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관의 재구축 아라카와센 이야기

요즘 시대에서는 신자유주의 하에 국가관리, 언어정치, 자본주의가 섬세하게 발전해 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시아지역은 얼마나 국가민족, 이데올로기, 소비모델을 넘어서서 세계관을 구축한 위에, 현대 아트에 연결할 수 있는가, 끊임없는 모델 사막을 극복하는 것이야 말로 지역의 잠재능력을 끄집어 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최근의 예로, 2014년 3월 8일, 갤러리 도쿄 원더 사이트의 「아시아・아나키・얼라이언스」전시가 시부야, 홍고의 전시장에서 공개되었다. 이 시점은 대만 폐핵데모와 동일본대재해 후쿠시마원자력사고 삼주년과 겹친다. 전람회에서 유엔곽민(袁廣鳴)이 공개한 신작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의 작품은 높은 각도에서 가랑비(鵝鑾鼻)의 원자력발전소 및 랑쇼(蘭嶼)의 방사성 폐물처리장
을 찍은 것이다. 작품안에서는 용두암의 언덕에 조용히 바다를 향해 있는 산양들과 모랫사장에 있는 사람들이 찍혀있다. 이러한 경치를 보고 산양들과 우리들은, 원자력발전소와 방사성 폐물처리장하고 이렇게 가까이 가까웠나 라고 나는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랑따오(朗島)초등학교, 바다와 파도, 녹색의 언덕이 사람없는 조정실을 에워싸고 있다. 마치 유령의 집처럼, 소름이 돋는다.

이 작품은 원자력 반대의 많은 목소리와는 달리 굉장히 조용하다고 말 할 수 있다. 이러한 순수한 목소리는 지금 동경의 한쪽에서 원자력 반대에 대해 커다란 움직임이 보여지고 있다.

쳉제렌(陳界仁)의 『로경도』에서는 대만 고웅 하바의 스트라키 노동자가 「세계의 노동자들은 우리들의 동료다」라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번에 쳉씨의 작품도 바다를 건너 일본에 와서, 전시장에서 주목을 받았다. 작품에서 아시아・아나키・얼라이언스의 구체적인 이미지가 느껴졌다. 개념상으로는 세계관의 예술성을 재구축하고, 대만이 최근 수십년간에 현대 아트에 있어서 세계관 재구축의 대처방법과 연관된다. 그 반면, 행동상에서는 아시아민족의 벽을 부수고, 대만에서 한발 나아가고 있다. 이번 이벤트는 우다쿠엔(吳達坤)씨가 큐레이터를 담당하고, 2년간에 걸쳐 드디어 현대아시아와의 연계를 지었다.

나아가, 중년세대의 야오주이청(姚瑞中) 및 젊은 세대의 창리엔(張立人), 쳉징얀(陳敬元), 쳉찡야오(陳擎耀), 투페이신(투페이신), 예쳉유(葉振宇)라고 하는 아티스트도 각광을 받았다. 그 중에서 창리엔씨의 『전쟁의 성』은 도시시스템을 그리는 세세한 양상을 사용해, 세계의 경찰인 미국에 콘트롤되고 있는 대만제국을 비판했다. 이러한 세계관에 대한 생각은 정말이지 「애니메 세대」의 대만에 있어서 그레이드 업된 버젼이다. 더욱이, 갤러리 도쿄 원더 사이트의 홍고 전시장에서는 투페이신씨의 신작 『세계의 박람회』(World Expositions)은1970년의 오오사카, 1975년의 오키나와, 1985년의 츠쿠바, 1990년의 오오사카, 2005년의 아이치에서 사용한 일본만국박람회의 선전 포스터를 원고로 한 것이다. 인터넷에서 모은 세꼐의 대사건의 문장과 사진을 프린트아웃해서, 배경을 투명화하게 해서, A4의 원고에 붙혀서 만든 작품이다.

신작에 대해서, 투페이신씨의 전작 『옥산미로』애니메시리즈는 과거의 박람회사진을 축소해서, 세계의 정보를 모아 플랫폼으로 한다. 여기에서는 카세르에서 개최된 13번째의 『다큐멘터』에 있어서, Geoffrey Farmer가 1935년부터 1985년까지의 잡지 『Life』에 실은 『잡초의 잎』(Leaves of Grass)의 사진을 도려내는 것과 같은 수법을 사용했다. 새로운 조합으로 인해, 원래의 미국 라이프 스타일이 뒤집혀, 일본이 만든 동아시아를 기본으로 한 세계관이 이루어졌다. 미국에 있는 신전위나 팝아트 대신에, 대만과 동아시아에서의 세계관의 에피소드가 대신했다. 물론 냉전의 역사에서는 미국의 요소도 번번히 등장했다.

투페이신씨의 박람회시리즈 작품이 3월 12일「r:ead:동아시아와의 대화」에서 발표되었다. 「도상의 표상」에 뛰어났으며, 색의 배치도 산뜻한 작품이었다. 일본 종래의 소박한 미학을 바탕으로, 새로운 현대의 요소가 들어가 있다. 페이신씨의 이 작품은 Anselm Kiefer의 독일 낭만주의에 넘쳐나, 차가움과 허무함에 넘쳐난 2차세계대전에의 반성을 그린 회화와의 사이에 큰 아시아식의 콘트라스트가 생성되었다.

이번 기획에 참가한 덕분에, 투페이신씨를 비롯해 일・한・중의 아티스트, 큐레이터와 동경에서 이야기 할 수 있었다. 이것을 계기로, 비평가로서 어떻게 아티스트의 기존 작품에 영향받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관을 재구축 할 수 있는가 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세계관의 재구축은 특정 예술문화를 바탕으로 해서, 세계사의 관점에서 새로운 인스필레이션을 끌어낼 필요가 있다.

대만에서의 종래의 예술문화에대해서, 이러한 아드바이스를 했다. 1980년대의 대만영화는 아시아 및 사구의 평론가에게 주목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가운데, 이 시대의 대만영화를 세계관 재구축의 양식으로 생각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동경에 오기 전에, 인터넷에서 허우샤오시엔(蕭菊貞)감독이 만든 다큐멘터리
「백합기획-대만 신영화 20주년」(2002)을 보았다. 그것을 계기로 대만의 신영화세계에 들어섰다. 그 시대를 돌아보면 그 시절의 시대감, 그 시대의 제작공정, 정치 심사와 문화 투쟁이 상세하게 남아 있다. 450만 TWD보조금으로 만든 「광음의 이야기」(1982)를 시작으로 1987년 대만 신영화 감독선언 발표까지, 오념진(吳念真), 소야(小野),호우샤오센(侯孝賢), 에드워드양(楊德昌),
증상상(曾狀祥), 쵸유키(張毅), 테첸타오(陶德辰), 가일정(柯一正), 주톈원(朱天文)은 훌륭한 문화를 만들어 내었다. 그들은 제한된 환경안에서, 당시 국민당의 노동조합시스템과 등급평가시스템에 직면하여, 그리고 명기(明驥)(당시 대만중앙영화회사의 제너럴매니저, 대만신영화의 아버지)의 노력에 의해 그들을 통합니켜, 이러한 문화의 기적을 일으켰다. 그래도, 아시아나나 세계의 시점에서 한번 더 대만 신영화를 검증해보면, 또 새로운 평가가 나올 것이다.

대만 신영화가 시작되고 30년후, 다큐멘터리 감독 왕경유(王耿瑜)는 한번 더 신영화를 검증해보았다. 다른 대만 신예 아티스트처럼 그녀가 편집중인 필름을 보면, 거리를 두지 않으면 새로운 관점으로 사물을 볼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새삼스럽게 발견한다. 신영화에 관련된 논쟁을 20년후에 한번 더 검증해 보면, 『OUR TIME OUR STORY – 20 YEARS’ NEW TAIWAN CINEMA 』이라는 다큐멘터리와 같이, 굉장히 우리들을 다른 결론으로 안내한다. 그러나 혹시 이 시간은 30년이 지나면, 신영화의 미학가치는 객관시점의 변화 혹은 신영화 안에서 나타난 아시아 의식과 세계의식의 특이점이 될 것이다.

왕경유가 편집한 최초 버젼의 영상 중에, 일본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是枝裕
和), 프랑스감독 올리비에・아사야스, 중국감독 왕샤오빙(王小兵)과 지아장커
(賈樟柯), 이탈리아 큐레이터 뮬라, 일본영화대학학장 사토우타다오(佐藤忠
男), 홍콩감독 슈치(舒琪), 아티스트 아이웨이웨이(艾未未), 그리고 아르헨티
나의 영화 관계자까지, 모든 사람들은 이 대만 신영화가 시작된지 30년 후, 신영화가 그들과 아시아에 대해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인정, 신영화 안에서 의 세계의식에 대해 긍정적으로 인정했다. 이 세계 중, 어떤 한 세대의 문화인은 대만 신영화를 접촉하고 영향을 받아, 당대 화인의 생명을 보였다.

대만영화 조성금 시스템, 비지니스 가치, 혹은 비지니스 밸런스 등의 외부 인자의 시점에서 보면, 대만신영화의 내부가치를 읽을 수 가 있다. 이것은 내가 아시아와 세계의 시점에서 대만신영화를 검증 할 때 발견 한 것이다. 과거, 우리들은 그러한 외부인자를 둘러싼 논쟁 중에, 마켓 동향에 대한 주목은 결코 결여되지 않았다. 우리들이 결여되어 있는 것은 세계관 일 것이다. 그 결과, 아시아 역사, 혹은 세계사의 시점에서 한번 더 1980년대의 대만신영화를 검증하는 것이, 최근 나에게 있어 재미있는 과제였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왕경유와의 대화 중에, 자신의 어린시절에 대해 이야기를 하였다. 당시, 가족전원이 바나나나 파인애플을 먹을 때, 그의 아버지는 언제나 「역시 대만 것이 더 달구나」라고 말씀했다고 한다. 그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아버지의 기분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른이 된 어느 날, 우연한 기회로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작품 『A Time To Live, A Time To Die』를 보고, 그는 드디어 이해했다고 했다. 그의 아버지의 말씀 중에는, 자신이 태어나서 청년시대까지 대만에서 살았던 기억, 행복, 그리고 대만이라는 고향에 대해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아버지는 태평양전쟁 중에, 중국 동북으로 가서 일본에 돌아 온 경력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이야기를 따르면, 아시아성이라는 것은 영화 안에 나타난 패션 프루트에도 잠재되어 있을 수 도 있다고 한다.

인터뷰 중에, 지아장커는 이렇게 말했다. 「신영화는 확실하게 끝이다. 그리워하며 떠올리는 것은 아무 것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어떤 영화에 속해 있는 생활 스타일까지도 신영화와 함께 없어져버리는 것은 아쉽다.」 이 이야기는 「신영화는 이제 죽었다, 신영화는 이제 끝이다」라고 중얼거리고 있는 우리들에게, 한번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찬스를 제공한다. 도대체, 「영화에 속해 있는 생활 스타일」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영화 생산방식의 갱신, 허우 샤우시엔(侯孝賢) 감독이 영화를 위해 땅을 팔고, 에드워드 양 감독이 차륜 소리를 위해 심야 양명산에 가서, 롱테이크로 온몸으로 연기하지 않으면 안되는 특이한 상황 등 이다. 또, 에드워드 양감독이 『Boys from Fengkuei』라는 허우 샤우시엔감독 영화를 보고, BGM을 재제작을 결심한 것도 그 생활 스타일의 한 가지이다. 당시 도시와 시골의 현실상황을 충실하게 재현, 촬영 주변의 환경소리를 충실하게 수록, 일본어, 대만어, 그리고 객가어(대만방언의 한가지)를 대사로 사용하는 등. 이러한 것 중, 「현재를 주목하면서 현실에서 벗어나, 영상시점에서 세계를 보다」는 것을 할 수 있다 라는 영화적인 생활스타일이 보였다. 말을 바꾸면, 이 생활스타일은 일종의 강렬한, 개인적인, 창조적인 세계를 만드는 스타일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감독은, 허우 샤우시엔감독과 오즈 야스지로우감독의 사이에 있던 미학 대화를 계승하고 있다. 프랑스감독 올리비에・아사야스는 에드워드 양 작품 중에, 런던, 파리, 혹은 뉴욕등에서, 인간세계에서의 공통의 것을 읽을 수 있다. 이러한 깊고 창조적인 대화와 현대인간이 공진하는 것은, 진실한 새로운 아시아관과 세계관일 것이다. 밤에 나는 아라카와센(荒川線) 안에서, 이러한 것을 생각했다. 그와 동시에, 나 또한 허우 샤우시엔감독이 2003년 오즈 야스지로우 백년명복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영화『Café Lumière』의 내용을 생각했다. 영화 안에서, 히토토 요우(一青窈)가 연기한 이오누에 요우코(井上陽子)는, 이름도 모르는 대만인의 아이를 임신하였다. 그녀는 전철 안에서 도대체 어떤 고독을 느끼고 있는가.

만국박람회

이번r:ead 레지던스・동아시아・다이얼로그 프로그램에 있어서, 나는 「세계박람회」를 원점으로 콜라쥬작품을 제작했다. 먼저, 일본이 1851년 이후, 주최했던 세계박람회의 선전 포스터를 모았다.「인류의 진보와 조화」를 테마로 한 1970년 오오사카만국박람회, 「바다-그 바람직한 미래」를 주제로 한 1975년 오키나와국제 해양박람회, 「인간・이주・환경과 과학기술」을 테마로 한 츠쿠바국제과학기술박람회, 「인간과 자연」을 테마로 한 1990년 오오사카국제꽃과식물박람회, 「자연의 예지」 를 주제로 한 2005년 아이치만국박람회를 포함했다. 그리고 포스터를 A4사이즈의 영상으로 표현했다. 그 위에, 각 박람회의 해당년도에 일어났던 사건의 영상을 붙였다. 영상에서 넘쳐나오는 여러가지의 메세지를 같은 시각평면에 겹치게 하였다. 이하는 박람회와 일부 사건의 대조 리스트이다.

1970년-「인류의 진보와 조화」/비틀즈 해산/PFLP 여객기 동시 납치사건/켄트주립대학 총살사건/베트남전쟁 반대운동/플로피 디스크 개발/소련 우주조사기 베네라7호 금성 도착/ 중화인민공화국 최초 인공위성 동방홍 1호 발사성공

1975년-「바다-그 바람직한 미래」/레바논 내전/마이크로소프트사 설립/초기 베트남난민 홍콩입국/국제부인의 해/아폴로 테스트계획 집행 개시/베트남전쟁 종전/폴 포트 캄보디아 수상 취임

1985년-「인간・이주・환경과 과학기술」-타이타닉의 잔골 발견/네바드 델루이즈화산폭발, 알메로 비극/남극상공 오존홀 발견/고르바쵸프 소비예트공산당서기장 취임/새로운 맛의 코카콜라 발매/디스커버리 채널 방송 개시/AIDS혈액 검사 인정

1990년-「꽃과 식물, 인간 생활의 관계에 대해 21세기를 향해 윤택한 사회의 창조를 꿈꾼다」-3월학운(三月学運)/독일 통일/넬슨・만델라 석방/허블우주망원경 발사/레흐 바웽사 폴란드 대통령 취임/예맨 통일/고흐 「의사 가세의 초상」 사상 최고의 가격으로 낙찰

2005년-「자연의 예지」-허리케인 카트리나 뉴올리언즈 강타/런던 77 동시폭발 사건/인도 절에서의 사상(死傷)사건/미군 레드 윙 작전 실패/이탈리아 여성기자 스그레나씨 구조/고이즈미 준이치 내각총리대신 주임/캐나다 세계 최초 동성결혼 합법화

일본이 주최한 국제박람회의 포스터를 통해서, 세계로의 상상을 표현했다. 그것이 현실세계의 사건과 호응하기도 했지만, 비꼼과 대조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번 작품 안에는, 상상의 뒤에 숨겨진 시대의식과 분위기에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이번 창작을 통해 동아시아를 기반으로 세계관을 구축한 일본을 관찰했다.

아시아관점의 출현은 서양중심론과 큰 관계가 있다. 아시아개념은 기독교문명과 산업혁명을 배경으로 한 서구개념과 다른 다원성・비통일성 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번 레지던스에서, 예술영역에 있어서의 아시아 문제에 대해 두가지의 생각이 있다. 그 하나는, 현대예술에 있어서 아시아의 관심은 왜 필요한가. 지역문제가50~60년에 많이 언급되었는데, 지금의 논의는 새로운 방향을 찾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예술가인 나는「예술」을 순수한 개념중심으로서 아시아를 생각해야한다고 느낀다. 다른 한가지는, 현재 우리들이 다른 제국의 형태를 만들 필요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90년대부터 시작된 비엔날레 풍조에 의해, 아시아관념을 구축, 유럽관점에서의 탈출, 새로운 언어권리를 획득한 의도가 확실해 질것이다. 이러한 아시아화상(画像)통합의 필요성의 유무, 혹은 차이가 존재하도록 놔두는 것이, 혁신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동아시아, 동시대, 우리가 해야할 행동은 무엇인가

2013년 12월, 2014년 2월에 있었던 r:ead는 중요한 시기에 중요한 사람들이 함께 했던 중요한 자리임에 틀림이 없었다. 4개국으로 부터 참석한 4명의 젊은 아티스트와 4명의 젊은 큐레이터, 레지던시 디렉터Chiaki Soma, 그리고 눈부신 활약을 해준 스텝들은 오랜 기간동안 머리를 맞대고 동시대의 예술적, 사회적 쟁점들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과거의 예술적, 사회적 시스템을 수용하면서도 정반합 적으로 반발하고자 하는 적당히 젊은 이들의 발언과 텍스트 들에서 강한 동지의식을 느꼈다.

오늘은 2차 세계대전이 공식적으로 끝난날로, 내가 있는 네델란드 암스테르담 및 유럽 국가들에서는 조촐한 기념 행사들이 열리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로 세계는 평화로운 세월을 보내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 인류가 해결해야할 문제들은 산재해 있어 보인다. 그 사이 한국에서는 세월호가 침몰하고,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어린 생명들이 덧 없이 목숨을 잃었다. 너무도 애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유구한 시간의 흐름속에 잠깐 세상에 머물다 가는 한 인간의 존재에 불과한 나로서 원대하게 이 세상을 바꾸고 싶다기 보다는, 내 삶을 살아가는 동안 어떻게 무엇을 하며 살아야가야 하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주는 사건이었다. 즉, 가치 있는 일을 하다 죽고 싶은 것이다.

만약 특정인이 진정한 가치를 고민하고 추구한다면, 그것이 예술적 가치이든, 사회적 가치이든, 정치적 가치이든, 그 행위와 노력은 박수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내가r:ead에서 이야기 하고자 했던것(지금도 계속 되고 있지만)도 결국은 같은 맥락에서 시작되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나는 개인적으로 스스로의 가치를 “긍정적인 변화”라고 정의하고자 한다. 이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고, 개인과 집단의 에너지도 변화에서 발생된다고 생각된다. 정체는 곧 죽음을 의미한다. 인간의 삶은 변화하는 에너지로 존재한다. 이는 열 역학 제 1법칙의 그것과도 일맥 상통한다. 인류와 사회의 집단들도 이러한 변화의 단계에 엔돌핀을 발산해왔다. 무엇인가 변화하고, 일어나고, 희망을 품을수 있을때 사회의 구성원들은 행복을 느낀다. 인간의 물질문명은 이제 변화의 단계에 왔다고 판단되어 진다. 처절한 고민에 의해 그 변화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흐를수 있게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r:ead에서 하고자 했던 리서치는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나와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학술적, 행동적, 예술적 행위를 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앞으로 인생의 방향성을 잡아보는 것이었다.(이를 작업의 방법론을 정립하는 행위로도 이야기 할 수 있을것 같다.) 이번 달 초부터는 같은 리서치를 한국에서 진행하고 있다. 리서치는 스스로의 아카이브로 존재할 뿐만아니라, 적극적인 활용과 배포를 통해 공유할 예정에 있다. 아울러 리서치를 하는 행위가 다층적인 문화 예술의 교류로서 존재한다는 기대감도 갖고 있다. 아직은 미완성인 리서치를 계속하며, 리서치가 어떻게 긍정적인 Platform으로 변형 될것인가 함께 고민해본다.마치며r:ead의 디렉터, 스텝들, 무한한 영감을 준 참가자들에게 다시한번 고개숙여 감사드리는 바이다.

네델란드 암스테르담에서

r:ead를 통한 생각 인생은 언제나 다른 곳에 있다

자신이 대체로 트러블을 겪을 때, 이 곤란을 잘 극복한 사람에게 방법을 배우고자 한다. 이러한 생각은 개혁의 근원으로서의 타산지석을 원하고, 그것에서 이상적인 유토피아를 구축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오늘날에도 우리들에게는 하나의 굉장한 아름다운 유토피아가 있다. 반대로, 인간자신이 꾸며놓은 지나온 선명한 과거에 몰두하고 있을 때, 자신보다 나쁜 경쟁상대을 선택적으로 공상하고, 단지 선명한 빛에 의해 만들어진 그림자만 볼 뿐, 현실을 바라보지 못하고 자신을 마취시키는 것은, 마치 아편전쟁 직전의 중국 청나라가 영국에 대해 무지했던 것과 같다.

이상화된 타자와, 타인의 제도는 반드시 지리적 혹은 공간적인 거리 뿐 만아니라, 시간적인 거리의 경우도 있다. 따라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무언가를 원할 때는 비판적인 힘도 있다. 찰스1세의 경우, 영국사람은 이 폭군의 통제를 빨리 무너뜨리려고 했으나, 그의 목이 잘린 후, 그가 살아있었던 시대를 반대로 그리워하는 경우도 생겼다. 프랑스대혁명에서 죽임을 당한 루이 16세와 황후의 경우도 같다. 황후가 사형집행인의 다리를 밟은 후 말한, 미안합니다 일부러 밟은 것이 아닙니다, 라는 말은 몇년 후 반대로 사람들의 인상에 남았다. 그 말에서 암시된 수양(修養)은 대혁명이 일어난 모든 것과 비교대조되고 있다.

인간과 동물이 구별되는 것 중 하나를 말하자면, 언제나 불만을 느끼는 것이다. 따라서, 다른 것 혹은 다른 시대가 지금보다 좋았다고 사람들은 때때로 생각한다. 또한, 그러한 것은 역사 안에서 순환적으로 반복되고 있는 것 같다. 그렇기에, 혁명이라는 말이 영어로 순환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는 것에 이해를 더한다.

왜, 언제나 과거 혹은 먼 곳에서 타산지석을 찾는가. 당연한 것이지만 그 원인의 하나로서, 일체의 사물에 대해 비판하는 것에는 어떤 단차가 필요하며, 이 단차는 크면 클수록 현실을 뒤집어 업는 힘이 있다. 따라서, 사람들은 어떤 흑백의 대립을 구축하고, 완벽하게 가까운 사람과 아무것도 아닌 현실에 대항하는 경우를 만드는 때도 있다.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의 나라를 열렬하게 비판하면서, 무지인 타국의 것에 대해 너무나도 찬미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들어, 현재 동양의 나라들이 서양이라는 것 자체가 아니라, 서양에 대한 어떤 이상(理想)에 더욱 의지하고 있다. 때로는 사람들이 타인에 대한 찬미라는 것은 그냥 수단의 하나인 것임을 잊어버리며, 모르는 사이에 진지하게 되고, 수단을 목적으로 착각하고, 따라서 냉정하게 현실과 자기자신을 바로 바라보는 것도 잊어버리게 된다. 실은, 우리들의 진실된 의도라는 것은 서양을 찬미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통한하는 것이다. 피에르 부르디외가 주장한 것처럼, 도시와 시골도 항상 같은 도리이다. “하나의 긍정할 수 있는 것이 있고, 그것은 농민의 입장에서 혹은 농민을 위해 농민을 생각한다. 농민의 미덕과 농촌을 찬미하는 말은 그냥 도시의 노동자의 악습과 도시의 악죄를 비판하기 위한 에두름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

이것은 모든 인생이 다른 곳에 있기 때문이다. 원래 인간은현실과 떨어진 다른 곳에서 만족감을 용이하게 얻을 수 있기에, 그 다른 곳이 유토피아가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을 들추어내어 이 유토피아가 사실이 아닌, 건설성도 부족함을 지적하면, 문제점도 나타난다. 그러한 구축을 반대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비평가들은 그들이 사실을 정정하고 있다고는 생각치 않고, 반대로 그들이 현실을 바꾸려고도 하지 않고, 사람마음을 얻지 못하는 기존의 질서를 변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비평가에게 있어서 원래의 의도는, 어떤 현실을 넘어서 있는 질서의 힘을 빌려 현실을 반성, 비판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 안에서 조류에 휩쓸리지 않고, 세상의 큰 힘에 죄지우지되지 않고 독립성을 가진 생각을 하는 것은 아주 고마운 일이다.

미국에 가본 적도 없는 사람은 고정된 이미지를 통해 미국을 상상 할 수 밖에 없다. 미국사람이 일하는 모습에 대해, 우리들은 이미 선입관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미국을 생각할 때(미국사람이나 그 과거), 실제로는 이러한 이미지로‘미국사정’구성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은 이러한 심리로 자신의 인식 안에 생각 할 수 있는‘세계의 모양’을 만들어 낸다.이것은 이성의 한계이지만, 고대와 전통에 대해 분명한 자기인식에 따른 것이다.

고대의 것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마치 별이 총총한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듯 하다. 수 많은 별은 전혀 다른 거리와 크기이지만. 우리들의 눈에는 마치 같은 빛이다. 또한, 그 ‘넓은 곡면’은 ‘하늘이 둥글고, 땅이 네모’와 같은 당연한 것으로, 인류의 본능에서 온 반응 같은 것이다. 이런 배경아래, 별하늘의 무한한 거리감이나 층별감을 느끼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현대 중국인의 고대에 대한 상상은 명조중기의 이미지를 기본으로 형성된 보편적인 인식이며, 그 중에 새로운 일들이 생성되었다. 다시말해, 이 단계의 발전은 중국사람의 고대인식이 만들어 낸것으로, 전통문화에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리고, 현시대에 가까운 이미지를 도구로서 옛날의 상상을 만든다. 특히, 전통분열의 시대에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심볼”을 발견하지 못해, 고대를 “재편성” 하거나 만들었다. “문화공작”이라는 것은 실제로 여기에 포함된다. 대체로 현대인은“전통문화”로의 이해는, 그 시기의 역사인식에 따른다. 그 이전의 시대였다면, 인조적인“신문화”라고도 했을 것이다. “고대”라는 말과 같이, 보편적인 전통도 어떻게 보면 변화나 깊이가 덜 한 단일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복수이다.

더욱이, “고대”와“전통”의 내부에서도 상호모순과 경쟁이 있다. 이 가려진 관점은“전통”이 전체적으로 부정되고, 또한“고대”의 보편적인 낭만인식에 원인이 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들이 상상한 그 “고대”는 옛날부터 쭉 변화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특히 현재의 이“조각시대”안에서.

지도의 은유

우리들은 긴 시간, 지도라는 존재에는 익숙해져, 지도는 단지 세계를 추상적으로 재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잊어버리기 쉽다. 우리들은 주위의 세계에 대해 숙지하고 있을 수 도 있다. 하지만 그 숙지라는 것은 단지 추상과 이미지만을 잘 알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식이라는 것은 사전에 가상(仮想)한 표상도 포함한다고 생각한다. 전자(前者)는 표면적이지만 살아있다. 한편, 후자는 심각하지만 개념적이다.

단, 리얼한 경치를 감지하고 있는 사람과 비교해, 지도를 볼 수 있는 사람은 보다 높은 레벨의 사고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사람은 추상적인 점 혹은 선, 면으로 전자라는 사람이 상상 할 수 없는 공간의 결구(結構)관계를 감지할 수 있다. 지도라는 것은 일련의 기호의 응축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점으로 하나의 마을 혹은 동네를 표시하고, 하나의 선으로 하나의 도(道) 혹은 강을 표시하고, 하나의 파란색의 면은 바다를 표시한다. 지도를 만드는 지속적인 노력자체는 일종의 충동이라고 생각한다. 이 세계를 그대로 표시하고, 추상적인 기호를 통해서 세계를 인지・파악・콘트롤 한다. 그렇지만, 아티스트에 대해 이러한 준비를 겸하기를 요구한다. 이것은 다빈치의 훌륭한 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세계”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시대, 다른 사람에게 있어, 그 범위와 의미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많은 사람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혹은 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는 세계를 지도로 표현하고, 이것은 인지능력의 제약이며, 추상과 이해의 제약이기도 하다. 중세기의 사람은 미국대륙을 그릴 수 없었고, 예루살렘이라는 성역을 세계의 중심에 두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그렇게 세계를 구상하고 이해하고 있기때문이다. 그 시대에 있어서, 지도는 신이 모이는 곳이다. 고대 지도를 돌이켜보면, 비례와 척도가 조금 비뚤어져 있고, 어딘가 부족하게 느껴지지만, 그것이 그 시대의 사람이 보고 있는 공간일 수 있다. 지도의 지리에 관한 상상은 언제나 있는 관념과 사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실은 이 미묘한 심리는 현대에 있어서도 같다고 생각한다. 중국이 출판하고 있는 세계지도에 있어서도, 중국은 세계의 중앙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유럽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지도를 보면, 중국대륙・대만・조선반도・일본열도는 우측의 구석자리에 위치하고 있고, 그리고 형태가 비뚤어져있으며, 세계의 끝에 부들부들 떨면서 서로가 의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고대에 있어서 지도를 보는 것은 아직 소수의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권리이었을 수 있다. 그러나, 인쇄술이 보급되면서 그것은 모든 사람의 경험이 되었다. 이 새로운 시대에서, 세계는 세로로 세워져 있어 위로 늘어나거나 아래로 추락하거나 하는 다층적인 공간이 아니라는 것이 알려진다. 천국도 지옥도, 평평한, 눈 앞에 전개해 가는 넓은 면(面)이다. 지도를 만드는 기술의 발전에는 두 가지의 흐름이 있다. 한 가지는, 지도의 측량을“최대한 커다란 다양성으로부터 어떤 종류의 이성적이며 조작가능한 구조”로 하고, 측량하는 측과 측량되는 측의 사이에 주관적인, 혹은 객관적인 양극화된 개념을 형성한다. 그래서, 세계는 “고향”이 아니고, “거처”가 된다. 세계도 국가도 독립된 실태화한 이미지가 된다.
한편, 또 다른 흐름은 더욱 알기 어렵게 된다. 측량기술의 발달에 따라, 지도가 표현하고 있는 세계는 진짜 세계라고 사람들에게 인식시켜주기 위해 만들어진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유명한 꿈이 있다.

그것은 지도를 진짜 세계와 같은 크기의 비례로 만드는 꿈이다. 지도는 리얼한 것이 아니고, 가상의 것이다. 그러나, 이 꿈이 실현되기 전에 세계에 대한 과학적・정확적・완전적・진실적・보편적인 표현이 되었기에, 세계자체가 어떤 거대한 지도로 상상되어 왔다. 그리고 지금, 세계는 지도가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존재하고 있다고 사람들은 깊이 믿고 있다.

이러한 것은 우리들의 수단, 예를들어 가위나 쇠망치에 대한 인식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주 적절한 인식은 사용하는 것을 통해서 얻은 경험에서 생성되는 것으로, 수단 그것이 형태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카프카는 “자신의 무지와, 영원히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것을 인식시켜주는 것은 여행 밖에 없다”고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으로 리얼과 가상과의 경계선이 애매하게 되어버려, 이 둘의 관계는 반대로 되고 말았다. 지도는 진짜의 세계처럼 만들어야 하는것이 아니라, 진짜의 세계는 지도가 나타내고 있는 것처럼 존재해야 한다는 것으로 되고 말았다. “종이에 적혀져 있는 힌트에 많이 의지하여 물건을 찾는”것처럼, 모든 리얼과 재현의 사이에는 틈과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 리얼한 사람이나 경치가 사진처럼 아름답지 않으면, 우리들은 이렇게 현실 세계에 대해 실망하거나 한다. 그렇기에, 지도에 의지하며 세계를 알려고 하는 사람도 물론 그렇게 생각 할 것이다. 지도는 기호가 농축되어 생긴 추상적인 평면도로, 틀린 거리감과 공간의식을 만들어내는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정학(地政学)”이라는 것은 “지도학”으로 부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거기에 모든 “애국주의”라는 것은 “나라”를 사랑하고 있는 것 보다는, “형태”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탈리아 사람이 사랑하는 것은 한 켤레의 부츠이고, 중국사람이 사랑하는 것은 한 마리의 닭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확실한 형태에 비해, 진짜 현실은 반대로 추상적인 것이 되고 만다.

지도가 나타내고 있는 것은 현실이라기 보다 사람들의 생각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현실이라고 인식되어 사람들을 틀린 방향으로 인도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들어 지도에서 둥그런 기호로 표시하고 있는 마을은, 현실에서도 같은 상황에 있을 거라고 착각을 하게 한다. 이것은 정치지도를 만들 때, 제일 알기 쉽다. 현대인이 그린 역사 지도 위에, 언제나 확실한 경계선이 있다. 마치, 그것은 역사상에 정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현대에 있어서 국경선과 정치구역의 표시방법에 관해, 우리들은 이러한 착각을 잘한다. 국경선의 양측에는 눈과 먹과 같은 차이가 있거나, 각기 내부는 균질한 실체가 존재하고 있어, 이것들의 실체는“국가”라는 것이 형성 된, 아주 오래 전에 존재하고 있던 것이 아닌가 라고. 실은, 예를들어 소말리아와 같은 국가는 어느 시점에서 보더라도 국가로서는 이미 존재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아프리카대륙의 정치 지도위에는 등장하고 있다. 마치, 그 토지에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한편, 네덜란드는 현대인이 복원한 고대로마의 지도에서 로마의 경계가 두개로 갈라져 있다. 하지만, 지금의 지도에서 보자면, 로마라는 나라 자체가 지도에 존재하고 있지 않고, 거기에 있는 것은 네덜란드 뿐 이다.

사람이 경험한 세계와 세계의 실체 사이에는 본질의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짜의 세계는 우리들이 체험하고 있는 세계와 같은 것일 거라고 생각되어진다. 아무리 좌절을 겪더라도 그 생각을 단념하려고 하지 않는다. 사람은 세계에 대해서도 이렇게 취급하고 있기에, 서로가 만날때는 더욱이 같은 취급을한다. 이것은 선천적인 “문명의 오만”이라고 생각한다. 가끔씩은 운이 좋아, 지리의 거리를 틀리게 계산하여, 콜롬버스는 생각지도 못한 신대륙을 발견했다. 가끔씩은, 웃으면서 가볍게 이야기 하기도 한다. 19세기 초기, 누군가가 북아메리카대륙의 지도 서남부에 “미국대사막”을 그린 이유로, 당시의 개척자는 자신이 지금부터 비옥한 대평원을 넘으려고 하는 사실을 모르고, 사막을 건너기 위한 준비로 낙타까지 미리 준비한 일이 있다.

근대가 되면, 지도는 단지 재현의 수단 만이 아니라, 개조하기 위한 수단도 된다. 프랑스는 1789년 후에, 역사 지리에 대해 하나도 생각치 않고, 나라를 하나의 블록으로 분리하여 관리한 것처럼, 열강한 아프리카대륙, 아메리카대륙을 제패 할 때, 지도 위에 그대로 선을 끗고 경계선을 만드는 경향이 있다. 더욱이, 계획설계도를 만들 때도, 현지의 사정을 참고하지 않고 도지(図地)로 선을 끗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실은 권력의 요구이기도 하다. 현실은 지도처럼 존재하고 있고, 우리들은 지도 위에서 그 토지를 변화시키거나, 완전하게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L.A는 도시계획에 실패한 전형적인 예가 된다. 루이스 마운트배튼의 방침은 인도・파키스탄 분리독립과 그 후의 전쟁에 직접 연결되어, 간접적으로 방글라데시라는 새로운 국가도 만들어내었다.

그 때문에, “동아시아”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이것은 지도 뿐 만이 아니라, 모른 사이에 사람들의 “소원”으로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권력”을 가지고 있는자에 있어서는 더욱이. 마지막으로 보충하고 싶은 것은 “동아시아”라는 곳은 또 하나의 이름이 있다. 그것은“극동”이라는…
2014년 3월 10일 동경

r:ead, 내셔널리즘, 국가, 동아시아, 순슌 그리고 다시 r:ead

아시아정세가 긴박한 가운데, 그 긴장의 소용돌이 안에 있는 나라의 사람들이 모인 이 레지던스는 자극적이었으며, 또한 여러가지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영토문제, 차별문제, 외국인 배제운동, 소수민족의 탄압, 내전, 이것들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영토문제에 관해서는 중국, 한국, 일본이 근래 수년간 큰 문제로 여겨지고 있다. 만약, 그 밑에 굉장한 자원이나 유전이 있다고 해도, 일반시민이 그 은혜를 먼저 받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방이 돌 뿐인 몇백미터의 섬을 둘러싸고 싸우고 있는 모습이 바보처럼 느껴진다. r:ead에 참가했던 우리들은 아트커뮤니티라는, 내셔널리즘보다는 더욱 친밀한 작은 커뮤니티에 소속되어 있었기에, 그러한 험학한 분위기는 전혀 없었다. 재미있는 시간을 공유하고, 개인적인 것부터 큰 화제까지 논의를 했다.
나는 홍콩에 살고 있기에, 아시아 나라의 시선으로 일본을 볼 때에 자랑스러운 것도 있지만 부끄러운 것도 많다. 우리나라의 수상이, 선거표 획득을 위해 하고 있는 야스쿠니신사 참배는, 내정과 미국만 신경쓰면 되었던 전후부터의 관습으로써, 일본정부의 나쁜 일면을 드러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그만 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나 스스로 이미 자국에 대한 애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애국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일본은 단일민족이라는 신화*1나, 국가나 기업을 가족의 연장이라고 보는 “가족”적인 생각이 수백년이나 계속되고 있기에 특히 강한 것일까? 하지만, 영토문제에서 분신자살까지 하는 사람이 타국에도 있고, 올림픽이나 월드컵등 자국을 응원하는 기분등은 어느 나라에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애국심이나 내셔널리즘은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을 것이다.
처음 발표했던 내용으로 돌아가는 이야기지만, 국가는 힘이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위해 만든 것이다, 라는 의견이 있다. 근대국가의 시작은
평화적인 것이 아니라, “전쟁이 국가를 만들어내고, 국가가 모든 전쟁을 만들어냈다. War made the state, and the state made war.”*2 는 것이다.
그리고 그 국가의 구성원인 국민은, 나라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사랑해야하는 한다. 마을과 같이, 얼굴이 보이는 공동체의 단위라면, 외부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기위해 어느정도의 규율도 필요하기에, 수장이 어느정도 권력을 가지는 것이 옛날부터 있었다. 하지만, 나라의 단위가 되면 만나지도 못한 사람들이, 같은 나라이면서도 민족이나 문화, 종교가 다른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은 어렵다. 나라 단위의 커뮤니티라는 것은 실은 성립하기 어렵지만, 국가를 어떤 형태이든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애국심이 필요하다. 그것은 전체주의국가(Totalitalianism), 공산주의국가(Communism), 사회주의국가(Socialism), 민주주의국가(Democracy),독재주의국가(Dictatorship), 권위주의국가(Authoritalianism), 어느것도 똑같다. 하지만 그 형태에 따라서는애국심/내셔널리즘의 통치를 위한 필요도가 다르다. 독재제, 권위주의에서는 더욱 중요한 것이다. 그렇기에 독재자는 정보통제나 검열을 한다.(중국, 북한, 싱가폴등)*3국가는 법적, 경제적, 지세 (地勢) 적, 정치적으로 하나의 단위이다. 만약 국민의 동의가 없으면 구테타나 혁명, 암살이 일어난다. 그렇기에 상상속의 커뮤니티로서 국가라는 이름의 공동체를 필요로한다.
그 차이를 줄이기 위한 것이 매스미디어이다. 먼저 언어(문화)적인 통일에 의해, 신문(당시) 등으로, 멀리 떨어져 살고있는 국민의 에피소드 등을 알려주면서 국가라는 단위로의 일체감을 만든다. 중국에서는 광동어로 말하고 있는 지역의 사람들도 지금은 북경말로 말을 한다. 소수파의 언어나 종교는 말살되지만, 언어나 종교가 문화에 끼치는 중요한 역할을 생각했을때, 그것들의 통일이 얼마나 난폭한 것인가를 알게된다. 그 단계를 거쳐, 신문이나 텔레비젼 등에서, 먼 곳에 살고 있는 국민이 소개되고, 커뮤니티로써 환상의 국가가 만들어져 간다. 그리고 그것은 개인의 아이덴티티에도 영향을 끼친다. 근대국가가 형성 된 후 수세기를 거치기도 전에, 국가는 이미 우리들 개인의 마음 속에 벌써 박혀있다.
앤더슨에 따르면, 국가의 개념은 매우 의심스러운 것*4 으로 그 정통성은 지금까지 증명되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네이션네스라는 것은 오늘의 우리들의 정치적인 측면에서 가장 보편적인 정통이라고 불려지고 있는 가치이다
(Nation-ness is the most universally legitimate value in the political life of our time.” *5)
“평등하며 훌륭한 공동체, 국가라는 미명(美名)아래, 지금까지 셀 수 없는
부정, 불평등, 착취가 이루어져 왔다. 수세기에 걸쳐 국가를 위해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생명을 잃고, 혹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이러한 상상 속의 커뮤니티를 위해 행해진 것이다.
Regardless of the actual inequality and exploitation that many prevail in each, the nation is always conceived as a deep, horizontal comradeship. Over the past centuries, for so many millions of people killed and willingly to die for such limited imaginings. (Anderson 1983) ”*6
그렇다고 하더라고, 우리들의 나라, 그리고 역사는 틀림없이 존재하고 있고, 힘을 발휘하고 있다. 여러가지 응어리나 문제, 그러한 것을 어떻게, 분열이 아니라 조화, 싸움이 아니라 의논할 것인가. 거기다 의논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당시의 사람들과는 다르다. 어떻게 해서든 좋은 방향으로 가길 바란다. 아시아의 나라들은 여러가지를 공유할 수 있는 형제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레지던스 중에 발표 했던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금까지 아트에 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레지던스에 참가해서 큐레이터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했는가?
전람회는 없었지만, 나는 슌순과 페어로 여기에 불려 왔다. 순슌에게는 지난 보고서에 적은 자유의 여신상의 이야기 등, 몇 가지 제안을 하였다. 물론, 그 제안대로 작품을 만들 필요도 없었지만, 그는 칸다(神田)에서 구입한 오래된 전쟁 당시의 지도 위에다 먹으로 그림을 그리고, 지명을 남겨 성좌로 보이게 하였다.아름답고 정치적으로 훌륭한 작품을 제작해 주었다.
이 작품은 r:ead의 논의나 발표의 시간, 그리고 술집에서, 나를 포함한 다른 r:ead멤버와 순슌이 많은 이야기를 나눈 것, 그 내용이 예술가인 그의 머릿 속에서 배양되고, 수개월의 시간을 거쳐 제작에 이른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되어진다. 너무나도 바쁜 순슌이 동경에서 사람들과 곰곰이 이야기를 나누거나, 제작하거나 집중한 결과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는 “제작은 안한다”는 레지던스이긴 하지만, 아티스트에게는 충분한 인풋의 기간이지 않았나 생각되어 진다.
나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육아나 대학, 일에 쫒기는 일상에서 벗어나 동아시아라는 거대한 큰 테마를, 실제 관련 나라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고, 문헌을 읽고, 생각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이런 찬스를 만들어 준 순슌과 관계자 여러분들, 홍콩에서 기다려 준 아이들과 가족에게 마음으로부터 감사의 뜻을 전한다.

  1. 小熊英二 単一民族神話の起源—日本人の自画像の系譜、新曜社、1995
  2. Charles Tilly, Bringing the State Back In, edited by Peter Evans, Dietrich Rueschemeyer, and Theda Skocpol,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5
  3. Benedict Anderson, Imagined Communities: Reflections on the Origin and Spread of Nationalism, Verso, 1983
  4. Hugh Seton-Watson ‘その現象は存在する。しかし国家についてのいかなる科学的定義も確認することはできないという結論に至った。Thus I am driven to the conclusion that no “Scientific definition” of the nation can be devised; yet the phenomenon exists’ Nation and States: An Enquiry Into the Origins of Nations and the Politics of Nationalism, Methuen, 1977
    Tom Narin ‘国家についての理論は、マルクスの偉大な歴史的過ちだ。The theory of nationalism represents Marxism’s great historical failure’ The Modern Janus: Nationalism in the Modern World, Random House, 1981
  5. Benedict Anderson, Imagined Communities: Reflections on the Origin and Spread of Nationalism, Verso, 1983.
  6. ibid.

(English) r:ead ボランティア大募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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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在r:eadでは2月17日(月)より滞在を開始するアーティストのサポートやディスカッションの通訳など、さまざまなかたちでプログラムをサポートしてくださるボランティアを募集しています。

・東アジアのさまざまな事柄に興味がある
・日本・中国・韓国・台湾のアーティストやキュレーターと対話し、思考を深めたい
・今活躍する若手アーティストやキュレーターが何を考えているのか知りたい、制作過程を間近で見たい

など、r:eadの活動に共感していただける方なら年齢・国籍・経験は不問です。
中国語、韓国語が堪能な方は大歓迎!!
みなさまのご応募お待ちしております。

期間:2014年2月17日(月)-3月14日(金)
活動内容:アーティストの生活面のサポート、制作サポート、通訳、翻訳、その他期間中に行うイベントやアクティビティーのサポート
場所:にしすがも創造舎、ほか
※ 交通費支給 / 出勤日や時間は応相談

こちらからお気軽にご応募ください。
ボランティアに関する質問もこちらからお願いします。
[ボランティア応募フォーム]

(English) r:ead × comos-tv × 森美術館 特別企画トークイベント開催決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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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とは?—東アジアにおけるコミュニケーション・プラットフォームを目指して」

今回で2年目を迎えたr:ead(レジデンス・東アジア・ダイアローグ)。「東アジア地域(中国、韓国、台湾、日本)のアーティストや、キュレーター、ドラマトゥルク、批評家のためのコミュニケーション・プラットフォーム」というコンセプトを掲げ、対話とプロセスを重視したレジデンス・プログラムとして実施されています。
今回のトークイベントでは、「そもそもr:eadとは?」という問いに答えつつ、このプログラムの全体像やビジョンを明らかにします。昨年の参加アーティストである小泉明郎氏、現在参加中の下道基行氏に、それぞれr:eadで得た対話や体験を語って頂きつつ、アジアのアートシーンで多くの実績をもつ森美術館の片岡真実氏をゲストにお迎えし、東アジアにおける同時代芸術と社会の関係について議論を深めます。司会は本プログラムのディレクター、相馬千秋が務めます。

《comos-tvとの連携により、森美術館の一角より完全生中継が実現!ぜひご視聴下さい!》

日時:2014年2月27日(木)19:00~21:00
視聴URL:http://www.ustream.tv/channel/comos-tv
※今回はUstreamの放送のみです。

■出演
片岡真実(森美術館チーフキュレーター)
小泉明郎
下道基行 
相馬千秋(r:eadディレクター)

主催: NPO法人アートネットワーク・ジャパン
共催:comos-tv
特別協力:森美術館
協賛:アサヒビール株式会社
助成:台北駐日経済文化代表処 台北文化センター
平成25年度 文化芸術の海外発信拠点形成事業(アーティスト・イン・レジデンス事業)

1930년대의 아시아 단편에 관해

시간이 흐른 물품에서, 처음의 철골 건축에서, 초기의 공장 건축에서, 옛날 사진에서, 없어진 물건에서, 큰 피아노와 5년전의 양복에서, 시대에 뒤쳐진 호텔에서, 그는 혁명의 에너지를 보았습니다.
Walter Bendix Schönflies Benjamin

노스탤지어는 과거를 그리워하는 것, 모더놀로지는 과거에 대한 이해를 현
재에의 전용(転用)이다. 라고 한다면, 현대 작품 안에는 노스탤지어와 모더
놀로지의 융합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기묘한 타임머신과 같이, 이 레포트
의 시간 축을 1930년으로 설정한다. 예술가는1930년대를 중심으로 노스탤
지어와 모더놀로지를 어떻게 이루었는가를 고찰하고, 그것과 동시에 아시아
의 현재 상황에서 출발하여, 결론도 아시아에 멈춘다.
일반적으로 노스탤지어라는 생각은 낡은 것에 착목하는 것에 지나지 않고, 물건의 질감을 타임머신이라도 된 듯, 시간에서 태어난 거리감과 에너지를 다시 파악한다. 하지만, 만약 우리들이 앤틱 상인(商人)적인 시야에서 벗어나 한번 더 고사해 보면, 노스탤지어의 기분이 제일 일어나기 쉬운 것은 사람의 변화. 즉, 인간의 태도나 생활스타일은 돌이키기 어려운 것이다. 다시말해, 시간의 교차를 제일 느끼는 것은 생명 형태의 변화 일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에 나오는 말처럼 「1910년 이후, 사람에게 격변이 일어났다」 현대사회는 옛날 사람이나 생활스타일에 조금씩 침투되어 돌이키기 어려운 변화를 일으켰다.
아시아의 생명 형태의 변성(変成)을 나타낸 소설에는 「명인(名人)」이 있다.이 작품은 작가인 카와바타 야스나리(카와바타康成)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것으로, 굉장한 기교의 작품으로 불리고 있다. 1938년 6월 부터 12월에 일어난 「홍인보우 슈우사이(本因坊秀哉) 은퇴시합」이 모델. 신문의 보도나 철학적인 분석, 객관적인 논평을 종합해, 추상적인 타임머신으로 만든 카와바타는 몽타쥬와 같이 이 슈우사이 명인과 오오타케 시치단(大竹七段)의 바둑시합을 표현했다. 슈우사이 명인은 집중력을 보이면서 느긋한 분위기를 보인다. 병으로 3개월의 휴가를 보내지만, 느긋한 분위기는 여전하다. 슈우사이에게 있어서 바둑은 예술작품이며, 잘난 척 하지 않는 태도에서 바둑시합에 임한다. 시합이외의 시간은 하나미(花見, 꽃놀이), 당구, 마작이나 친구를 만나는 등으로 기분전환을 하며, 스트레스를 해소한다. 그 반대로, 오오타케 시치단은 살의와 같은 분위기를 가진 자로, 전장(戦場)에서 싸우고 있는 전사와 같이 날카로운 감각과 빠른 움직임에서 긴장감을 풍긴다. 휴식 시간에도 바둑을 계속 생각하며 조금도 기분을 늦추지 않는다. 결과, 30살의 오오타케 시치단은 5번째 하얀 바둑알을 가진 명인 슈우사이에게 이기고, 1940년 1월 시합 종료 후 얼마지나지 않아 슈우사이는 병으로 사망한다.
카와바타에게 있어서 65살에 타계한 슈우사이는 한 시대의 종료를 의미하고 있는 것 뿐 만 아니라, 아시아에 있어서 미의식에의 최후의 카운트펀치가 되었다. 카와바타에게 있어서 노스탤지어는 꺼져가는 품성에 대한 고찰이 아니라, 인격과 생명의 지표가 된다. 바둑 시합 도중, 갑자기 이탈하거나 부채를 부치거나, 머리를 들어 정원의 풍경을 바라보거나, 그런 슈우사이의 정신에 대해 아쉬움을 가지며, 예술의 길을 걸어 온 슈우사이에게 존경의 마음을 가진다. 오오타케에 관해서는 아시아의 현대화에 있어서 웨스턴의 훈련에 지나지 않는다. 살인을 느끼게하는 괴물이라 해도, 수단을 가리지않고 규정을 지키는 기계와 같다고 말 할 수 있다. 따라서 카와바타 소설의예술구조는 그 자신의 미학적 감성에 따른 것이다. 그의 소설은 현대 아시아의 타임머신이 되고, 노스탤지어가 아닌 오래된 좋은 미학이 현대에 이어지고 있다. 즉, 노스탤지어는 모더놀로지가 된다.
2007년 연말에 타이페이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전람회 「명인-카와바타 야스나리를 따르다」에서, 수메체(Tse Su-Mei, 謝素梅)는 카와바타의 미학철학을 인용, 현대예술과 「예도(芸道)」정신의 관련성을 나타냈다. 바둑판의 선은사라지고, 바둑돌은 무한 공간 안에서 대결했다. 유럽의 룩셈부르크에서 재주하고 있는 화인 예술가에게, 그녀의 모더놀로지 안에는 아시아 예술정신의 가치가 없다고 평 받았다. 이것은 한번 더 호소 할 만한 과제이며, 노스탤지어라는 것에서 멀리떨어져 모더놀로지를 통해 예술의 실천과 창조를 해나간다.
나는 큐레이터로서 동경의 레지던스・동아시아・다이얼로그(r:ead)에 참가했다. 동경예술대학의 카츠라 에이시(桂英史)교수는 모더놀로지 연구에 있어 현대적인 힌트를 세가지 제안했다:공원, 조각, 암시장.
나는 야스쿠니신사의 오오무라 마스지로우(오오무라益次郎)의 조각을 보러 갔다. 오오무라는 일본의 육군을 확립한 인물이다. 유우슈칸(遊就館)에서 제로전(戦)의 전투기를 보고, 오시이 마모루(押井守)의 영화「타치구이시레츠덴(立喰師列伝)」을 봤다. 전후 식량부족에 따른 신바시(新橋), 시부야(渋谷),신주쿠(新宿) 주변에 있는 암시장의 실태나, 당시 화교인과 조선인, 일본인 사이에서 일어난 토지관리의 분쟁 등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동시에 신바시의 현상(現状)도 고찰했다.
그 중에서 제일 흥미가 있었던 것은 우에노(上野)공원이다. 대만총독부의 건축사 「모리야마 마츠노스케(森山松之助)」는 1907년 우에노공원에서 열린 「내국권업(内国勧業)박람회」에서 「대만파빌리온(pavilion)」을 담당해, 절대적
인 평가를 받았다. 특히, 「대만 찻집」의 설립은 혁신적이었다. 그때 마침,
대만총독부는 신청사의 설계 공모를 하고 있었다. 모리야마는 적극적으로 그 공모에 참가해, 공모에서 이긴 모리야마는 대만에서 신청사의 공사주임으로 부임했다. 현재는 안타깝게도 당시의 「대만파빌리온」의 모습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1929년 조선박람회의 대만파빌리온이나, 1935년 타이페이 에서 이뤄진 「시정(始政)40주년기념 대만박람회」, 1936년 기후(岐阜)에서 이뤄진 「약진(躍進)대일본박람회」 및 「후쿠오카시(福岡市)하카타시(博多市)
박람회」 등, 남겨지지 않은 「대만파빌리온」은 대만산물이나 식민지문화의 상징으로 빛났었음에 틀림없다.
과거의 풍경이 더이상 남아 있지 않음에 당황스러움도 있었지만, 타카야마 아키라(타카야마明)씨가 제작한 「동경헤테로토피아」는 나에게 조금의 희망을 가져
다 주었다. 독일에서 연극을 공부한 타카야마씨는 현재 동경에 있는 아시아 각국의 정치난민이나 이민 등과 관계하는 13개의 지역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이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 프로젝트의 컨셉은 「동경에서 아시아를 찾다」. 이른바 걷는 「여행 연극」이다. 참가자는 가이드북과 휴대라디오를 손에 들고 여러 공간을 방문한다. 목적의 장소에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예전에 그 장소에서 살고 있었던 사람, 연(縁)이 있는 도시나 나라의 이야기. 관객은 미
지의 아시아, 그리고 헤테로토피아로서 동경과 만난다.
먼저, 동경예술극장의 지하에 있는 츠키치(築地)소극장. 혁신적인 아시아
연극 공연이 다수 이뤄졌던 극장이다. 예를들어, (구)러시아 연출가 트레티야
코프(Tretiakov,1892- 1939)의 「외쳐라, 중국(叫ぼう、中国)」은 1929년 부터 이 극장에서 공연되었다. 또, 조선독립운동의 대표 극장작품「김옥균」은 1928년
부터 이 극장에서 공연되었다. 그 외에, 저우언라이(周恩来)가 1917년 일본에 유학왔을때, 칸다진보쵸(神田神保町)의 「칸요로(漢陽楼)」에서, 고향의 맛인 고기만두를 먹기 위해 자주 들렸다. 54살의 메이지(明治)대학 교수, 스가케이
지로우(菅啓次郎)는 1976년의 「제 1회 천안문사건」을 중심으로 한 작품을 제작, 라디오 방송으로 나왔다.
13개 장소의 작품 중, 제일 흥미로웠던 것은 이케부쿠로 카나메쵸우(池袋
要町) 근처의 왕가(王家)의 묘. 대만 이민자 옹유주우(温又柔)가 만든 작품의 중심인물은 대만의 언어학자, 독립운동의 추진자인 오우이쿠도쿠(王育徳)
(1924-1985). 1957년에 출판 된 오우이쿠도쿠의 저서이자 세계최초였던 「대만
어 상용단어」를 소재로 한, 오우이쿠도쿠의 이야기이다. 오우이쿠도쿠는 일본
에서 유학, 대만어에는 발음표기가 없다는 것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제2차세
계대전 중 재학했던 동경대학 중국철학 박사과정을 중단하고 대만으로 돌아온
다. 그 후, 타이난 제1고교에서 교사가 된다. 대만어로 현대연극을 창작했다. 하지만 그 후에 일어나는 228사건 와중에, 홍콩 경유로 일본으로 망명했다. 그 후, 박사과정에 복학하여 1969년 동경대학 역사상 최초의 대만 인문학박사
가 되었다. 1960년 코우쇼도우(黃昭堂), 료우켄류우(廖建龍) 등의 6인과 「대
만청년사」를 설립. 그와 동시에 「대만청년」의 일본어판을 출판했다. 오우이쿠
도쿠는 생애, 대만어나 대만독립운동에 몰두하며 1985년 동경에서 서거했다.
나는 예술가인 옹유주우 작품의 구체적인 내용은 모르지만, 대만인으로서 이케부쿠로라는 기묘한 장소에 「so close ,so far」라는 감정을 가진다. 내가 머물
렀던 호텔은 니시(西)이케부쿠로에 있다. 츠키지소극장이 있던 곳에서 1킬로
미터 정도의 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현재 살고 있는 환경과 나 자신
이 태어나 성장해 온 환경과, 이 아시아사(史)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가지
고 있는 장소는 굉장히 멀고 보이지 않는 장소라고도 말 할 수 있다. 타카야
마 아키라라는 아티스트는 노스탤지어를 모더놀로지로 변화시켰다. 팜플렛과 라디오를 한 손에, 라디오를 통해 들려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알려지지 않
은 도시의 이야기에 빠진다. 마음을 가라 앉히고, 아시아의 혁명역사의 감정
을 감능(堪能) 할 수 있다.
「동경헤토로피아」라는 아트 프로젝트는 1930년대의 세계극장:유럽을 생각나게 한다. 2012년에 행해진 카셀 도큐멘타에서 캐나나 출신의 예술가
Janet Cardiff&Georges Bures Miller가 오래된 역 Kassel Alter Bahnhof에 만든 작품
Alter BahnhofVedio Walk는 타카야마 아키라의 「동경헤테로토피아」를 방불케 한다.
Cardiff작품 중에 나타나는 노스탤지어도 도회고현학(都会考現学)적인 의식이 있다. 그녀는 스마트폰에 보존되어 있는 영상을 매개로 역사, 소설, 음악 그리고 댄스 퍼포먼스 등의 이질적인 수법을 통해, 현지에 설치되어 있는 다큐멘트 인스털레이션(Installation)의 도선(導線)에 의해, 감상자를Kassel Alter
Bahnhof역과 홈의 사이에서 방황시켰다. 이러한 현실과 가상이라는 이중성 안에 헤테로토피아적인 감각이, 점점 형태로 되어 간다. 그 중에, 30년대에 있었던 강제수용소에 유대인을 보내는, 개인과 집단의 역사집합(歴史集合)의울림은, 차가운 시공을 넘어서 이 역의 7번 홈에서 확실하게 들리는 것 같이마음 속 깊은 곳에서 열광적인 기분을 불러 일으킨다.
이 Cardiff의 작품에 대해, 타카야마 아키라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는 현지에서 스마트폰 영상을 감상하고 있을 때, 비틀거리며 걸어가던 한 신
체장애자가 그를 스쳐지나간 것을 경험했다고 한다. 그 순간, 노스탤지어의 정서는 현실 상황이 개입되면서 중단되고, 두개의 세계가 공명을 시작, 전류가 흐르는 것과 같이 그의 전신을 찌릿찌릿하게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강렬한 감각이 있어도, 타카야마씨는 이 작품(「동경헤테로토피아」」에 대해, 전람 기획으로의 출발점은 전혀 다른 방향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타카야마 작품의 발상은 옛날 극장에 있는 관객과 연동성, 혹은「theatre」라는 낡은 단어의 의미에서 시작되고 있다. 다시말해, 그가 목표로 했던 것은 현대 극장과 같은 단순한 「연출」이 아니라, 관객이 「연출」의 일부가 되는 것을 원했다. 그 결과, 타카야마가 주시하고 있는 것은 극장의 초점을 관객에게 돌리고, 그리고 연출 후에 관객들의 대화가 활성화되는 것이야말로, 그의「관객론」의 고찰이다. 그러므로 아티스트가 노스탤지어와 고현학을 작품 안에서 교차시키는 의의는, 단순하게 멀리서 보는 프로젝트로서 신체의 무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드라마틱한 연극적인 효과를 만들면서, 스스로가 참가하는 「정치성」을 통해, 관객을 한번 더 사회와 연결하는 것을 의도했다.또한, Kader Attia라는 작가의 「The repair from Occident to Extra-Occidental Cultures」라는 마이크로박물관의 작품이 있다. 이 작품은 전쟁, 의학 그리고 식민지역사 등의 매개로 인해, 노스탤지어를 현대창조의 지식, 공간 그리고 프로젝트 배치의 레벨까지 전환시켰다. Geoffrey Farmer가, 35년부터 85년
까지, 50년간의 잡지 『ライフ』를 편집해 인스털레이션 한 작품「Leaves of Grass」은 전통적인 길을 따라, 전통적인 박물관에 있는 아이러니한 비쥬얼 전시의 수법이었다. 한편, 타카야마씨의 시점에서 출발한다면, 현대의「아시아」에 있어서의 경험에 의해, 고현학이 표현될 수 있는 「아시아성(性)」, 역사와 현재의 교차에 의해 태어난 다양성과 풍부한 층은, 아마도 현재 유럽에 있어서의 직선적인 역사발전을 능가 할 것이다.
말 할 필요도 없이, 노스탤지어와 고현학에 닿으면, 역사적인 상처와 국제문제에 직면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아시아에 있어서 다언어와 다민족에 의해 태어난 역사의 지층은 무엇보다 우리들이 주목해야 만 할 것이다.
동경에 체재했던 동안, 록봉기(六本木) 모리미술관의 10주년전을 견학했다. 큐레이터 카타오카 마미(片岡真実)가 기획한 「out fo doubt」. 쉐다친(謝徳慶)의 저서 『out of time』의 시점을 흉내내어 생각해 보면, 이 전시 테마는 「회의무용(懐疑無用)」이라고 볼 수 있지만, 실제로 「회의에서 태어나다」라고도 바꿔 말 할 수 있다. 사진가 나카히라 타쿠마(中平卓馬)의 작품도 있었고, 나카무라 히로시(中村宏)의 오키나와 전쟁에 관한 그림, 대만과 이란의 전쟁기지, , 포스트전쟁에 대해 모델올로기를 실천한 시타미치 모토유키의대만과 아시아 각지의 토리이(鳥居)를 방문한 작품도 있었다. r:ead 일본팀의 프레젠테이션에서 시타미치 모토유키 작품에 대해 들었다. 그는 기지(基地)와 토리이의 현상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자신의 할아버지를 테마로 한 「일요일의 그림」과 같은 창작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것들은 아트의 힘을 빌려 현대 유적의 모델올로기를 실천한 시공과 교차하는 집단(Assemblage)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재밌는 것은 젊은 예술가인 시타미치 모토유키의 작품은 이때 모리미술관뿐 만 아니라, 타이중의 국립미술관에서도 「아시아 2년전(展)」에 전시되고 있었다. 소문에 의하면 기랑인잔(宜蘭員山)의 제로식비행기지는 대만예술가 카오쥰혼(高俊宏)에게 추천 받았다고 한다. 덧붙여서 말하자면, 일련의 노스탤지어와 모델올로기의 토론을 끝내고, 나는 카오쥰혼의 작품의 파워풀과 루트는 앞서 이야기 한 작품과 비교해, 뒤쳐지지 않고 살아있는 분위기는 충분히 주목 받을 만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카오쥰혼이 2010년에 발표 한 톰슨(Thomson)영상시리즈 안에, 대만 자동차의 멘테넌스 공장이었던 폐허에 숯으로 그려진 벽화가 있는데, 그곳은 영화감독 차이밍량(蔡明亮)의 영화 「떠돌이 개(Stray Dogs, 郊遊)」의 로케지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대만 예술업계에서 유명하다. 그의 작품은 목적성이 없고, 2013년 성품(誠品)서점 갤러리에서 「우리들은 너무 열심히 일하고 있지 않은가」라는 개인전을 발표했다. 대만10군데의 현대 폐허에 숯으로 그려진 벽화를 전시해 굉장히 호평을 받았다. 카오쥰혼의 「폐허 영상 숯그림 계획」은 1930년의 소절(小節)이 존재하고 있다. 그 소절은 예전 인잔전기기지(員山戦機基地)의 제로식비행기의 카미카제 특공대를 경험한 대만 국적의 파일럿 장정관(張正光)이다. 그 외에, 폐허의 역사를 앞으로 돌리면, 「해산(海山)탄갱폐허」 「대만차량수리소폐허」등 벽화의 단체, 자유주의의 칼럼이나 유족의 인터뷰 등, 여러가지 활동으로 발전했다.그러한 활동을 통해서 노스탤지어는 애수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대만 지경(地景)구조의 고찰과 재구축으로 되지 않을까.그것과 동시에 국립미술관에서 전시했을 때 카오쥰혼 본인이 탄갱노 동자의 옷을 입음으로서 「몸으로 전달하다」라는 행위를 실천했다. 예술가는 현실과 역사의 사이에 있는 상처를 메워주어, 신체 레벨의 대화로 태어난다. 아마도 노스탤지어의 본질은 어떤 것으로 메워지는 것이 아니라, 모델올로기를 필요로 한다.
「폐허 벽화 계획」은 현재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있다. 제국주의의 역사사진,
식민전쟁의 상처, 현대공업의 유적, 갤러리 공간, 미술관의 공간, 아시아의 유
대, 여러가지 자기분석, 대형의 제국주의와 이상(異常)한 아시아 정치와의 교
차에 있어서, 기묘한 헤테로토피아가 되어, 예술적인 행동으로 되어 간다. 193
0년대의 격동의 아시아사(史) 안에서 사람들은 「관객참가형」의 방법을 통해 회복했다. 노스탤지어와 모델올로기의 정치학은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공
공공간의 사유화를 피상적으로 비판한다. 그 결과, 예술가가 계획을 세우고 국민이 참가하는 것에 대해 가능성을 느낀다. 우리들은 어떻게 하면 현대예술주의의 스테레오타입에서 벗어나, 아시아 현대예술의 「노스탤지어와 모델올로기」를 성립 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을 때, 이것은 아직 갈 길이 멀다고생각되어진다. 사람들이 폐허극소(劇所)를 방문해, 스스로 참가, 체험하고 논의 하는 것. 무정부, 탈식민, 국경을 넘어서,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폐허를 재생하는 길이 된

탈예술(脫藝術)에 관하여

Haeju Kim: 이번 R:ead 는 오랫만에 만나 각자가 작업하고 있는 환경과 관심 속에서 가지고 있었떤 문제들을 고민해 볼 수 있었던 기회였던 것 같아요. 각자 현대미술과 비평적 디자인이 봉착한 한계를 짚어 보며 이에 대한 체념에 머무르지 않고 어떤 새로운 방법을 모색해 볼 수 있을까를 고민했었죠. 그런데 이 한계라는 것은단지 예술의 장 내부에서만 만나는 문제만은 아닌 것 같아요. R:ead가 끝나고 돌아온 날 서울에서는 경찰이 민영화에 반대해 파업을 벌인 철도노조의 간부들을 체포하기 위해 민주노총 사무실을 습격하는 사건이 있었고, 12월 28일 서울도심에서 대규모 시위가 있었어요. 새 정부 들어 최대 규모의 이 시위에 참여하면서 한 번쯤은 불길이 제대로 붙기를 바랬었는데, 조직적이고 전략적인 경찰의움직임에 비해 시민 시위대는 결속된 힘을 보여주지 못한 것이 아쉬웠어요. 결국 어수선하게 끝난 시위 며칠 후에 철도노조의 파업은 중단되었고, 민영화 반대의 목소리도 한결 사그라든 느낌이에요. 이러한 아쉬움의 경험들이, 지속적인 운동과 항의를 조직하는 힘을 약화시키고, 점차 시민의 정치적인 힘에 대한 신뢰를 무너트리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되요. 예술 실천에서 느끼는 한계나, 현실의 문제를 항의하는 방식에서 느끼는 한계에서 비슷한 정서가 있는 것 같아요. 여기서 ‘탈예술’은 예술 안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 뿐 아니라, 예술 밖의 한계를 극복해야 하는 이중의 미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 되네요. R:ead 이후의 서울의 풍경을 어떻게 보셨는지, 그리고 ‘탈예술’에 대한 아이디어가 그간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궁금하네요.

Hwang Kim: 굳이 다시 언급 함으로 이 글을 시작하자면 저에게 R:ead 는 새로운 어떤것을 찾는 것이 아닌, 지금 고민하는 것들, 머리 주위의 허공에 떠도는 것들을 확실하게 언어화/문자화 하기위해 전략적으로 이용하자는 스스로의 순수하지 않은 목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비평적 디자인을 표방하며 작업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고민을 많이 했고, 질문을 받으면 벙어리가 되어야 했던 부분(해당 질문이 가장 많이 나오는데에도 불구하고)이 바로 디자인이 진보를 외치는데 결국은 예술에서 방법론을 차용한다. 였어요.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저는 보통 1. 도널드 노먼의 디자인의 기능성에 대해서 언급 해왔습니다.(디자인은 문제를 해결하고, 예술은 문제를 발견하는 행위다.) 그리고 2. 소유의 커뮤니케이션: 예술 작품은 대중이 소유할 수 없고 시각적으로 보는 것으로 소통한다.(이미지) 하지만 디자인은 대중의 소유가 가능하니 완벽한 소유권으로 인한 소유자 스스로의 파괴등이 가능하다.(오브제) 물론 어느정도 설득 가능한 논리기는 하나 스스로 턱없이 부족함을 느끼고는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제가 스스로 찾은 행위가 탈예술 행위였음을 인지하게 된것이지요. 사실 제 피자작업에도 이러한 성향이 있으나, 이때는 철저히 영감에 의한것이지 스스로 논리화 되지 못하였습니다. 심지어 READ에 가기 오래전에 승효(페스티벌 봄 예술감독) 씨와 대담한 것을 보면…

(e-mail 대담중 발췌) —————————-

황: 제가 승효씨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전시를 통해 예술을 해체시키고 싶다.’ 사실 이 전시를 통한 제 욕심은 그랬지요. 저나 승효씨나 예술계에 몸을 담고 있지만 예술보다 사회 자체에 관심이 있습니다. 저와 승효씨는 서로 그 비젼을 공유하는데 이 전시는 일종의 첫 번째 실험 이었습니다. 예술의 사회화 이지요. 예술의 대중화와는 달라요. 사회적인 예술이 아니라 즉, ‘정치/사회적 이야기에 관심을 갖고 그런 작업을 하는 작가적인 성향이 많은 디자이너’가 아닌 ‘예술에 관심을 갖고 그런 일종의 활동을 하는 사회/정치 사상가 또는 선동가’ 되겠네요.

승효: 네 맞습니다. 사실 제가 다원예술 이야기를 꺼내면 예술계에서는 지나간 아젠다를 왜 이제와서 건드리느냐고 하시는 분들도 많아요. 그렇지만 제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김황씨가 정확히 지적하신대로, 사회적인 예술이 아니라 예술 바깥에 혹은 경계에 있는 사람들의 사회적인 활동이거든요. 그들중 누군가는 보다직접적이고 선동적인 방식으로 ‘작업’을 하고 있고, 누군가는 예술의 형식들을 차용하면서 좀더 미학적인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을텐데, 저는 후자를 새로운 다원예술이라고 정의하고 싶은 것이에요. 굳이 왜 정의를 해야 하느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기금이나 정책에서의 다원예술은 조만간 곧 사라지더라도 그에 관계없이 다원적인 작업들은 이미 만들어졌고 앞으로도 만들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의를 하지 않으면 논의 자체를 시작할 수 없으니까요. 비평적 디자인 전시를 제가 페봄에서 하고자 하는 이유중 하나는, 디자인을 다원예술에서 차용가능한 하나의 중요한 매체로 인식해 보려는 시도입니다. 또한 디자이너들의 방법론과 형식이, 포스트드라마연극이나 농당스가 그랬던 것처럼, 다원예술에 새로운 충격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고요. 단어 선택에는 조금 신중하고 싶지만 저도 굳이 말하자면 ‘예술에 관심을 갖고 그런 일종의 활동을 하는 사회/정치 사상가 또는 선동가’중에서 직업이 디자이너인 사람들을 소개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도 있겠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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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화 전에도 어렴풋이 탈예술에 관하여 인지하고 있었다고 말할수가 있을것 같습니다. 사실 탈예술을 표방하고 있지는 않고 그럴 생각도 전혀 없지만 제 작업의 방향성은 그래야 하지 않을까 지금은 생각하고 있어요.

얼마전 나연우씨와 만나서 페스티발에 관하여 이야기 한적이 있었습니다. 한때 페스티발이라 함은 예술의 진보화를 이끌어왔던 것인데, 과연 지금은 어떤가. 쏟아져 나오는 페스티발이 과연 담론을 형성해 가고 있는가. 이제는 새로운 대안적 페스티발이 출몰해야 할 때가 아닌가. 라구요. 물론 깊이 공감하는 점이 있었지만 돌아와서 곰곰히 생각해보면 이런 예술적 진보를 위한 진보적 사고들은 안타깝게도 제가 보기엔 현제 우리 사회가 처한 문제점들에 비하면 뭐랄까 굉장히 소소한 문제들로 느껴진달까요?

대통령 퇴진을 외치며 분신자살하는 이를 지켜보며 저의 예술적 행동이 시시해 보인달까요.(이것은 병이라면 병이고, 거만이라면 거만이겠지만요.) 결국 저는 사회적 활동이나 행위와 연계되어 있는 예술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사실 이 부분은 자연스럽게 탈예술의 다른 축이 되는 것 같아요.

물론 아직은 어떤 방식으로 어떤 이야기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READ의 리서치도 어떠한 스트럭쳐를 가지는 ‘탈예술’적인 리서치가 되어야 할것 같다고 생각해요.

Haeju Kim: ‘탈예술’에 대한 아이디어와 더불어 김황씨가 지금 전시를 기획하고 있다는 것이 흥미롭게 느껴졌어요. 큐레이터는 창작자와 관객을 매개하는 역할을 하면서 제도와의 타협점을 찾아가는 측면이 있거든요. 저 역시 독립 큐레이터이지만 기관에 속해있지 않을 뿐, ‘미술’이라는 하나의 커다란 제도에서 벗어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저항을 주장하는, 독립성을 주장하는 어떤 기획도 제도에 대해 인식하지 않고 시작될 수 없다고 느끼고 있어요. 그런 측면에서 김황씨의 ‘탈 예술’과 큐레이팅이 어떻게 만날 지 관심있게 보고 있어요. ‘이 전시를 통해 예술을 해체하고 싶다’라는 언급은 큐레이션을 통한 탈 예술 실천의 시작으로 보이거든요.

이 같은 논의에서 최근에 읽은 글이 유사한 쟁점을 다루고 있어서, 공유하고 싶어요.
<큐레이팅이란 무엇인가?>(폴 오닐 엮음, 현실문화, 2013)라는 앤솔로지에 실린 마크 허친슨과 데이브 비치의 대화입니다. (http://www.markhutchinson.org/writing/writing%20inconsequential%20bayonets.html)
큐레이팅의 독립성과 협업의 가능성에 대한 대화에서 이들은 ‘반(反)예술’과 ‘반(反) 큐레이션’을 얘기하고 있어요. 데이브 비치의 설명 중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반예술의 전복적 잠재성은 예술을 희생시켜 예술 이외의 무언가-배제된 것, 일상적인 것 등과 같은 -를 성취하려는 게 아니다. 예술은 반예술의 전복적 잠재성으로 인해 예술에 내재되어 있지만 예술이 지지하길 거부하는 것에 대항한다. 정확히 바로 이같은 의미에서 반예술은 예술의 변증법적 변환, 즉 부재의 부재이다. 반예술은 예술에 변화될 만한 가치가 있는 무언가가 있음을 뜻한다.”

“큐레이터가 ‘다른 무언가를’ 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막는 것은 무엇일까? 여기에서 전문성, 경쟁력, 기술 등의 모델로서의 반예술이 선호된다. 따라서 ‘다른 무언가를 하는’일은 공모에 저항하는 다양한 활동과 입장을 나타낸다. 당신이 말한 것처럼 독립이 언제나 무언가로부터의 독립을 뜻한다면, 공모는 언제나 무언가-시장, 미술제도, 역사, 예술의 사회적 가치에 대한 개념, 미술 애호가의 인류학-와 공모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다른 무언가를 하는 ‘일은 시장, 미술제도, 미술사 등 특정 제약에 저항하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반예술에서 배울 수 있듯이, 공모(들)에 대한 저항은 개인의 실천을 사회에서 고립시키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의 공식적인 담론이 억압하거나 배제한 사회적 맥락으로 예술을 방해하고 오염시키는 데에 있는 것이다. ”

물론 김황씨가 말씀하신 ‘탈예술’은 ‘예술에 내재되어 있는 것 중 예술이 지지하길 거부하는 것’을 드러낸 다는 ‘반예술’의 의미보다는 좀 더 적극적인 것으로 느껴져요. 궁극적으로는 예술 바깥에서 방법과 실천을 모색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이번 전시와 같은 경우는 그것이 다루는 대상이 디자인이고, 표출되는 방식이 전시라는 점에서 아직은 예술 내부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고 (어쩌면 이것은 탈예술로 가기위한 점진적인 초기의 시도일 수도 있지만), 위에서 설명하는 반예술적 실천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 대화에서 데이브 비치는 또한 반-큐레이션을 실천한 사례로 예술가가 큐레이팅한 몇몇 전시를 예로 들고 있어요. 미술관 디스플레이의 전문적인 규범에 따르는 전시이기 보다는 갈등과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는 프로젝트를 기획하는 것이죠. 큐레이터는 작품과 관객 사이의 매개자의 역할, 해석자의 역할이 아니라 예술의 사회적 관계를 폭로하는 사회 내부의 협력자라 볼 수 있겠죠. 그런 의미에서 지금 김황씨가 기획하고 있는 ‘비평적 디자인’ 전시가 반예술 (혹은 탈 예술)을 다룰 뿐만 아니라 반- 큐레이션 혹은 탈-큐레이션의 실험장이 될 수 있을까요? 만약 그렇다면 구체적으로는 어떻게 실행될 수 있을까요?

Hwang Kim: 사실 저의 탈예술이나 탈큐레이팅은 지금까지 예술이 가진 스트럭쳐나 제도에 반하고자 하는 것이 목적은 아니예요. 말그대로 공격적인 태도가 아닙니다. 그 제도가 틀렸으니 뒤집어 엎자는 것도 사실 아닌것 같아요. 지나친 회색론일수도 있지만 사실 저라는 사람 자체가 꼭 이게 맞다 틀리다가 없거든요. 약간 도가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지요.

지금 제가 흥미로워 하는 것들/하고 싶은 것들은 스스로가 행복해지고 타인들의 삶의 부정적 무게들을 조금 덜어주는 것(즐거움을 주는 것) 같아요. 타인의 범위가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더 좋겠구요. 그러한 방법이 뭐가 있을까 생각해보면 ‘사회체계가 긍정적으로 변화할때’ 사람들은 즐거움을 얻는것 같습니다. 절대로 바뀔 것 같지 않던 이 부조리한 사회가 긍정적으로 바뀔것 만 같은 희망이 있을때 다수의 사람들이 행복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통일을 생각하는 것이고, 이 시대를 더 명확하게 바라봐야하는 시대성을 가져야 한다고 스스로 믿고 있습니다. 아울러 다음 사회를 상상하고 고민하고 제안하지요.

저는 예술가 이기에 이러한 행위를 예술이라는 형태로 표현 하고자 하는것인데, 그러면서도 너무 기존에 보아왔던 예술의 형태로 하고자 하지는 않아요. 즉, 고민을 작업으로 표현을 하는데, 사실 작업이 예술의 범주에 들어갈수가 있을수도 없을수도 있는 것을 하고자 합니다. 해주씨가 공유해주신 글, 마크 허친슨의 글을 발췌를 하자면…(영어로 주셔서 다 읽느라 고생 좀 했습니다. ㅎㅎㅎ)

“나는 이것을 덧붙이고 싶네: 다른것을 한다라는 의미는 큐레이터로서 큐레이터 이외의 다른 무엇인가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I want to add this: doing something else means being something other than a curator as a curator.)”

“그러니까, 만약 큐레이터가 다른것을 하다면 – 아울러 다른것이 된다면 – 나는 이 ‘존재’가 현존하는 체계를 다르게 사용한다는 데에 동의하네. 하지만 나는 더 나아가 이 ‘존재’가 기존과 다른 체계 조차도 다르게 사용한다고 제안하고 싶네. (Hence, when and if the curator does something else – and becomes something else – I agree that this ‘being’ occupies existing structures differently but I want to go further and suggest that this ‘being’ also occupies different structures differently.)”

여기서 중요한 점은 ‘왜 기존과는 다르게 하고 싶을까’ 일텐데. 이건 제가 봤을땐 업(Karma) 같아요. 결국 ‘변화’와 ‘창조’에 가치를 두기 때문이겠지요. 기초적인 작업의 영감이 되는 사회체계도 긍정적인 변화로 이끌고, 그 방법론으로서 차용하는 예술도 긍정적인 변화로 이끌고. 이러다보니 다른 분야에서 여러 방식들을 차용하기 시작합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 하면 그 체계가 싫어서 ‘반예술’하기 보다는 자연스레 ‘탈예술’하는 것 같아요. 그러면서도 ‘업’으로 하여금 예술의 범주에 남아있게 되는 것이죠. 어쩌면 해주씨께서는 더 적극적이지 않느냐고 했는데, 저는 오히려 소극적이고 관조적인 태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치를 보더라도, 사실 저는 진보도 좀 다른 방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보수에 반하는 진보가 아니라 보수를 떠안고 함께 갈수 있는 진보가 필요할때라고 보아집니다. 안그러면 이길수가 없어 뵈요. 제 작업인 ‘소비배급거래제(http://www.hwangkim.com/crts.html)’를 보면 제 고민이 잘 나와있는데, 결국 자본주의가 성공하려면 신자유주의도 아니고, 강제적인 복지의 증가도 아닌, 자발적인 기부의 증가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거예요. 이는 인간의 기초적인 욕망인 소유욕에 반하는 것이며 말도 안되는 거지요. 제 작업 일러스트레이션을 보면 부자들이 노숙자에게 돈을 주려고 줄을 서있어요. 이런 느낌으로 보수를 안정시키는 거죠. 우리가 집권해도 너희들 밥줄은 다 안전하니까 걱정마. 너희들 지켜주면서 진보할께…

여기에 다른 한 측면을 덧대자면 저는 인생을 그렇게 살아온 사람들에게 감동을 받는것 같아요. 작업보다는 오히려 작가의 인생을 보고싶어 하구요. 그런 의미에서 그냥 삶을 살았는데 인생이 예술인 사람들을 찾아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저도 그렇게 살고 싶으니까요. 저는 그들보다는 업이 예술이니까 더 적극적으로 예술로 표현을 하겠지만요. 예를들어 제가 예술가가 아니었으면 그저 북한에 피자 디비디 보내고 말았겠지만 저는 그걸 전시든 공연이든 만들었듯이요.

결론짓자면:

황의작업 = 시대성/진보된 사회 체계(황의 고민) + 융합형 예술/체계 진보된 예술(황의 업) > 자연스럽게 탈예술(황의 작업/인생) > 예술의 형태로 프리젠테이션(황의 작업)

황의 비평적 디자인 전시 큐레이팅 = 시대성/진보된 사회 체계(황의 고민) + 융합형 예술/체계 진보된 예술(황의 업): 예를들어 지금 함께 작업하는 옹카/노암의 광주 518에 대한 작업은 시각예술도, 공연도, 관객참여형도, 디자인도 아닌 무언가. > 전시의 형태로 프리젠테이션(황의 큐레이팅): 근데 사실 이마저도 굳이 전시라고 하면 전시이지만 이게 전시라고 해야할지. 공연이라고 해야할지…

READ는 예전에 이야기 했던데로 자연스럽게 탈예술한 이들을 리서치 하고 이를 하나의 방법론으로 정립하여 다른 예술가에게 한번 적용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직은 고민중입니다. 예술가가 제 리서치를 대본삼아 연기를 하는.

없어지면 남는다/일과 이야기

「과거는 어떻게 편집되어 계승되는가. 거기에 관계되는 일의 존재와 현상과 의미의 변용. 더 나아가 가두어진 과거를 개봉하는 방법과 체험」
그러한 것이 나의 10년동안의 테마였다고 최근 생각하고 있다. 제작하는 수법은 사진과 인터뷰 등. 눈 앞에, 예전부터 있어왔던 관계성에 흥미를 가지고 있기에 될 수 있는 한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닌 관찰과 수집, 편집이란 수법을 이용했다. 역사라는 커다란 이야기와 그 주변에 버려지고 있는 작은 이야기를 동시에 취급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이번 r:ead에서는 지금까지의 다큐멘터리적인 수법에「스스로 무언가를 더하는」것을 상정(想定)하고, 리서치를 시작하고자 한다.

중국 한국 대만의 작가와 큐레이터들, 그 외에도 유학생, 통역가들과의 일주일간의 교류는 굉장히 의미가 있는 시간이었다. 이번 파트너인 핫토리 히로유키씨는 타이의 방콕에 체재하고 있었기에 이번 일주일동안에는 직접 만나지 못했지만, 어시스턴트로 협력해주고 있는 쿠마쿠라 하루코씨와 세명이서 매일 메일을 주고 받으며 대화를 이어나갔고, 그 대화에는 생각이나 아이디어들이 섞여 있었다.

나 스스로, 하나의 작품을 만드는데 수년의 시간이 걸리는 경우도 많아, 이번 일주일을 끝낸 현시점에서는 제작의 출발점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로, 여러가지의 자극이나 요소를 받아들인 정도이다. 그런 점에 입각하여 많은 “계기”로부터 하나를 예를 들어보고자 한다.

이번 참가 작가인 슌순의 「예술작품은 미래를 위한 것」이라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이말은 통역을 통한 말이기에 본인의 의도와 다를 수도 있지만)그가 말한“예술작품”을(어떤 사고나 행위를 결정화(結晶化)한 물체로써)“모뉴멘트”라는 말로 변환시켜「모뉴멘트는 미래를 위한 것」으로 사고(思考)를 시작해 본다.모뉴멘트의 많은 것이 누군가의 자아로 과거를 마음대로 편집하고 남겨두기 위해 강고하게 만들어진(그것들 중 많은 것이 유감스러운 것들)으로 이해하고, 미래에 개봉되어 잘못 이해할 수 있는 소프트의 모뉴멘트 같은 것의 가능성을 작품?으로 생각해 보고 싶다.
그렇게 말하면 슌순은 「어떤 모뉴멘트는 의미가 바뀌어도, 예를들어 약속장소로써 남겨지거나 하지 않는가?」 라고 말한다. 그에 대해 「시부야의 하치공상은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약속장소라고 할 수 도 있다. 유명하니까 약속장소가 되네. 하지만, 휴대폰이
있으니까 약속장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라고 쿠마쿠라씨는 반응한다.
하치공은 예전 시부야역 앞에서 주인을 매일 기다린다. 주인이 죽은 후에도 그 개는 역앞에서 계속 기다려, 그 이야기가 미담으로 유명해져 동상이 되었다.
하치공상은 지금도「그럼, 하치공 앞에서 만나자」라는 기능을 계속 가지고 있다. 어떤 개인적인 약속장소가 모뉴멘트화되고, 공적인 “약속장소”로써 계속해서 존재하는 매우 흥미로운 예일 수 도 있다. 더나아가 찾아보면, 1934년에 만들어진 하치공의 동상은 제 2차대전 중 공출(供出) (금속부족으로 병기등을 만들기 위해 온갖 것들이 몰수되어 형태가 바뀌었다)로 인해 파괴되었는데, 전쟁 후 재건되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리지널의 하치공은 병기나 그 무언가로 형태가 바뀌고 말았다는 것, 그냥 복사되어 복원된 것이 시대가 흘러도 계속해서 같은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

12월의 체재 일주일간을 끝낸 다음 날, 핫토리씨가 타이에서 일본으로 귀국했을 때, 야스쿠니신사에서 “만날 약속”을 했다. 조금 억지일 수 도 있겠지만, 야스쿠니도 예전에 “약속 장소”의 시설로써 기능을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곳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다. 미래에 만나기 위해, 죽은 자의 약속장소라는 장치라는 측면.

……라는, 아직 점과 점의 상태로 그것이 연결되지 않은 현상의 일부를 적어보았다.
핫토리씨와 쿠마쿠라씨와 주고받은 메일은 서로 의견교환과 사고(思考)의 비약으로써 유효했으며, 사고(思考)과정의 아카이브로써도 계속해서 진행 할 예정. 2월〜3월 체재 중에는 토우후쿠(東北)에서 발생하고 시작되고 있는 모뉴멘트나 그 이외에 칸토(関東)를 포함해 리서치를 하려고 생각하고 있다. 만약 기회가 있다면, 중국 한국 대만의 참가자들의 리서치에도 동행하거나, 같이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도 마음대로 해본다. 왜냐하면 이 기획에서 말하는 레지던스라는 것은, 어떤 설정된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같이 어딘가에 가거나, 대화를 하는 시간이 아닐까 라고, 지금은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