묘한 장소에 「so close ,so far」라는 감정을 가진다. 내가 머물
렀던 호텔은 니시(西)이케부쿠로에 있다. 츠키지소극장이 있던 곳에서 1킬로
미터 정도의 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현재 살고 있는 환경과 나 자신
이 태어나 성장해 온 환경과, 이 아시아사(史)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가지
고 있는 장소는 굉장히 멀고 보이지 않는 장소라고도 말 할 수 있다. 타카야
마 아키라라는 아티스트는 노스탤지어를 모더놀로지로 변화시켰다. 팜플렛과 라디오를 한 손에, 라디오를 통해 들려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알려지지 않
은 도시의 이야기에 빠진다. 마음을 가라 앉히고, 아시아의 혁명역사의 감정
을 감능(堪能) 할 수 있다.
「동경헤토로피아」라는 아트 프로젝트는 1930년대의 세계극장:유럽을 생각나게 한다. 2012년에 행해진 카셀 도큐멘타에서 캐나나 출신의 예술가
Janet Cardiff&Georges Bures Miller가 오래된 역 Kassel Alter Bahnhof에 만든 작품
Alter BahnhofVedio Walk는 타카야마 아키라의 「동경헤테로토피아」를 방불케 한다.
Cardiff작품 중에 나타나는 노스탤지어도 도회고현학(都会考現学)적인 의식이 있다. 그녀는 스마트폰에 보존되어 있는 영상을 매개로 역사, 소설, 음악 그리고 댄스 퍼포먼스 등의 이질적인 수법을 통해, 현지에 설치되어 있는 다큐멘트 인스털레이션(Installation)의 도선(導線)에 의해, 감상자를Kassel Alter
Bahnhof역과 홈의 사이에서 방황시켰다. 이러한 현실과 가상이라는 이중성 안에 헤테로토피아적인 감각이, 점점 형태로 되어 간다. 그 중에, 30년대에 있었던 강제수용소에 유대인을 보내는, 개인과 집단의 역사집합(歴史集合)의울림은, 차가운 시공을 넘어서 이 역의 7번 홈에서 확실하게 들리는 것 같이마음 속 깊은 곳에서 열광적인 기분을 불러 일으킨다.
이 Cardiff의 작품에 대해, 타카야마 아키라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는 현지에서 스마트폰 영상을 감상하고 있을 때, 비틀거리며 걸어가던 한 신
체장애자가 그를 스쳐지나간 것을 경험했다고 한다. 그 순간, 노스탤지어의 정서는 현실 상황이 개입되면서 중단되고, 두개의 세계가 공명을 시작, 전류가 흐르는 것과 같이 그의 전신을 찌릿찌릿하게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강렬한 감각이 있어도, 타카야마씨는 이 작품(「동경헤테로토피아」」에 대해, 전람 기획으로의 출발점은 전혀 다른 방향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타카야마 작품의 발상은 옛날 극장에 있는 관객과 연동성, 혹은「theatre」라는 낡은 단어의 의미에서 시작되고 있다. 다시말해, 그가 목표로 했던 것은 현대 극장과 같은 단순한 「연출」이 아니라, 관객이 「연출」의 일부가 되는 것을 원했다. 그 결과, 타카야마가 주시하고 있는 것은 극장의 초점을 관객에게 돌리고, 그리고 연출 후에 관객들의 대화가 활성화되는 것이야말로, 그의「관객론」의 고찰이다. 그러므로 아티스트가 노스탤지어와 고현학을 작품 안에서 교차시키는 의의는, 단순하게 멀리서 보는 프로젝트로서 신체의 무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드라마틱한 연극적인 효과를 만들면서, 스스로가 참가하는 「정치성」을 통해, 관객을 한번 더 사회와 연결하는 것을 의도했다.또한, Kader Attia라는 작가의 「The repair from Occident to Extra-Occidental Cultures」라는 마이크로박물관의 작품이 있다. 이 작품은 전쟁, 의학 그리고 식민지역사 등의 매개로 인해, 노스탤지어를 현대창조의 지식, 공간 그리고 프로젝트 배치의 레벨까지 전환시켰다. Geoffrey Farmer가, 35년부터 85년
까지, 50년간의 잡지 『ライフ』를 편집해 인스털레이션 한 작품「Leaves of Grass」은 전통적인 길을 따라, 전통적인 박물관에 있는 아이러니한 비쥬얼 전시의 수법이었다. 한편, 타카야마씨의 시점에서 출발한다면, 현대의「아시아」에 있어서의 경험에 의해, 고현학이 표현될 수 있는 「아시아성(性)」, 역사와 현재의 교차에 의해 태어난 다양성과 풍부한 층은, 아마도 현재 유럽에 있어서의 직선적인 역사발전을 능가 할 것이다.
말 할 필요도 없이, 노스탤지어와 고현학에 닿으면, 역사적인 상처와 국제문제에 직면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아시아에 있어서 다언어와 다민족에 의해 태어난 역사의 지층은 무엇보다 우리들이 주목해야 만 할 것이다.
동경에 체재했던 동안, 록봉기(六本木) 모리미술관의 10주년전을 견학했다. 큐레이터 카타오카 마미(片岡真実)가 기획한 「out fo doubt」. 쉐다친(謝徳慶)의 저서 『out of time』의 시점을 흉내내어 생각해 보면, 이 전시 테마는 「회의무용(懐疑無用)」이라고 볼 수 있지만, 실제로 「회의에서 태어나다」라고도 바꿔 말 할 수 있다. 사진가 나카히라 타쿠마(中平卓馬)의 작품도 있었고, 나카무라 히로시(中村宏)의 오키나와 전쟁에 관한 그림, 대만과 이란의 전쟁기지, , 포스트전쟁에 대해 모델올로기를 실천한 시타미치 모토유키의대만과 아시아 각지의 토리이(鳥居)를 방문한 작품도 있었다. r:ead 일본팀의 프레젠테이션에서 시타미치 모토유키 작품에 대해 들었다. 그는 기지(基地)와 토리이의 현상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자신의 할아버지를 테마로 한 「일요일의 그림」과 같은 창작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것들은 아트의 힘을 빌려 현대 유적의 모델올로기를 실천한 시공과 교차하는 집단(Assemblage)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재밌는 것은 젊은 예술가인 시타미치 모토유키의 작품은 이때 모리미술관뿐 만 아니라, 타이중의 국립미술관에서도 「아시아 2년전(展)」에 전시되고 있었다. 소문에 의하면 기랑인잔(宜蘭員山)의 제로식비행기지는 대만예술가 카오쥰혼(高俊宏)에게 추천 받았다고 한다. 덧붙여서 말하자면, 일련의 노스탤지어와 모델올로기의 토론을 끝내고, 나는 카오쥰혼의 작품의 파워풀과 루트는 앞서 이야기 한 작품과 비교해, 뒤쳐지지 않고 살아있는 분위기는 충분히 주목 받을 만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카오쥰혼이 2010년에 발표 한 톰슨(Thomson)영상시리즈 안에, 대만 자동차의 멘테넌스 공장이었던 폐허에 숯으로 그려진 벽화가 있는데, 그곳은 영화감독 차이밍량(蔡明亮)의 영화 「떠돌이 개(Stray Dogs, 郊遊)」의 로케지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대만 예술업계에서 유명하다. 그의 작품은 목적성이 없고, 2013년 성품(誠品)서점 갤러리에서 「우리들은 너무 열심히 일하고 있지 않은가」라는 개인전을 발표했다. 대만10군데의 현대 폐허에 숯으로 그려진 벽화를 전시해 굉장히 호평을 받았다. 카오쥰혼의 「폐허 영상 숯그림 계획」은 1930년의 소절(小節)이 존재하고 있다. 그 소절은 예전 인잔전기기지(員山戦機基地)의 제로식비행기의 카미카제 특공대를 경험한 대만 국적의 파일럿 장정관(張正光)이다. 그 외에, 폐허의 역사를 앞으로 돌리면, 「해산(海山)탄갱폐허」 「대만차량수리소폐허」등 벽화의 단체, 자유주의의 칼럼이나 유족의 인터뷰 등, 여러가지 활동으로 발전했다.그러한 활동을 통해서 노스탤지어는 애수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대만 지경(地景)구조의 고찰과 재구축으로 되지 않을까.그것과 동시에 국립미술관에서 전시했을 때 카오쥰혼 본인이 탄갱노 동자의 옷을 입음으로서 「몸으로 전달하다」라는 행위를 실천했다. 예술가는 현실과 역사의 사이에 있는 상처를 메워주어, 신체 레벨의 대화로 태어난다. 아마도 노스탤지어의 본질은 어떤 것으로 메워지는 것이 아니라, 모델올로기를 필요로 한다.
「폐허 벽화 계획」은 현재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있다. 제국주의의 역사사진,
식민전쟁의 상처, 현대공업의 유적, 갤러리 공간, 미술관의 공간, 아시아의 유
대, 여러가지 자기분석, 대형의 제국주의와 이상(異常)한 아시아 정치와의 교
차에 있어서, 기묘한 헤테로토피아가 되어, 예술적인 행동으로 되어 간다. 193
0년대의 격동의 아시아사(史) 안에서 사람들은 「관객참가형」의 방법을 통해 회복했다. 노스탤지어와 모델올로기의 정치학은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공
공공간의 사유화를 피상적으로 비판한다. 그 결과, 예술가가 계획을 세우고 국민이 참가하는 것에 대해 가능성을 느낀다. 우리들은 어떻게 하면 현대예술주의의 스테레오타입에서 벗어나, 아시아 현대예술의 「노스탤지어와 모델올로기」를 성립 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을 때, 이것은 아직 갈 길이 멀다고생각되어진다. 사람들이 폐허극소(劇所)를 방문해, 스스로 참가, 체험하고 논의 하는 것. 무정부, 탈식민, 국경을 넘어서,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폐허를 재생하는 길이 된

탈예술(脫藝術)에 관하여

Haeju Kim: 이번 R:ead 는 오랫만에 만나 각자가 작업하고 있는 환경과 관심 속에서 가지고 있었떤 문제들을 고민해 볼 수 있었던 기회였던 것 같아요. 각자 현대미술과 비평적 디자인이 봉착한 한계를 짚어 보며 이에 대한 체념에 머무르지 않고 어떤 새로운 방법을 모색해 볼 수 있을까를 고민했었죠. 그런데 이 한계라는 것은단지 예술의 장 내부에서만 만나는 문제만은 아닌 것 같아요. R:ead가 끝나고 돌아온 날 서울에서는 경찰이 민영화에 반대해 파업을 벌인 철도노조의 간부들을 체포하기 위해 민주노총 사무실을 습격하는 사건이 있었고, 12월 28일 서울도심에서 대규모 시위가 있었어요. 새 정부 들어 최대 규모의 이 시위에 참여하면서 한 번쯤은 불길이 제대로 붙기를 바랬었는데, 조직적이고 전략적인 경찰의움직임에 비해 시민 시위대는 결속된 힘을 보여주지 못한 것이 아쉬웠어요. 결국 어수선하게 끝난 시위 며칠 후에 철도노조의 파업은 중단되었고, 민영화 반대의 목소리도 한결 사그라든 느낌이에요. 이러한 아쉬움의 경험들이, 지속적인 운동과 항의를 조직하는 힘을 약화시키고, 점차 시민의 정치적인 힘에 대한 신뢰를 무너트리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되요. 예술 실천에서 느끼는 한계나, 현실의 문제를 항의하는 방식에서 느끼는 한계에서 비슷한 정서가 있는 것 같아요. 여기서 ‘탈예술’은 예술 안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 뿐 아니라, 예술 밖의 한계를 극복해야 하는 이중의 미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 되네요. R:ead 이후의 서울의 풍경을 어떻게 보셨는지, 그리고 ‘탈예술’에 대한 아이디어가 그간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궁금하네요.

Hwang Kim: 굳이 다시 언급 함으로 이 글을 시작하자면 저에게 R:ead 는 새로운 어떤것을 찾는 것이 아닌, 지금 고민하는 것들, 머리 주위의 허공에 떠도는 것들을 확실하게 언어화/문자화 하기위해 전략적으로 이용하자는 스스로의 순수하지 않은 목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비평적 디자인을 표방하며 작업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고민을 많이 했고, 질문을 받으면 벙어리가 되어야 했던 부분(해당 질문이 가장 많이 나오는데에도 불구하고)이 바로 디자인이 진보를 외치는데 결국은 예술에서 방법론을 차용한다. 였어요.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저는 보통 1. 도널드 노먼의 디자인의 기능성에 대해서 언급 해왔습니다.(디자인은 문제를 해결하고, 예술은 문제를 발견하는 행위다.) 그리고 2. 소유의 커뮤니케이션: 예술 작품은 대중이 소유할 수 없고 시각적으로 보는 것으로 소통한다.(이미지) 하지만 디자인은 대중의 소유가 가능하니 완벽한 소유권으로 인한 소유자 스스로의 파괴등이 가능하다.(오브제) 물론 어느정도 설득 가능한 논리기는 하나 스스로 턱없이 부족함을 느끼고는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제가 스스로 찾은 행위가 탈예술 행위였음을 인지하게 된것이지요. 사실 제 피자작업에도 이러한 성향이 있으나, 이때는 철저히 영감에 의한것이지 스스로 논리화 되지 못하였습니다. 심지어 READ에 가기 오래전에 승효(페스티벌 봄 예술감독) 씨와 대담한 것을 보면…

(e-mail 대담중 발췌) —————————-

황: 제가 승효씨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전시를 통해 예술을 해체시키고 싶다.’ 사실 이 전시를 통한 제 욕심은 그랬지요. 저나 승효씨나 예술계에 몸을 담고 있지만 예술보다 사회 자체에 관심이 있습니다. 저와 승효씨는 서로 그 비젼을 공유하는데 이 전시는 일종의 첫 번째 실험 이었습니다. 예술의 사회화 이지요. 예술의 대중화와는 달라요. 사회적인 예술이 아니라 즉, ‘정치/사회적 이야기에 관심을 갖고 그런 작업을 하는 작가적인 성향이 많은 디자이너’가 아닌 ‘예술에 관심을 갖고 그런 일종의 활동을 하는 사회/정치 사상가 또는 선동가’ 되겠네요.

승효: 네 맞습니다. 사실 제가 다원예술 이야기를 꺼내면 예술계에서는 지나간 아젠다를 왜 이제와서 건드리느냐고 하시는 분들도 많아요. 그렇지만 제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김황씨가 정확히 지적하신대로, 사회적인 예술이 아니라 예술 바깥에 혹은 경계에 있는 사람들의 사회적인 활동이거든요. 그들중 누군가는 보다직접적이고 선동적인 방식으로 ‘작업’을 하고 있고, 누군가는 예술의 형식들을 차용하면서 좀더 미학적인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을텐데, 저는 후자를 새로운 다원예술이라고 정의하고 싶은 것이에요. 굳이 왜 정의를 해야 하느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기금이나 정책에서의 다원예술은 조만간 곧 사라지더라도 그에 관계없이 다원적인 작업들은 이미 만들어졌고 앞으로도 만들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의를 하지 않으면 논의 자체를 시작할 수 없으니까요. 비평적 디자인 전시를 제가 페봄에서 하고자 하는 이유중 하나는, 디자인을 다원예술에서 차용가능한 하나의 중요한 매체로 인식해 보려는 시도입니다. 또한 디자이너들의 방법론과 형식이, 포스트드라마연극이나 농당스가 그랬던 것처럼, 다원예술에 새로운 충격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고요. 단어 선택에는 조금 신중하고 싶지만 저도 굳이 말하자면 ‘예술에 관심을 갖고 그런 일종의 활동을 하는 사회/정치 사상가 또는 선동가’중에서 직업이 디자이너인 사람들을 소개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도 있겠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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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화 전에도 어렴풋이 탈예술에 관하여 인지하고 있었다고 말할수가 있을것 같습니다. 사실 탈예술을 표방하고 있지는 않고 그럴 생각도 전혀 없지만 제 작업의 방향성은 그래야 하지 않을까 지금은 생각하고 있어요.

얼마전 나연우씨와 만나서 페스티발에 관하여 이야기 한적이 있었습니다. 한때 페스티발이라 함은 예술의 진보화를 이끌어왔던 것인데, 과연 지금은 어떤가. 쏟아져 나오는 페스티발이 과연 담론을 형성해 가고 있는가. 이제는 새로운 대안적 페스티발이 출몰해야 할 때가 아닌가. 라구요. 물론 깊이 공감하는 점이 있었지만 돌아와서 곰곰히 생각해보면 이런 예술적 진보를 위한 진보적 사고들은 안타깝게도 제가 보기엔 현제 우리 사회가 처한 문제점들에 비하면 뭐랄까 굉장히 소소한 문제들로 느껴진달까요?

대통령 퇴진을 외치며 분신자살하는 이를 지켜보며 저의 예술적 행동이 시시해 보인달까요.(이것은 병이라면 병이고, 거만이라면 거만이겠지만요.) 결국 저는 사회적 활동이나 행위와 연계되어 있는 예술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사실 이 부분은 자연스럽게 탈예술의 다른 축이 되는 것 같아요.

물론 아직은 어떤 방식으로 어떤 이야기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READ의 리서치도 어떠한 스트럭쳐를 가지는 ‘탈예술’적인 리서치가 되어야 할것 같다고 생각해요.

Haeju Kim: ‘탈예술’에 대한 아이디어와 더불어 김황씨가 지금 전시를 기획하고 있다는 것이 흥미롭게 느껴졌어요. 큐레이터는 창작자와 관객을 매개하는 역할을 하면서 제도와의 타협점을 찾아가는 측면이 있거든요. 저 역시 독립 큐레이터이지만 기관에 속해있지 않을 뿐, ‘미술’이라는 하나의 커다란 제도에서 벗어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저항을 주장하는, 독립성을 주장하는 어떤 기획도 제도에 대해 인식하지 않고 시작될 수 없다고 느끼고 있어요. 그런 측면에서 김황씨의 ‘탈 예술’과 큐레이팅이 어떻게 만날 지 관심있게 보고 있어요. ‘이 전시를 통해 예술을 해체하고 싶다’라는 언급은 큐레이션을 통한 탈 예술 실천의 시작으로 보이거든요.

이 같은 논의에서 최근에 읽은 글이 유사한 쟁점을 다루고 있어서, 공유하고 싶어요.
<큐레이팅이란 무엇인가?>(폴 오닐 엮음, 현실문화, 2013)라는 앤솔로지에 실린 마크 허친슨과 데이브 비치의 대화입니다. (http://www.markhutchinson.org/writing/writing%20inconsequential%20bayonets.html)
큐레이팅의 독립성과 협업의 가능성에 대한 대화에서 이들은 ‘반(反)예술’과 ‘반(反) 큐레이션’을 얘기하고 있어요. 데이브 비치의 설명 중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반예술의 전복적 잠재성은 예술을 희생시켜 예술 이외의 무언가-배제된 것, 일상적인 것 등과 같은 -를 성취하려는 게 아니다. 예술은 반예술의 전복적 잠재성으로 인해 예술에 내재되어 있지만 예술이 지지하길 거부하는 것에 대항한다. 정확히 바로 이같은 의미에서 반예술은 예술의 변증법적 변환, 즉 부재의 부재이다. 반예술은 예술에 변화될 만한 가치가 있는 무언가가 있음을 뜻한다.”

“큐레이터가 ‘다른 무언가를’ 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막는 것은 무엇일까? 여기에서 전문성, 경쟁력, 기술 등의 모델로서의 반예술이 선호된다. 따라서 ‘다른 무언가를 하는’일은 공모에 저항하는 다양한 활동과 입장을 나타낸다. 당신이 말한 것처럼 독립이 언제나 무언가로부터의 독립을 뜻한다면, 공모는 언제나 무언가-시장, 미술제도, 역사, 예술의 사회적 가치에 대한 개념, 미술 애호가의 인류학-와 공모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다른 무언가를 하는 ‘일은 시장, 미술제도, 미술사 등 특정 제약에 저항하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반예술에서 배울 수 있듯이, 공모(들)에 대한 저항은 개인의 실천을 사회에서 고립시키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의 공식적인 담론이 억압하거나 배제한 사회적 맥락으로 예술을 방해하고 오염시키는 데에 있는 것이다. ”

물론 김황씨가 말씀하신 ‘탈예술’은 ‘예술에 내재되어 있는 것 중 예술이 지지하길 거부하는 것’을 드러낸 다는 ‘반예술’의 의미보다는 좀 더 적극적인 것으로 느껴져요. 궁극적으로는 예술 바깥에서 방법과 실천을 모색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이번 전시와 같은 경우는 그것이 다루는 대상이 디자인이고, 표출되는 방식이 전시라는 점에서 아직은 예술 내부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고 (어쩌면 이것은 탈예술로 가기위한 점진적인 초기의 시도일 수도 있지만), 위에서 설명하는 반예술적 실천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 대화에서 데이브 비치는 또한 반-큐레이션을 실천한 사례로 예술가가 큐레이팅한 몇몇 전시를 예로 들고 있어요. 미술관 디스플레이의 전문적인 규범에 따르는 전시이기 보다는 갈등과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는 프로젝트를 기획하는 것이죠. 큐레이터는 작품과 관객 사이의 매개자의 역할, 해석자의 역할이 아니라 예술의 사회적 관계를 폭로하는 사회 내부의 협력자라 볼 수 있겠죠. 그런 의미에서 지금 김황씨가 기획하고 있는 ‘비평적 디자인’ 전시가 반예술 (혹은 탈 예술)을 다룰 뿐만 아니라 반- 큐레이션 혹은 탈-큐레이션의 실험장이 될 수 있을까요? 만약 그렇다면 구체적으로는 어떻게 실행될 수 있을까요?

Hwang Kim: 사실 저의 탈예술이나 탈큐레이팅은 지금까지 예술이 가진 스트럭쳐나 제도에 반하고자 하는 것이 목적은 아니예요. 말그대로 공격적인 태도가 아닙니다. 그 제도가 틀렸으니 뒤집어 엎자는 것도 사실 아닌것 같아요. 지나친 회색론일수도 있지만 사실 저라는 사람 자체가 꼭 이게 맞다 틀리다가 없거든요. 약간 도가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지요.

지금 제가 흥미로워 하는 것들/하고 싶은 것들은 스스로가 행복해지고 타인들의 삶의 부정적 무게들을 조금 덜어주는 것(즐거움을 주는 것) 같아요. 타인의 범위가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더 좋겠구요. 그러한 방법이 뭐가 있을까 생각해보면 ‘사회체계가 긍정적으로 변화할때’ 사람들은 즐거움을 얻는것 같습니다. 절대로 바뀔 것 같지 않던 이 부조리한 사회가 긍정적으로 바뀔것 만 같은 희망이 있을때 다수의 사람들이 행복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통일을 생각하는 것이고, 이 시대를 더 명확하게 바라봐야하는 시대성을 가져야 한다고 스스로 믿고 있습니다. 아울러 다음 사회를 상상하고 고민하고 제안하지요.

저는 예술가 이기에 이러한 행위를 예술이라는 형태로 표현 하고자 하는것인데, 그러면서도 너무 기존에 보아왔던 예술의 형태로 하고자 하지는 않아요. 즉, 고민을 작업으로 표현을 하는데, 사실 작업이 예술의 범주에 들어갈수가 있을수도 없을수도 있는 것을 하고자 합니다. 해주씨가 공유해주신 글, 마크 허친슨의 글을 발췌를 하자면…(영어로 주셔서 다 읽느라 고생 좀 했습니다. ㅎㅎㅎ)

“나는 이것을 덧붙이고 싶네: 다른것을 한다라는 의미는 큐레이터로서 큐레이터 이외의 다른 무엇인가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I want to add this: doing something else means being something other than a curator as a curator.)”

“그러니까, 만약 큐레이터가 다른것을 하다면 – 아울러 다른것이 된다면 – 나는 이 ‘존재’가 현존하는 체계를 다르게 사용한다는 데에 동의하네. 하지만 나는 더 나아가 이 ‘존재’가 기존과 다른 체계 조차도 다르게 사용한다고 제안하고 싶네. (Hence, when and if the curator does something else – and becomes something else – I agree that this ‘being’ occupies existing structures differently but I want to go further and suggest that this ‘being’ also occupies different structures differently.)”

여기서 중요한 점은 ‘왜 기존과는 다르게 하고 싶을까’ 일텐데. 이건 제가 봤을땐 업(Karma) 같아요. 결국 ‘변화’와 ‘창조’에 가치를 두기 때문이겠지요. 기초적인 작업의 영감이 되는 사회체계도 긍정적인 변화로 이끌고, 그 방법론으로서 차용하는 예술도 긍정적인 변화로 이끌고. 이러다보니 다른 분야에서 여러 방식들을 차용하기 시작합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 하면 그 체계가 싫어서 ‘반예술’하기 보다는 자연스레 ‘탈예술’하는 것 같아요. 그러면서도 ‘업’으로 하여금 예술의 범주에 남아있게 되는 것이죠. 어쩌면 해주씨께서는 더 적극적이지 않느냐고 했는데, 저는 오히려 소극적이고 관조적인 태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치를 보더라도, 사실 저는 진보도 좀 다른 방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보수에 반하는 진보가 아니라 보수를 떠안고 함께 갈수 있는 진보가 필요할때라고 보아집니다. 안그러면 이길수가 없어 뵈요. 제 작업인 ‘소비배급거래제(http://www.hwangkim.com/crts.html)’를 보면 제 고민이 잘 나와있는데, 결국 자본주의가 성공하려면 신자유주의도 아니고, 강제적인 복지의 증가도 아닌, 자발적인 기부의 증가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거예요. 이는 인간의 기초적인 욕망인 소유욕에 반하는 것이며 말도 안되는 거지요. 제 작업 일러스트레이션을 보면 부자들이 노숙자에게 돈을 주려고 줄을 서있어요. 이런 느낌으로 보수를 안정시키는 거죠. 우리가 집권해도 너희들 밥줄은 다 안전하니까 걱정마. 너희들 지켜주면서 진보할께…

여기에 다른 한 측면을 덧대자면 저는 인생을 그렇게 살아온 사람들에게 감동을 받는것 같아요. 작업보다는 오히려 작가의 인생을 보고싶어 하구요. 그런 의미에서 그냥 삶을 살았는데 인생이 예술인 사람들을 찾아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저도 그렇게 살고 싶으니까요. 저는 그들보다는 업이 예술이니까 더 적극적으로 예술로 표현을 하겠지만요. 예를들어 제가 예술가가 아니었으면 그저 북한에 피자 디비디 보내고 말았겠지만 저는 그걸 전시든 공연이든 만들었듯이요.

결론짓자면:

황의작업 = 시대성/진보된 사회 체계(황의 고민) + 융합형 예술/체계 진보된 예술(황의 업) > 자연스럽게 탈예술(황의 작업/인생) > 예술의 형태로 프리젠테이션(황의 작업)

황의 비평적 디자인 전시 큐레이팅 = 시대성/진보된 사회 체계(황의 고민) + 융합형 예술/체계 진보된 예술(황의 업): 예를들어 지금 함께 작업하는 옹카/노암의 광주 518에 대한 작업은 시각예술도, 공연도, 관객참여형도, 디자인도 아닌 무언가. > 전시의 형태로 프리젠테이션(황의 큐레이팅): 근데 사실 이마저도 굳이 전시라고 하면 전시이지만 이게 전시라고 해야할지. 공연이라고 해야할지…

READ는 예전에 이야기 했던데로 자연스럽게 탈예술한 이들을 리서치 하고 이를 하나의 방법론으로 정립하여 다른 예술가에게 한번 적용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직은 고민중입니다. 예술가가 제 리서치를 대본삼아 연기를 하는.

없어지면 남는다/일과 이야기

「과거는 어떻게 편집되어 계승되는가. 거기에 관계되는 일의 존재와 현상과 의미의 변용. 더 나아가 가두어진 과거를 개봉하는 방법과 체험」
그러한 것이 나의 10년동안의 테마였다고 최근 생각하고 있다. 제작하는 수법은 사진과 인터뷰 등. 눈 앞에, 예전부터 있어왔던 관계성에 흥미를 가지고 있기에 될 수 있는 한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닌 관찰과 수집, 편집이란 수법을 이용했다. 역사라는 커다란 이야기와 그 주변에 버려지고 있는 작은 이야기를 동시에 취급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이번 r:ead에서는 지금까지의 다큐멘터리적인 수법에「스스로 무언가를 더하는」것을 상정(想定)하고, 리서치를 시작하고자 한다.

중국 한국 대만의 작가와 큐레이터들, 그 외에도 유학생, 통역가들과의 일주일간의 교류는 굉장히 의미가 있는 시간이었다. 이번 파트너인 핫토리 히로유키씨는 타이의 방콕에 체재하고 있었기에 이번 일주일동안에는 직접 만나지 못했지만, 어시스턴트로 협력해주고 있는 쿠마쿠라 하루코씨와 세명이서 매일 메일을 주고 받으며 대화를 이어나갔고, 그 대화에는 생각이나 아이디어들이 섞여 있었다.

나 스스로, 하나의 작품을 만드는데 수년의 시간이 걸리는 경우도 많아, 이번 일주일을 끝낸 현시점에서는 제작의 출발점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로, 여러가지의 자극이나 요소를 받아들인 정도이다. 그런 점에 입각하여 많은 “계기”로부터 하나를 예를 들어보고자 한다.

이번 참가 작가인 슌순의 「예술작품은 미래를 위한 것」이라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이말은 통역을 통한 말이기에 본인의 의도와 다를 수도 있지만)그가 말한“예술작품”을(어떤 사고나 행위를 결정화(結晶化)한 물체로써)“모뉴멘트”라는 말로 변환시켜「모뉴멘트는 미래를 위한 것」으로 사고(思考)를 시작해 본다.모뉴멘트의 많은 것이 누군가의 자아로 과거를 마음대로 편집하고 남겨두기 위해 강고하게 만들어진(그것들 중 많은 것이 유감스러운 것들)으로 이해하고, 미래에 개봉되어 잘못 이해할 수 있는 소프트의 모뉴멘트 같은 것의 가능성을 작품?으로 생각해 보고 싶다.
그렇게 말하면 슌순은 「어떤 모뉴멘트는 의미가 바뀌어도, 예를들어 약속장소로써 남겨지거나 하지 않는가?」 라고 말한다. 그에 대해 「시부야의 하치공상은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약속장소라고 할 수 도 있다. 유명하니까 약속장소가 되네. 하지만, 휴대폰이
있으니까 약속장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라고 쿠마쿠라씨는 반응한다.
하치공은 예전 시부야역 앞에서 주인을 매일 기다린다. 주인이 죽은 후에도 그 개는 역앞에서 계속 기다려, 그 이야기가 미담으로 유명해져 동상이 되었다.
하치공상은 지금도「그럼, 하치공 앞에서 만나자」라는 기능을 계속 가지고 있다. 어떤 개인적인 약속장소가 모뉴멘트화되고, 공적인 “약속장소”로써 계속해서 존재하는 매우 흥미로운 예일 수 도 있다. 더나아가 찾아보면, 1934년에 만들어진 하치공의 동상은 제 2차대전 중 공출(供出) (금속부족으로 병기등을 만들기 위해 온갖 것들이 몰수되어 형태가 바뀌었다)로 인해 파괴되었는데, 전쟁 후 재건되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리지널의 하치공은 병기나 그 무언가로 형태가 바뀌고 말았다는 것, 그냥 복사되어 복원된 것이 시대가 흘러도 계속해서 같은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

12월의 체재 일주일간을 끝낸 다음 날, 핫토리씨가 타이에서 일본으로 귀국했을 때, 야스쿠니신사에서 “만날 약속”을 했다. 조금 억지일 수 도 있겠지만, 야스쿠니도 예전에 “약속 장소”의 시설로써 기능을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곳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다. 미래에 만나기 위해, 죽은 자의 약속장소라는 장치라는 측면.

……라는, 아직 점과 점의 상태로 그것이 연결되지 않은 현상의 일부를 적어보았다.
핫토리씨와 쿠마쿠라씨와 주고받은 메일은 서로 의견교환과 사고(思考)의 비약으로써 유효했으며, 사고(思考)과정의 아카이브로써도 계속해서 진행 할 예정. 2월〜3월 체재 중에는 토우후쿠(東北)에서 발생하고 시작되고 있는 모뉴멘트나 그 이외에 칸토(関東)를 포함해 리서치를 하려고 생각하고 있다. 만약 기회가 있다면, 중국 한국 대만의 참가자들의 리서치에도 동행하거나, 같이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도 마음대로 해본다. 왜냐하면 이 기획에서 말하는 레지던스라는 것은, 어떤 설정된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같이 어딘가에 가거나, 대화를 하는 시간이 아닐까 라고, 지금은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핫토리 히로유키

12월22일 아침,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으로 돌아와 하네다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향한 곳은 야스쿠니신사. 그리고 토리이(鳥居, 신사의 입구를 말함) 앞에서 시타미치 모토유키씨를 만나다. 내가 방콩에 있었기 때문에 참가 하지 못한 일주간의 r:ead 체재프로그램 제1탄이 끝난 직후였다. 황금색의 낙엽이 떨어져 있는 큰 은행나무를 보니까, 여기가 일본이고 겨울의 시작이라는 것을 실감 할 수 있었다. 같은「아시아」라는 틀로 묶여 있는 타이
는 상하(常夏)로, 공통의 호칭을 가지고 있는 땅이라고는 믿을 수 가 없다. 요즘 수년동안 아시아라고 묶여 있는 나라를 왕래하면서 활동하고 있는데, 이「아시아」라는게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계속 가지게 된다.

현재 참가하고 있는 r:ead는, 동아시아라고 묶이는 나라들의 아티스트와 큐레이터가 「대화를 거듭해나가는 자리」,그 자체를 아티스트 인 레지던스의 새로운 형태로 제시하는 도전적인 시도이다. 나는 보통 아티스트 인 레지던스를 주요사업으로 하고 있는 아트센터에서 큐레이터로 활동하고 있기에, 이 새로운 레지던스의 형태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고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내가 소속해 있는 센터는, 제작을 하기 위한 스튜디오와 숙박시설 그리고 발표를 위한 갤러리 공간이 있는, 바로 창
작활동에 집중하기 위한 곳이다. 아티스트에게 있어서, 작품을 집중해서 제작하고 발표하는 「모뉴멘털(monumental)」적인 활동이 대전제로 깔려 있는 상황이다. 그것은 물론 굉장히 의의가 있다고 생각되어지지만, 그러한 모뉴멘털로 목적이 명확하게 정해져 있는 자리가 아니라, 체재제작이라는 자체의 의미에 의문을 가지는, 혹은 그 근본을 재고(再考)하기 위한, 얼터더티브(alternative)적인 환경이 r:ead라고 생각하고 있다.

파트너인 시타미치씨는, 「모뉴멘트」 라든가 「모뉴멘털적인 사건」과, 그 주변이나 이면(裏面)에 나타나는 풍경을 여러가지 방법으로 계속적으로 탐구해 온 아티스트이다. 그는 제1회 체재에서 이루어진 대화 속에서「만남의 장소」라는 키워드를 만나게 된 것 같다. 다시말해, 여러가지 기념비가 아닌 미래를 위한 부재의 모뉴멘트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 그것은 내가 미술이나 건축의 필드에 있어서, 사건이나 경험에 윤곽선을 부여하는 작업
을 해 온 것과 어느 부분에서 잘 맞아떨어질 것 같아 기대가 크다.

마지막으로, 이번 대상이 되고 있는「동아시아」에 대해. 정말 동아시아라는 틀은 존재하는 것인가? 어쩌면 그런 틀은 환상일 수 도 있다. 나는 그것을 우선, 「인접하는 타자(他者)」 혹은 「이웃 사람의 집합」이라고 해석하고 싶다. 국가라는 프레임에 의해 절단되고 마는, 또는 시대에 동화되고 마는, 바로 옆에 있는 사람들. 거리적으로 더 떨어져 있는 동남아시아
의 나라들 조차, 내가 살고 있는 일본과 여러가지로 인접해 있다고 실감하고 있는 가운데, 우리들은 조금 더 가까운 이웃 사람으로서 어떠한 대화를 거듭해 나갈 것인가? 「미래를 위한 부재의 모뉴멘트」는 그러한 대화를 심화시킬 수 있는 하나의 기점이 될 수 도 있다.

동아시아는 비어있다.

지금의 「동아시아」는 미국의 시점에서의 동아시아인가, 아베씨와 시진핑씨와의 사이에 있어서의 동아시아인가, 보편적가치로부터의 동아시아인가, 아니면 중국인 일본인 혹은 한국인에게 있어서의 동아시아인가.
어떠한 입장에서 생각하는 경우라도, 이른바「동아시아」에 포함되는 지역과 문화를, 자신이 걸어본 적도 경험해본 적도 없는 사람은, 진실과는 거리가 먼 무지와 편견으로 스스로도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모르는 논점을, 사람에게 피로(披露)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 논점을 위해 논거를 찾고, 때로는 스스로가 논거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그렇게되면 사람은 사물의 표면 밖에 보이지 않게 되어,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는 힘이나 지혜를 잃어버리게 된다. 진짜의 세계를 보아도 보이지 않고,서커스의 개(犬)와 같이, 어떠한 훈련도 받아들인다.
지금의 세계는 글로벌화되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말기 바란다! 글로벌화가 문화에 가져다 준 큰 리스크 중의 하나는 우리들이 「노예」와 같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아직 인식하지 못한 채, 그 위에 독선적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정확성」의 가치는 조금씩 작아지고 있는데, 대다수의 사람은 그것에 대해 의문을 가지지 않는다. 그것은 자각도 하지 않는, 나른해져 있는 개구리와 같다.
동아시아와 관계없는 것을 기술(記述)하고 있을수도있다. 하지만, 먼저 이것에 대해 논의하지 않으면 진실의 문제에 도달할 수 없다. 다시말해, 혹시 우리들의 논의가 앞서 말한 것과 같은 상황이라면, 그 논의는 「학술」이라는 것으로 그럴싸하게 꾸민 가짜의 논의가 된다.
나는 한 사람의 「진심」을 가진 아티스트로서, 이러한 「학술논의」는 술안주 밖에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혹시 우리들의 논의를 형태만이 아닌 것으로 만들고 싶다면, 처음부터 계산 된 틀에 모든 문제를 집어넣어서는 안된다. 이것은 대다수의 사람에게 있어서는 어려운 것 일 수 도 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이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안심감」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결국 위험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정말 논의를 통해서 해야만 하는 것은 「동물원에서의 사냥」 이나 「공원에서의 탐험」이 아니다.

그럼 이제, 「동아시아」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먼저, 고전주의와 정치는 시대에 뒤떨어진다. 지금의 세계는 아주 오랫 옛날에 그 게임을 끝냈다. 옛날에는 영토를 개척하고, 제국을 만들었지만, 지금은 전혀 룰이 다르다. 그렇기때문에, 좁은 도량의 민족주의와 애국주의는 시시하게 여겨지고 있고, 자신을 마취시키는 이외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물론, 정치가들에게 있어서는 아직 사용되고 있지만, 그것은 「바보」같은 국민의 투표, 혹은 지지를 받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동아시아는 미국과 같이 자연스럽게 민족주의를 배척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유럽과 같이 아픈 경험을 통한 교훈을 가지고도 있지 않다. 때문에, 민족주의는 아직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들이 「사랑스러운 동아시아」에 대해 논의한다면, 지금의 민족주의를 정리해 명확하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지금의 민족주의는 내 입장에서 본다면, 어리석은 생각의 산물이며, 어제까지의 역사가 아니고 내일도 반드시 틀린다.
이 「민족주의」는 일/중/한을 죄다 없애버리고, 더욱이 대만까지 영향을 미쳐, 근대의 역사발전과 정치변국(変局)에 깊게 관계하고 있다. 그것을 위해, 사람들은 모르는 사이에 역사와 정치의 꼭두각시가 되어 있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도 자각하지 않고, 자신이 깊은 견식과 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실은 우리들은 어떤 강대한, 그것에 대항하는 사람이 없을 것 같은 체계에 맹목적으로 종속되어 있다. 이 체계가 서양적인 것인가, 동양적인 것인가 혹은 고대 그리스 문명적인 것인가, 미국 문명적인 것인가 라는 판단은 할 수 없지만, 그것은 점점 흡수되어, 변화하고 있다. 단, 우리들이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서양의(명확하게 말하자면, 미국의) 문화를 중심으로 하고 있는 문명체계이다. 한가지 예로 들 수 있는 것은, 1달러 지폐의 뒷면에 있는 「new order」는 이제 아득한 옛날 이야기다. 미국사람이 세계에 대해 구상하기 시작한 것은「얄타협정」 보다 훨씬 빨랐다. 「얄타협정」의 정치흥정을 위해, 동아시아에서 「혼란」이 일어나도록 예전부터 절차를 밟고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나라」 마저 만들었다. 그 덕분에 동아시아의 몇 나라는 서로 얕보거나 증오하거나 한다. (정말이지 서커스단의 사육된 원숭이와 같지 않은가! 때문에 「민족주의」와 「애국주의」는 더없이 어리석은 것이다.) 동아시아의 「혼란」은 때마침 「세계의 질서」의 둘도 없는 부분이 된다. 중국의 공산주의와 혁명수출, 그 후의 냉전질서와 문명분단은 그칠 줄 모르는 폐해를 가져 왔다. 중국은 동아시아 문명의 근원, 동아시아 문명의 중심이었다. 일본은 청나라 시대때 부터 중국을 앞질러, 동아시아의 리더가 되었다. 이것은 실제로 서양문명이 동양문명을 이겨낸 것이다. 그리고 그때 우리들은 어쩔 수 없이 서양문명이 세계의 중심에 있다고 인정했다.
중국과 일본은 기본적으로 서로 배우고 있다. 옛날에는 일본은 중국으로부터 배운게 많았지만, 근대에 들어서는 중국이 일본으로부터 배우는 것이 많아졌다. 이 두 나라는 보통은 사이가 좋고, 때로는 의리가 굳다. 하지만, 일정의 균형이 잡히면 반드시 싸우게 된다. 당나라때 한번, 원나라때 두번(두번의 간격이 짧았기에 한번으로 계산해도 좋다. 물론 이것은 몽골인에 의해 세워진 당시의 원나라가 중국으로 계산되어지는 경우의 이야기이긴하지만), 명나라때 한번, 청나라때 한번 (제2차세계대전은 어떤 의미로는 이 싸움의 연장이라고 생각된다). 이렇게 정기적으로 일어나는 싸움은, 부부싸움과도 같다.(덩샤오핑시대의 일본과 중국은 아직 사랑스러운 연애기간으로, 일본은 당시 거의 전 재산을 다 써버렸다고 말해도 좋을 만큼, 힘을 다하여 중국을 원조했다. 중국도 일본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시장개방을 했지만,) 지금은 이별이야기로 시끄럽다. 고집을 부리고 있지만, 실은 마음 속으로 아직 서로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이것에 대해서는 매일 신문을 읽는다면 알 수 있다. 실제로 일/중의 수뇌(首脳)는 바보가 아니고, 불쌍할 뿐 이다. 「민주」가 화를 초래한다. 민주에 의해 모든 것을 정하면 안된다. 다수의 사람에 의해, 어떤 하나의 사건에 대한 판단은 간단하게 개념화 된다. 그것은 윌 스트릿의 금융에 관한 이야기를 아티스트와 논의하는 것을 상상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한국은 쓰라린 기억을 가지고 있다. 일본과 중국이 전쟁을 시작할 때 마다, 항상 먼저 피해를 입고 마는 것이 조선반도이다. 냉전시대때도, 조선반도를 분리하여 전쟁의 최전선으로 이용했다. 지금도 이 상황은 아직 변하지 않았다. 때문에, 한국의 민족주의는 굉장히 강하고,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많은 고난을 가졌던 국가가 지금과 같이 성숙되어 있는 것에 경복(敬服)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한국사람에게 있어서 중국과 일본은, 두 사람의 「이 빌어먹을 자식」이라고 생각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 위에, 세계의 몇몇 큰 세력을 가지고 있는 나라도 모두「이 빌어먹을 자식」이라고 생각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언제나 한국사람 집에서 싸움을 하고, 조선반도는 거기에 대해 참혹한 대가를 취뤄야만 했다. 실은 나도 그것에 대해 분노를 느끼고 있다. 그 때문에 한국은 문자도 바꿔, 독자의 세계를 만들었다. 단, 객관적으로 보자면 이 부분은 한국 문화 안에서도 애매한 부분이 있다. 정치와 문화는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짧은 역사관으로 보자면 분명히 관계가 있는 것 같지만, 길게 보면 실은 관계가 없다. 이것은 어느쪽이냐면, 역사에 대한 정서적인 반응으로, 백년 후의 것은 아무도 알지 못하지 않는가.

대만사람은 중국사람이지만, 일본사람에게 감사하고 있다. 청정부가 대만에서 건전한 통화시스템을 세우지 못하고 있을 동안, 일본사람이 대만사람에게 근대문명의 발전을 가져다 주었다. 청정부가 대만을 일본에게 넘겨준 것 (당시 「바칸조약(馬関条約)(시모노세키조약(下関条約))」에서, 일본
의 산동반도의 일부 점령을 인정하고 대만을 할여하였다)과, 대만민주공화국 성립 후에 국민당이 대만에 들어온 것은, 대만의 민중에게 「중국문화가 최고다라는 생각을 잊자」라는 감정을 심어주었다. 그들의 반응을 보아도 이것은 확실하다.
이들 문제는, 모두 역사와 정치 분야에 속해, 역사와 정치는 쌍둥이 형제와 같이 분리하여 취급할 수 없다. 정치는 눈 앞의 역사와 같은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이전의 정치에 속해 있다. 그것들은 두개의 거대한 좌표축과 같은 것으로, 모든 것을 정의 한다. 세계의 모든 것이 그 좌표축에 종속되어 있다. 예를들어 부모형제, 국가성립기념일, 사전(辞書)등 한개만이 아니다. 이 좌표계통 안에서 우리들은 「내가 누구인가?」라는 것을 확실히 이해할 수 있다. 이것도 이번 프로젝트의 궁극적 목적이라고 생각되어진다.
어떠한 전쟁변혁이나 역사변천이 있던지, 우리들은 역사의 긴 흐름 속에 있는, 이상한 일관성을 본다. 예를들어 유럽의 히틀러와 나폴레옹 두사람은 유럽의 대륙을 주도한 후에 두가지의 같은 것을 했다. 한가지는 영국에 진격한 것, 다른 한가지는 러시아에 패한 것. 이것이 근대의 구주(欧州)문명의 구성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누가 말할 수 있었는가. (영국은 유로권에 참가하지 않는다.) 그들은 기독교의 문명체계에 속한다.
서로 닮은 데가 있는 역사적 관계를 확대해 보면, 우리들의 과거는 전부 기독교 문명, 이슬람 문명, (실은 기독교 문명에서 갈라져 만들어진)그리스 문명 및 동아시아의 유학 문명, 유대 문명의 사이를 둘러싸고 있다. 이들 문명의 발전은 「문명」과 「전국(戦国)」의 관계와 같다. 때로는 연합하며, 때로는 저항하며, 비틀거리면서 오늘날에 이른다. 그것은 지금도 변하지 않고 세계 문제의 열쇠가 되고 있다. 어떤 사정(事情)의 발생과 발전은, 다시말해 문명의 충돌이다. 가장 핵심에 있는 원인을 구명하는 것은 어렵다.
그렇기에 문명은 역사와 정치에 버금가는 세번째의 죄표축이 된다. 각각의 문명 배경은 세계에 대해 다른 인식과 판단을 가져다 준다. 이 세번째의 좌표축은 서로 주요한 것과 부차적인 것을 담당한다. 대부분의 경우, 정치와 역사는 실용적이다. 예를들어, 일/중의 댜오위 다오(釣魚島) (센카쿠쇼토우(尖閣諸島)),일/한의 타케시마(독도)의 분쟁, 그리고 일본의 북방사도(北方四島)의 분쟁, 모든게 이 두 좌표축의 중간에 속한다. 하지만 문명은 현실의 실용성을 준비하고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길게 보면 그것은 제일 중요한 것임에 틀림없다. 때문에 정치, 역사와 문명, 세개의 척도로, 세계의 「존재」라는 좌표계통을 정의하고, 동시에 서로 견제하며 만난다. 그러니만큼 우리들의 세계는 붕괴하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들이 예술과 예술가를 필요로 하는 요인일 수 도 있다. 물론 음악이나 철학, 시도 마찬가지다.
이상의 것에 입각하여, 우리들은 「동아시아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가까워 질 수 있다. 문명에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힘과, 무지를 줄이는 힘이 있다. 우리들의 문명은 후자의 경향이 강하다. 혁신적인 창조는 여러가지 문제를 해결하지만, 동시에 많은 새로운 문제를 초래한다. 한개의 체계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혁신을 가속화시키는 것만으로, 일정 정도까지 가속하면 새로이 본질적인 문제가 발생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새로운 가능성이 태어나는 것은 무지가 없어질 때이다. 이것은 바로 우리들 동방 문명의 특별한 매력 중 하나이다.
컵의 가치는 재질이나 모양이 아니라, 비어 있는 것에 있다. 물 혹은 와인이 가득 부어지고 나면 컵은 가치를 잃는다. 단, 컵의 내용이 끊기지 않고 갱신되는 것에, 컵은 영원의 가치를 가지게 된다. 하지만 「갱신」과 「혁신」은 다르다. 둘 다 성장과 발전이지만, 다른 부분이 있다.
「동아시아」의 문제에 대해, 우리들이 문명의 관점에서 검토한다면 적극적인 사건을 촉진하는 의의가 있다. 정치와 편협된 역사는 유한(有限)이며 불완전함에 틀림없다. 문명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철학문화관과 세계관이 「텅 빈」것과「가능성의 무한」에 놓여 있다는 것에 있다.

일본과 중국의 자유의 여신 – 순슌씨와의 대화에서

r:ead의 소풍(excursion)때 오다이바까지 갔을 때의 일. 순슌씨가 아무리 기다려도 따라오질 않아, 왔던 길을 되돌아서서 찾아갔더니, 오다이바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을 보고 있었다. 그는 오다이바에 자유의 여신상이 있는 것에 대해 굉장히 놀라워 하며, 어떤 이유로 이곳에 자리하게 되었는 가를 나에게 물었다.
수 년전, 일본–프랑스해에 프랑스가 보내주었던 것으로 나는 기억하고 있었기에, 어슴푸레한 기억으로 우선 대답해주고, 나중에 확인하기로 했다.

그가 뉴욕에서 바로 일본으로 온 것을 알고 있었기에, 더욱 이상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자유의 여신상은 민주주의 상징이며, 미국의 독립기념일과 프랑스혁명일이 새겨져 있다. 자유와 독립을 이루어내, 모든 억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찢겨진 족가와 쇠사슬을 여신은 밟고 있다. 또한, 1886년 프랑스의 프리메이슨으로부터 미국의 프리메이슨에게 보내진 것이기도 하다.*1

하지만, 자유의 여신상은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현재 미국의 상징이다. 패전 후의 맥아더장군을 앞세운 GHQ의 통치에 의한 민주주의를 그대로 받아들인 일본이라는 나라에는 자유의 여신상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순슌씨가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분명히 그러한 면도 없잖아 있긴 하지만, 미국의 상징이기도 하고 헐리우드 영화나 책, 사진, 그림 등 많은 매체에 등장하는 자유의 여신상은, 전후 미국문화에 물들여진 일본이기에 어울린다고 나는 생각한다. 또한, 자유의 여신상이 있는 곳이 매립지, 쓰레기로 인해 만들어진 오다이바이라는 것도 굉장히 일본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다이바의 자유의 여신상은 프랑스의 해인 98년~99년에, 우호의 목적으로 2년간 프랑스가 빌려준 것. 그 후2000년에 복제품이 만들어져 같은 장소에 있게 되었으며, 데이트 코스, 관광 코스의 촬영명소가 되었다. 뉴욕의 것은 거대하지만, 일본의 자유의 여신상은 11m、정확히 파리에 있는 것을 본 떠, 브론즈로 주조한 것이다. *2

하지만, 형태는 다르지만 실은 홍콩에도 자유의 여신상이 있다. 중국어로는 민주여신(民主女神)이라는 이름이다.

원래는 중국 북경의 중앙미술학원(中央美術学院)의 학생들에 의해 단 4일만에 만들어진 것이다. 크기는 10m, 자세나 횃불을 들고 서 있는 모습도 자유의 여신상과 닮았다.
민주여신은 천안문에 모인 학생들의 단식투쟁과 농성의, 반정부의 상징으로서 만들어졌다. 바로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의 상징인 것이다. 하지만 천안문광장에 가지고 들어간 1989년 5월 30일, 반체제의 학생들과는 대조적으로 중국당국은 공적인 장소에 이러한 동상을 가지고 들어가는 것은 중대한 위법행위라는 성명을 발표, 6월 4일 오후5시, 정부가 무저항이었던 시민들에게 향했던 총격이 일어났던 그 날, 민주여신도 그 장소로부터 제거되었다.

그 후 1996년, 홍콩의 빅토리아공원에 이 여신상의 복제품이 세워졌지만, 2010년 정부의 의향으로 철거가 정해져, 시민의 강한 저항과 여러 논의 끝에 현재는 중문대학(中文大学)에 조용히 놓여져 있다. 홍콩에 있어서도 강한 북경의 힘으로 인해 당시 타임즈스퀘어에 이 동상을 전시한 13명은 체포되었지만, 그 후 무죄판결을 받게 된다.
또한, 천안문사건 후에 각 나라로 흩어진 반대파의 중국인이나 찬동자에
의해 이 동상은 현재 천안문사건과 그때 생명을 뺏긴 사람들을 기념하며,
또한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세계 각지에 복제품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한다.
미국에서는 1999년 센프란시스코에, 버지니아 자유공원과 워싱톤DC
에는 2007년에 건립되었다. 중국인 망명자를 다수 받아들인 캐나다에서
는 학생운동의 상징으로서 밴쿠버의 브리티시콜롬비아대학, 켈커리대학,
토론토의 요쿠대학에 설치되어 있다. *3

미국문화의 중심, 뉴욕의 심벌로서의 자유의 여신상、그리고 프랑스와의 우호기념으로 일본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 민주주의와 저항, 천안문사건의 피비린내나는 사건의 메모리얼로서 세계 각지에 있는 민주의 여신. 동과서, 서양과 동양에 각각 다른 이유를 가지고 있는 이 동상은, 민주화나 자유의 의미, 글로벌리제이션이나 착취의 축소, 프리메이슨, 미국문화, 천안문사건 등의 언설(discourse)를 끌어안고 지금도 조용히 우리들을 바라보고 있다.

  1. 自由の女神像 (ニューヨーク) – Wikipedia
  2. お台場に自由の女神があるのはなぜですか? – Yahoo!知恵袋
  3. 民主女神 – 维基百科,自由的百科全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