핫토리 히로유키

12월22일 아침,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으로 돌아와 하네다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향한 곳은 야스쿠니신사. 그리고 토리이(鳥居, 신사의 입구를 말함) 앞에서 시타미치 모토유키씨를 만나다. 내가 방콩에 있었기 때문에 참가 하지 못한 일주간의 r:ead 체재프로그램 제1탄이 끝난 직후였다. 황금색의 낙엽이 떨어져 있는 큰 은행나무를 보니까, 여기가 일본이고 겨울의 시작이라는 것을 실감 할 수 있었다. 같은「아시아」라는 틀로 묶여 있는 타이
는 상하(常夏)로, 공통의 호칭을 가지고 있는 땅이라고는 믿을 수 가 없다. 요즘 수년동안 아시아라고 묶여 있는 나라를 왕래하면서 활동하고 있는데, 이「아시아」라는게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계속 가지게 된다.

현재 참가하고 있는 r:ead는, 동아시아라고 묶이는 나라들의 아티스트와 큐레이터가 「대화를 거듭해나가는 자리」,그 자체를 아티스트 인 레지던스의 새로운 형태로 제시하는 도전적인 시도이다. 나는 보통 아티스트 인 레지던스를 주요사업으로 하고 있는 아트센터에서 큐레이터로 활동하고 있기에, 이 새로운 레지던스의 형태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고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내가 소속해 있는 센터는, 제작을 하기 위한 스튜디오와 숙박시설 그리고 발표를 위한 갤러리 공간이 있는, 바로 창
작활동에 집중하기 위한 곳이다. 아티스트에게 있어서, 작품을 집중해서 제작하고 발표하는 「모뉴멘털(monumental)」적인 활동이 대전제로 깔려 있는 상황이다. 그것은 물론 굉장히 의의가 있다고 생각되어지지만, 그러한 모뉴멘털로 목적이 명확하게 정해져 있는 자리가 아니라, 체재제작이라는 자체의 의미에 의문을 가지는, 혹은 그 근본을 재고(再考)하기 위한, 얼터더티브(alternative)적인 환경이 r:ead라고 생각하고 있다.

파트너인 시타미치씨는, 「모뉴멘트」 라든가 「모뉴멘털적인 사건」과, 그 주변이나 이면(裏面)에 나타나는 풍경을 여러가지 방법으로 계속적으로 탐구해 온 아티스트이다. 그는 제1회 체재에서 이루어진 대화 속에서「만남의 장소」라는 키워드를 만나게 된 것 같다. 다시말해, 여러가지 기념비가 아닌 미래를 위한 부재의 모뉴멘트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 그것은 내가 미술이나 건축의 필드에 있어서, 사건이나 경험에 윤곽선을 부여하는 작업
을 해 온 것과 어느 부분에서 잘 맞아떨어질 것 같아 기대가 크다.

마지막으로, 이번 대상이 되고 있는「동아시아」에 대해. 정말 동아시아라는 틀은 존재하는 것인가? 어쩌면 그런 틀은 환상일 수 도 있다. 나는 그것을 우선, 「인접하는 타자(他者)」 혹은 「이웃 사람의 집합」이라고 해석하고 싶다. 국가라는 프레임에 의해 절단되고 마는, 또는 시대에 동화되고 마는, 바로 옆에 있는 사람들. 거리적으로 더 떨어져 있는 동남아시아
의 나라들 조차, 내가 살고 있는 일본과 여러가지로 인접해 있다고 실감하고 있는 가운데, 우리들은 조금 더 가까운 이웃 사람으로서 어떠한 대화를 거듭해 나갈 것인가? 「미래를 위한 부재의 모뉴멘트」는 그러한 대화를 심화시킬 수 있는 하나의 기점이 될 수 도 있다.

동아시아는 비어있다.

지금의 「동아시아」는 미국의 시점에서의 동아시아인가, 아베씨와 시진핑씨와의 사이에 있어서의 동아시아인가, 보편적가치로부터의 동아시아인가, 아니면 중국인 일본인 혹은 한국인에게 있어서의 동아시아인가.
어떠한 입장에서 생각하는 경우라도, 이른바「동아시아」에 포함되는 지역과 문화를, 자신이 걸어본 적도 경험해본 적도 없는 사람은, 진실과는 거리가 먼 무지와 편견으로 스스로도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모르는 논점을, 사람에게 피로(披露)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 논점을 위해 논거를 찾고, 때로는 스스로가 논거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그렇게되면 사람은 사물의 표면 밖에 보이지 않게 되어,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는 힘이나 지혜를 잃어버리게 된다. 진짜의 세계를 보아도 보이지 않고,서커스의 개(犬)와 같이, 어떠한 훈련도 받아들인다.
지금의 세계는 글로벌화되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말기 바란다! 글로벌화가 문화에 가져다 준 큰 리스크 중의 하나는 우리들이 「노예」와 같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아직 인식하지 못한 채, 그 위에 독선적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정확성」의 가치는 조금씩 작아지고 있는데, 대다수의 사람은 그것에 대해 의문을 가지지 않는다. 그것은 자각도 하지 않는, 나른해져 있는 개구리와 같다.
동아시아와 관계없는 것을 기술(記述)하고 있을수도있다. 하지만, 먼저 이것에 대해 논의하지 않으면 진실의 문제에 도달할 수 없다. 다시말해, 혹시 우리들의 논의가 앞서 말한 것과 같은 상황이라면, 그 논의는 「학술」이라는 것으로 그럴싸하게 꾸민 가짜의 논의가 된다.
나는 한 사람의 「진심」을 가진 아티스트로서, 이러한 「학술논의」는 술안주 밖에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혹시 우리들의 논의를 형태만이 아닌 것으로 만들고 싶다면, 처음부터 계산 된 틀에 모든 문제를 집어넣어서는 안된다. 이것은 대다수의 사람에게 있어서는 어려운 것 일 수 도 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이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안심감」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결국 위험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정말 논의를 통해서 해야만 하는 것은 「동물원에서의 사냥」 이나 「공원에서의 탐험」이 아니다.

그럼 이제, 「동아시아」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먼저, 고전주의와 정치는 시대에 뒤떨어진다. 지금의 세계는 아주 오랫 옛날에 그 게임을 끝냈다. 옛날에는 영토를 개척하고, 제국을 만들었지만, 지금은 전혀 룰이 다르다. 그렇기때문에, 좁은 도량의 민족주의와 애국주의는 시시하게 여겨지고 있고, 자신을 마취시키는 이외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물론, 정치가들에게 있어서는 아직 사용되고 있지만, 그것은 「바보」같은 국민의 투표, 혹은 지지를 받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동아시아는 미국과 같이 자연스럽게 민족주의를 배척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유럽과 같이 아픈 경험을 통한 교훈을 가지고도 있지 않다. 때문에, 민족주의는 아직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들이 「사랑스러운 동아시아」에 대해 논의한다면, 지금의 민족주의를 정리해 명확하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지금의 민족주의는 내 입장에서 본다면, 어리석은 생각의 산물이며, 어제까지의 역사가 아니고 내일도 반드시 틀린다.
이 「민족주의」는 일/중/한을 죄다 없애버리고, 더욱이 대만까지 영향을 미쳐, 근대의 역사발전과 정치변국(変局)에 깊게 관계하고 있다. 그것을 위해, 사람들은 모르는 사이에 역사와 정치의 꼭두각시가 되어 있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도 자각하지 않고, 자신이 깊은 견식과 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실은 우리들은 어떤 강대한, 그것에 대항하는 사람이 없을 것 같은 체계에 맹목적으로 종속되어 있다. 이 체계가 서양적인 것인가, 동양적인 것인가 혹은 고대 그리스 문명적인 것인가, 미국 문명적인 것인가 라는 판단은 할 수 없지만, 그것은 점점 흡수되어, 변화하고 있다. 단, 우리들이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서양의(명확하게 말하자면, 미국의) 문화를 중심으로 하고 있는 문명체계이다. 한가지 예로 들 수 있는 것은, 1달러 지폐의 뒷면에 있는 「new order」는 이제 아득한 옛날 이야기다. 미국사람이 세계에 대해 구상하기 시작한 것은「얄타협정」 보다 훨씬 빨랐다. 「얄타협정」의 정치흥정을 위해, 동아시아에서 「혼란」이 일어나도록 예전부터 절차를 밟고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나라」 마저 만들었다. 그 덕분에 동아시아의 몇 나라는 서로 얕보거나 증오하거나 한다. (정말이지 서커스단의 사육된 원숭이와 같지 않은가! 때문에 「민족주의」와 「애국주의」는 더없이 어리석은 것이다.) 동아시아의 「혼란」은 때마침 「세계의 질서」의 둘도 없는 부분이 된다. 중국의 공산주의와 혁명수출, 그 후의 냉전질서와 문명분단은 그칠 줄 모르는 폐해를 가져 왔다. 중국은 동아시아 문명의 근원, 동아시아 문명의 중심이었다. 일본은 청나라 시대때 부터 중국을 앞질러, 동아시아의 리더가 되었다. 이것은 실제로 서양문명이 동양문명을 이겨낸 것이다. 그리고 그때 우리들은 어쩔 수 없이 서양문명이 세계의 중심에 있다고 인정했다.
중국과 일본은 기본적으로 서로 배우고 있다. 옛날에는 일본은 중국으로부터 배운게 많았지만, 근대에 들어서는 중국이 일본으로부터 배우는 것이 많아졌다. 이 두 나라는 보통은 사이가 좋고, 때로는 의리가 굳다. 하지만, 일정의 균형이 잡히면 반드시 싸우게 된다. 당나라때 한번, 원나라때 두번(두번의 간격이 짧았기에 한번으로 계산해도 좋다. 물론 이것은 몽골인에 의해 세워진 당시의 원나라가 중국으로 계산되어지는 경우의 이야기이긴하지만), 명나라때 한번, 청나라때 한번 (제2차세계대전은 어떤 의미로는 이 싸움의 연장이라고 생각된다). 이렇게 정기적으로 일어나는 싸움은, 부부싸움과도 같다.(덩샤오핑시대의 일본과 중국은 아직 사랑스러운 연애기간으로, 일본은 당시 거의 전 재산을 다 써버렸다고 말해도 좋을 만큼, 힘을 다하여 중국을 원조했다. 중국도 일본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시장개방을 했지만,) 지금은 이별이야기로 시끄럽다. 고집을 부리고 있지만, 실은 마음 속으로 아직 서로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이것에 대해서는 매일 신문을 읽는다면 알 수 있다. 실제로 일/중의 수뇌(首脳)는 바보가 아니고, 불쌍할 뿐 이다. 「민주」가 화를 초래한다. 민주에 의해 모든 것을 정하면 안된다. 다수의 사람에 의해, 어떤 하나의 사건에 대한 판단은 간단하게 개념화 된다. 그것은 윌 스트릿의 금융에 관한 이야기를 아티스트와 논의하는 것을 상상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한국은 쓰라린 기억을 가지고 있다. 일본과 중국이 전쟁을 시작할 때 마다, 항상 먼저 피해를 입고 마는 것이 조선반도이다. 냉전시대때도, 조선반도를 분리하여 전쟁의 최전선으로 이용했다. 지금도 이 상황은 아직 변하지 않았다. 때문에, 한국의 민족주의는 굉장히 강하고,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많은 고난을 가졌던 국가가 지금과 같이 성숙되어 있는 것에 경복(敬服)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한국사람에게 있어서 중국과 일본은, 두 사람의 「이 빌어먹을 자식」이라고 생각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 위에, 세계의 몇몇 큰 세력을 가지고 있는 나라도 모두「이 빌어먹을 자식」이라고 생각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언제나 한국사람 집에서 싸움을 하고, 조선반도는 거기에 대해 참혹한 대가를 취뤄야만 했다. 실은 나도 그것에 대해 분노를 느끼고 있다. 그 때문에 한국은 문자도 바꿔, 독자의 세계를 만들었다. 단, 객관적으로 보자면 이 부분은 한국 문화 안에서도 애매한 부분이 있다. 정치와 문화는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짧은 역사관으로 보자면 분명히 관계가 있는 것 같지만, 길게 보면 실은 관계가 없다. 이것은 어느쪽이냐면, 역사에 대한 정서적인 반응으로, 백년 후의 것은 아무도 알지 못하지 않는가.

대만사람은 중국사람이지만, 일본사람에게 감사하고 있다. 청정부가 대만에서 건전한 통화시스템을 세우지 못하고 있을 동안, 일본사람이 대만사람에게 근대문명의 발전을 가져다 주었다. 청정부가 대만을 일본에게 넘겨준 것 (당시 「바칸조약(馬関条約)(시모노세키조약(下関条約))」에서, 일본
의 산동반도의 일부 점령을 인정하고 대만을 할여하였다)과, 대만민주공화국 성립 후에 국민당이 대만에 들어온 것은, 대만의 민중에게 「중국문화가 최고다라는 생각을 잊자」라는 감정을 심어주었다. 그들의 반응을 보아도 이것은 확실하다.
이들 문제는, 모두 역사와 정치 분야에 속해, 역사와 정치는 쌍둥이 형제와 같이 분리하여 취급할 수 없다. 정치는 눈 앞의 역사와 같은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이전의 정치에 속해 있다. 그것들은 두개의 거대한 좌표축과 같은 것으로, 모든 것을 정의 한다. 세계의 모든 것이 그 좌표축에 종속되어 있다. 예를들어 부모형제, 국가성립기념일, 사전(辞書)등 한개만이 아니다. 이 좌표계통 안에서 우리들은 「내가 누구인가?」라는 것을 확실히 이해할 수 있다. 이것도 이번 프로젝트의 궁극적 목적이라고 생각되어진다.
어떠한 전쟁변혁이나 역사변천이 있던지, 우리들은 역사의 긴 흐름 속에 있는, 이상한 일관성을 본다. 예를들어 유럽의 히틀러와 나폴레옹 두사람은 유럽의 대륙을 주도한 후에 두가지의 같은 것을 했다. 한가지는 영국에 진격한 것, 다른 한가지는 러시아에 패한 것. 이것이 근대의 구주(欧州)문명의 구성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누가 말할 수 있었는가. (영국은 유로권에 참가하지 않는다.) 그들은 기독교의 문명체계에 속한다.
서로 닮은 데가 있는 역사적 관계를 확대해 보면, 우리들의 과거는 전부 기독교 문명, 이슬람 문명, (실은 기독교 문명에서 갈라져 만들어진)그리스 문명 및 동아시아의 유학 문명, 유대 문명의 사이를 둘러싸고 있다. 이들 문명의 발전은 「문명」과 「전국(戦国)」의 관계와 같다. 때로는 연합하며, 때로는 저항하며, 비틀거리면서 오늘날에 이른다. 그것은 지금도 변하지 않고 세계 문제의 열쇠가 되고 있다. 어떤 사정(事情)의 발생과 발전은, 다시말해 문명의 충돌이다. 가장 핵심에 있는 원인을 구명하는 것은 어렵다.
그렇기에 문명은 역사와 정치에 버금가는 세번째의 죄표축이 된다. 각각의 문명 배경은 세계에 대해 다른 인식과 판단을 가져다 준다. 이 세번째의 좌표축은 서로 주요한 것과 부차적인 것을 담당한다. 대부분의 경우, 정치와 역사는 실용적이다. 예를들어, 일/중의 댜오위 다오(釣魚島) (센카쿠쇼토우(尖閣諸島)),일/한의 타케시마(독도)의 분쟁, 그리고 일본의 북방사도(北方四島)의 분쟁, 모든게 이 두 좌표축의 중간에 속한다. 하지만 문명은 현실의 실용성을 준비하고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길게 보면 그것은 제일 중요한 것임에 틀림없다. 때문에 정치, 역사와 문명, 세개의 척도로, 세계의 「존재」라는 좌표계통을 정의하고, 동시에 서로 견제하며 만난다. 그러니만큼 우리들의 세계는 붕괴하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들이 예술과 예술가를 필요로 하는 요인일 수 도 있다. 물론 음악이나 철학, 시도 마찬가지다.
이상의 것에 입각하여, 우리들은 「동아시아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가까워 질 수 있다. 문명에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힘과, 무지를 줄이는 힘이 있다. 우리들의 문명은 후자의 경향이 강하다. 혁신적인 창조는 여러가지 문제를 해결하지만, 동시에 많은 새로운 문제를 초래한다. 한개의 체계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혁신을 가속화시키는 것만으로, 일정 정도까지 가속하면 새로이 본질적인 문제가 발생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새로운 가능성이 태어나는 것은 무지가 없어질 때이다. 이것은 바로 우리들 동방 문명의 특별한 매력 중 하나이다.
컵의 가치는 재질이나 모양이 아니라, 비어 있는 것에 있다. 물 혹은 와인이 가득 부어지고 나면 컵은 가치를 잃는다. 단, 컵의 내용이 끊기지 않고 갱신되는 것에, 컵은 영원의 가치를 가지게 된다. 하지만 「갱신」과 「혁신」은 다르다. 둘 다 성장과 발전이지만, 다른 부분이 있다.
「동아시아」의 문제에 대해, 우리들이 문명의 관점에서 검토한다면 적극적인 사건을 촉진하는 의의가 있다. 정치와 편협된 역사는 유한(有限)이며 불완전함에 틀림없다. 문명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철학문화관과 세계관이 「텅 빈」것과「가능성의 무한」에 놓여 있다는 것에 있다.

일본과 중국의 자유의 여신 – 순슌씨와의 대화에서

r:ead의 소풍(excursion)때 오다이바까지 갔을 때의 일. 순슌씨가 아무리 기다려도 따라오질 않아, 왔던 길을 되돌아서서 찾아갔더니, 오다이바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을 보고 있었다. 그는 오다이바에 자유의 여신상이 있는 것에 대해 굉장히 놀라워 하며, 어떤 이유로 이곳에 자리하게 되었는 가를 나에게 물었다.
수 년전, 일본–프랑스해에 프랑스가 보내주었던 것으로 나는 기억하고 있었기에, 어슴푸레한 기억으로 우선 대답해주고, 나중에 확인하기로 했다.

그가 뉴욕에서 바로 일본으로 온 것을 알고 있었기에, 더욱 이상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자유의 여신상은 민주주의 상징이며, 미국의 독립기념일과 프랑스혁명일이 새겨져 있다. 자유와 독립을 이루어내, 모든 억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찢겨진 족가와 쇠사슬을 여신은 밟고 있다. 또한, 1886년 프랑스의 프리메이슨으로부터 미국의 프리메이슨에게 보내진 것이기도 하다.*1

하지만, 자유의 여신상은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현재 미국의 상징이다. 패전 후의 맥아더장군을 앞세운 GHQ의 통치에 의한 민주주의를 그대로 받아들인 일본이라는 나라에는 자유의 여신상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순슌씨가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분명히 그러한 면도 없잖아 있긴 하지만, 미국의 상징이기도 하고 헐리우드 영화나 책, 사진, 그림 등 많은 매체에 등장하는 자유의 여신상은, 전후 미국문화에 물들여진 일본이기에 어울린다고 나는 생각한다. 또한, 자유의 여신상이 있는 곳이 매립지, 쓰레기로 인해 만들어진 오다이바이라는 것도 굉장히 일본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다이바의 자유의 여신상은 프랑스의 해인 98년~99년에, 우호의 목적으로 2년간 프랑스가 빌려준 것. 그 후2000년에 복제품이 만들어져 같은 장소에 있게 되었으며, 데이트 코스, 관광 코스의 촬영명소가 되었다. 뉴욕의 것은 거대하지만, 일본의 자유의 여신상은 11m、정확히 파리에 있는 것을 본 떠, 브론즈로 주조한 것이다. *2

하지만, 형태는 다르지만 실은 홍콩에도 자유의 여신상이 있다. 중국어로는 민주여신(民主女神)이라는 이름이다.

원래는 중국 북경의 중앙미술학원(中央美術学院)의 학생들에 의해 단 4일만에 만들어진 것이다. 크기는 10m, 자세나 횃불을 들고 서 있는 모습도 자유의 여신상과 닮았다.
민주여신은 천안문에 모인 학생들의 단식투쟁과 농성의, 반정부의 상징으로서 만들어졌다. 바로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의 상징인 것이다. 하지만 천안문광장에 가지고 들어간 1989년 5월 30일, 반체제의 학생들과는 대조적으로 중국당국은 공적인 장소에 이러한 동상을 가지고 들어가는 것은 중대한 위법행위라는 성명을 발표, 6월 4일 오후5시, 정부가 무저항이었던 시민들에게 향했던 총격이 일어났던 그 날, 민주여신도 그 장소로부터 제거되었다.

그 후 1996년, 홍콩의 빅토리아공원에 이 여신상의 복제품이 세워졌지만, 2010년 정부의 의향으로 철거가 정해져, 시민의 강한 저항과 여러 논의 끝에 현재는 중문대학(中文大学)에 조용히 놓여져 있다. 홍콩에 있어서도 강한 북경의 힘으로 인해 당시 타임즈스퀘어에 이 동상을 전시한 13명은 체포되었지만, 그 후 무죄판결을 받게 된다.
또한, 천안문사건 후에 각 나라로 흩어진 반대파의 중국인이나 찬동자에
의해 이 동상은 현재 천안문사건과 그때 생명을 뺏긴 사람들을 기념하며,
또한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세계 각지에 복제품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한다.
미국에서는 1999년 센프란시스코에, 버지니아 자유공원과 워싱톤DC
에는 2007년에 건립되었다. 중국인 망명자를 다수 받아들인 캐나다에서
는 학생운동의 상징으로서 밴쿠버의 브리티시콜롬비아대학, 켈커리대학,
토론토의 요쿠대학에 설치되어 있다. *3

미국문화의 중심, 뉴욕의 심벌로서의 자유의 여신상、그리고 프랑스와의 우호기념으로 일본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 민주주의와 저항, 천안문사건의 피비린내나는 사건의 메모리얼로서 세계 각지에 있는 민주의 여신. 동과서, 서양과 동양에 각각 다른 이유를 가지고 있는 이 동상은, 민주화나 자유의 의미, 글로벌리제이션이나 착취의 축소, 프리메이슨, 미국문화, 천안문사건 등의 언설(discourse)를 끌어안고 지금도 조용히 우리들을 바라보고 있다.

  1. 自由の女神像 (ニューヨーク) – Wikipedia
  2. お台場に自由の女神があるのはなぜですか? – Yahoo!知恵袋
  3. 民主女神 – 维基百科,自由的百科全书

(English) r:ead # 2 – Announcement of participating artists and cura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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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ter it’s first edition in held in 2012/2013, r:ead is now prior to the start of its 2nd edition. Like in the 1st edition, we invited four artists of the younger generation from China, Japan, Korea and Taiwan to come together in Tokyo and, while undertaking research in several areas of the city, to hold presentations and discussions regularly. The four artists of the 2nd edition are (in Japanese syllabary order) : Hwang Kim [South Korea], Motoyuki Shitamichi [Japan], Xun Sun [China] and Pei-Shi Tu [Taiwan]. They were selected for r :ead # 2, as all of them (although in working in completely different artistic fields) in their work so far approach issues of East Asian history and relationships between East Asian countries.

Each artist selected a curator of her/his choice, who accompanies them to Tokyo and forms their intellectual counterpart in order to broaden and deepen the discussion. The curators are (in Japanese syllabary order) : Haeju Kim (Korea), Jow-Jiun Gong (Taiwan), Hitomi Hasegawa (China) and Hiroyuki Hattori (Japan).

From Dec 15, the r :ead members will gather in Tokyo for one week and share their perspectives on East Asia’s past, present and future. The three-week long 2nd period of stay will be held in February/March 2014. On this website, we will regularly inform about the progress of the project.

(English) r:ead # 1: Reports of participating artists and curators on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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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sidency east asia dialogue’s 2nd period of stay (creation period) was held from Feb 22 to March 13, 2013. For the artists, this was their second stay in Tokyo after a one-week orientation period in December 2012, in which all participating artists initially gathered and shared their artistic ideas and previous work.

For the r:ead curators the 2nd period of stay was their first encounter with Tokyo and the other r:ead participants. After the residency period in Tokyo had finished with a final presentation of each team at the Nishi Sugamo Arts Factory, all participants returned to their home countries. Back home, they looked back and critically reflected their experiences in Tokyo again in a report. Their texts are now online. Please check, how the residency in Tokyo influenced the work and thoughts of the participating artists and curators from four East Asian countries.

목소리들의 이미지: 듣고 말하기

사회의 견고한 시스템의 경계를 넘나들며, 그 사이에 생겨나는 빈틈에 일종의 대항적 제스처를 구사하고자 하는 김지선 작가는 도쿄와 서울의 두 공간 모두에서 공교롭게도 대의(제도) 민주주의 꽃, ‘선거’라는 경험을 목격하고 겪었고, 이는 그간 천착해온 ‘가상’ 공간에 ‘새로운 민주주의 플랫폼’이라는 화두를 던졌다. 여기에 덧붙여 일본의 사상가 아즈마 히로키가 <일반의지 2.0>에서 말하는 의사소통의 바깥에서 발현되는 새로운 민주주의 플랫폼의 가능성은 2차 리서치의 주요한 키워드들을 생성시켰다. 한편 동아시아 4개국에서 온 r:ead 참여자들은 서로의 민주주의의 위기에 관해 입을 모아 얘기하곤 했다. 그 때문에 이 이론가의 기획은 언어와 국가를 넘어서, 분명 또 다른 정치화의 매력적인 가능성으로 다가왔었다. 최근 하시모토 도루 오사카 시장의 “위안부는 필요했다”는 발언과 관련해 문제는 특정 국가가 아닌 인류 전체에 해당하는 폭력성 아닌가 하는 취지의 아즈마 히로키 트위터 멘션이 한국에서 ‘아즈마 히로키의 망발’로 반짝 공론화되었다. 그는 이것을 어떻게 생각할까? 의사소통의 불가능성을 전제하고 시작하는, 소위 국제적 행사에서는 대체로 영어를 공용어로 하는 반면 r:ead는 참가자들이 각자의 모국어를 고수하게 했다. 불완전한 소통은 장벽이라기보다는 월경을 시도할 틈을 열어 줬다. 그 덕에 서로의 차이를 독해한(read) 이후에 도래할 대화(dialogue)가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 실제로 <일반의지 2.0>의 한국어 번역자였던 안천과의 만남을 비롯한 여러 사람의 지적 성과에 기대어 기존 인식을 깨고 일본 사회를 읽어내려갈 수 있었다. 언어 표기, 지정학적 위치 등을 고려하면 일본이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 비교하여 대 중국화, 대 냉전 체제라는 제국으로부터 거리 두기가 어느 정도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혹자는 일본을 외부로부터의 억압 없거나 약한 주변부에서는 생성이 자연 발생했고 그것은 하나의 사회적 원리로 포획되지 않고 각각 따로따로 공존하는 사회로 보기도 한다. 이는 아즈마 히로키가 운영하는 겐론 까페 인터넷 패스워드인 ‘bunriyugo’, 서로 상반된 뜻을 지닌 분리와 융합의 공존에서도 발견된다.

도쿄에 도착해서 첫 발표 자리에 나는 이번 리서치를 염두에 두고 작가와 함께 고민했던 익명성에 관해 말했고, 김지선 작가는 한국의 웹 포털 사이트를 차용해 생각의 전개도를 그렸다. 발표 뒤에 그 익명성 때문에 벌어질 부작용에 관해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일본의 넷우익이나 한국의 일베처럼 파시즘적 징후를 보이는 예들도 있고, 애런 스워츠의 안타까운 죽음이나 어노니머스의 핵티비즘 활동은 웹 상에서 공유와 소유, 자립과 공격, 저항과 범법의 경계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관해서는 갈등이나 위기를 관리하는 차원보다 세계를 구축하는 차원에서 필요를 말해 봤으면 한다. 한국에서 현실에서 존재감 없음, 패배자를 뜻하기도 하는 ‘잉여’ 또는 ‘듣보잡’은 웹에서 시작된 용어이다. 배제가 현실이라는 ‘의식’ 차원에서 벌어지는 지식의 전문성, 권위의 제한, 비용의 증가 때문이었다면, 새로운 민주주의의 플랫폼을 고민할 때 당연히 이 무의식적 존재들의 데이터베이스를 기존 민주주의를 보완할 배지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한국 문학평론가 복도훈의 <묵시록의 네 기사>에서는 뒤러의 동명의 작품을 바탕으로 파국에 직면한 지금 세계에 관한 네 가지 분석을 내놓고 있다. 그의 분석을 따르면 그 네 명의 기사는 각각 자기 파괴를 향한 자본주의의 진보 서사, 적과 동지로 나뉘는 정치적 상상력의 위기, 평등과 불평등의 피투성이 투쟁, 삶과 죽음의 가치가 상실된 생존 유일의 생명정치 이데올로기를 상징한다. 김지선 작가가 잘 훔치는 것(웰-스틸링)으로 전복하고자 했던 ‘웰-빙’이라는 한국 사회의 단면은 이 가운데 세 번째 묵시록의 기사 손에 들린 저울에 닿아있다. 남과 비교했을 때 더 우위에 있어야 하고, 또 남들에 뒤처지지 않아야 한다는 이 강박적 명제는 삶을 저해하는 요소들을 삭제하면서 삶을 삭제한다. 그래서 웰빙은 목숨이라는 수단 그 자체가 목적이 된 생존의 다른 얼굴이다. 아마도 이 생존의 굴레 바깥으로 탈락한 이들이 그 듣보잡일 것이다. 다시 그 묵시록의 비유에 기댄다면, 이들이 봉건 ‘신민’도 근대 ‘주체’도 아닌 탈근대 ‘생명’으로도 호명되지 않은 누군가이다. 이들을 아즈마 히로키가 말하는 동물로서의 인간, 김지선의 ‘잉여’와 연결지어 본다. 작가는 웹을 넘어서 이 얼굴을 찾아보려 했다. 고엔지에서 재활용가게를 운영하는 마쓰모토 하지메와 그의 이웃들에서도, 겐론 까페에 모인 손님에게서도. 결국 그녀는 이 연약한 이름들과의 접촉을 거쳐 겐론까페에서 퀴즈를 훔쳤다. 퀴즈는 질문과 답으로 구성된 담화 형식이고, 자기 각성 혹은 계몽과 깊은 연관을 가진 존재를 주체로 만드는 주체화 장치로 볼 수 있다. 작가는 실패를 뻔히 알면서도 답이 나올 수 없는, 해답으로 향하는 의식을 교란하는 내용으로 퀴즈를 채웠다. 공교롭게도 최종 발표날은 동아시아 전체에 파국을 가시화했던 2년 전 3.11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난 그날이었다. 동아시아 각국은 이 묵시록의 과거, 현재, 미래 어느 한 부분이든 차지하고 있다. 동아시아는 새로운 낙원을 찾을 수 있을까? 그 답 또한 여전히 불안하다.

인터뷰에서 아즈마 히로키는 “한국이든 어디든 원전을 비롯한 여러 이슈들을 두고 일본 사회의 우경화에 관해 비판하는 외부의 목소리는 내정 간섭 논란을 일으키며 적대를 부채질할 뿐”이라 우려하기도, “문제(問題, 일본어 발음 ‘몬다이’)가 없는 것이 일본사회의 문제”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 두 문장은 내게 그에게서 혐의를 지울 수 없었던 일본 지식인의 특정한 순진한(naive) 태도와 일본 사회 내 탈정치화 경향을 동시에 연상케 했다. 한정된 이 글에서 정치의식이나 민주화 경험 차원에서 문제를 논하고 싶지 않다. 정치는 서로 다른 가치가 갈등하고 경합하며 서로를 인식하는 시간이자 장소이다. 오늘날 그 장에서 만들어진 가장 총체적인 결과물을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회피하지 않고 적에 관해 끊임없이 말하고 그 적대를 이웃에 대한 우애로 바꾸는 낙원은 어디 없을까? 고엔지 이웃이 모이는 ‘난또까’ 바에서 들은 목소리들을 떠올린다. 그래, 난또까, 어찌하든, 어쨌든, 결국 민주주의, 정치, 사회 언저리를 맴돌고 있다. 왜? 민주주의 뿐만이 아니라 모더니즘, 동시대 예술 또한 제대로된 비용을 치르지 않고 단기간에 이식된 탓일까? 그래서 몇 두드러지는 예술가들은 부채를 갚으려는 듯 정치적 올바름에 따라 활동하는 것일까? 치르지 못한 비용은 이런 사회적 개입으로만 지불할 수 있는 것일까? 공연예술기획자 오자와 야스오는 인터뷰에서 “극장에 더 이상 공공성은 없다”고 진단하며 “웹상에서 공연예술의 새로운 공공적 플랫폼을 찾고자 한다” 말했다. 웹이든 다른 어떤 곳이든, 어쨌든, 예술이 분명 사회를 필요로 하는 것 아닐까? 대가를 치루는 방식은 아직도 모호하지만, 이 결론 내릴 수 없음을 낭만화하지 말고 끊임없이 문제를 기억해 낼 수 있길 바란다. 다시 만나자고 말했던 5년 뒤에도.

<오럴 히스토리>에 대하여

이번 r:ead에서 <오럴 히스토리>라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것은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을 대상으로, 제2차세계대전 및 그 당시 일본의 역사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구술하도록 부탁하는 인터뷰 형식의 프로젝트이다. 우에노 공원, 아메요코 시장, 요요기 공원, 신주쿠, 도쿄타워, 신오쿠보, 아사쿠사 등지에서 약 70명의 길가는 사람들에게 협조를 받았다. 인터뷰 협력자 개인을 알아볼 수 없도록 입 주변만을 비디오 카메라로 촬영해서, <오럴 히스토리>라는 타이틀처럼 ‘입이 역사를 말하는’영상작품으로 발전시키고자 했다.

최종 프리젠테이션에서는 우선 인터뷰 협력자의 입에서 발화되는 ‘역사’를 실제 연도순으로 맞춰나가는 편집을 시도한 영상을 발표했다. 70인 각각의 기억에 기록되어 있는 역사를 하나의 타임라인에 올려놓음으로써, 어떠한 공통인식이 존재하고, 또한 어떤 팩트가 빠져있는지 그 모습을 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편집을 했다. 그 결과, 예를들어 보다 많은 사람들이 말한 ‘원폭투하’와 ‘진주만공격’이라는 단어가 타임라인 위에서 복수의 ‘입’에 의해 반복됨으로써, 이 두 역사적 사실이 다른 사실보다 더 많이 인식되고 있는 모습이 그려지게 되었다. 또한 몇몇 사람이‘원폭’이라는 단어를‘원전’으로 잘못 말하는 것도 대단히 흥미로웠는데, 이러한 말실수와 기억의 오류들이 복수에 의해 발화될 때 집단적인 무의식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러한 무의식이 떠오르는 순간을 영상으로 표현하는 것 자체가, 이 프로젝트의 핵심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에 시도한 것과 같이 실제의 연표에 맞춰나가는 편집으로는, 그러한 말실수나 기억의 오류를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어렵다는 것 또한 깨달았다. 이 프로젝트는 정확히 기억된 역사를 전달하는 작품이 아니라, 집단적 기억과 역사인식에 얼마나 많은 오류와 공백이 존재하는지, 그 왜곡된 모습을 영상으로 담아내는 것에 그 의미가 있다. 따라서 대다수의 사람들의 입에서 발화된 “잘 모르겠어요…”, “역사쪽은 약해서…”라는 중얼거림이나 얼토당토 않은 발언을, 어떻게 편집을 통해 체계적이고 효과적으로 타임라인에 올려 놓을 수 있을지가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일단 그 체계를 발견하게 되면, 그 이후에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인터뷰를 시도하여 더 많은 소재를 얻음으로써, 작품에 무게를 더하고 표현을 풍부하게 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프로젝트의 최종적인 결과물의 형태는 아직 결정하지 않았지만, 현재의 바람으로는 멀티채널의 비디오 인스톨레이션이나 아카이브로서 이 작품을 선보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소재를 어디까지나 하나의 타임라인에 올려놓는 것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싱글채널의 영상작품을 보통의 영화관에서 상영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60분간 ‘입’이 모순과 왜곡, 그리고 무지로 가득찬 역사를 집요할 만큼 일방적으로 관객들에게 강요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모습이야말로, 오늘날 일본의 현실에 의해 만들어지는 충실한 ‘오럴 히스토리’가 아닐까 생각한다.

2013년 4월 26일.

해소

r:ead의 제2기 체재기간에서는 예술의 힘을 한층 더 느낄 수 있었다. 제1기에서는 일본에 대해 지극히 표면적인 인상만 받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깊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다. 그러나 물론 아직 표면적으로밖에 느낄 수 없는 부분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 자신이 변했다는 것이다. 이 점을 예리하게 포착해서, 스스로의 변화 과정을 영상작품으로 만들기로 했다. 마음의 변화를 그리는 영화인 것이다.

프로젝트의 제1기를 마치고 중국에 돌아갔을 때는, 중국과 일본의 긴장이 고조된 시기이기도 했다. 야심찬 한명의 아티스트로서 이러한 정세를 활용하여 퍼포먼스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역사와 예술사에 흔적을 남기고 싶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때 나는 조금 미쳐있었다! 그 생각이 옳은지 그른지, 혹은 결과가 어떤지에 관계없이,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면 그걸로 괜찮다고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영상의 처음 부분은 실제 나의 내면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중국의 ‘애국심을 가진 한 젊은이’인 ‘나’는, 야스쿠니신사에서 퍼포먼스를 함으로써 ‘일본’을 자극하고 공격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일본에 와서 내가 본 것은, 예의바르고 헌신적으로 일하며 생활을 즐기는 일본인과 깨끗한 거리였다. 게다가 많은 일본인은 정부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어서, 일본에 대한 호감이 생길 정도였다. 막연하고 포괄적으로 갖고 있던 ‘일본’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은 점점 사라지고, 구체적인 개인에 대한 흥미가 생겨났다. ‘나’는 점점 목적을 상실해 갔다. 전쟁을 체험한 세대부터 순진한 소년들에 이르기까지, 보다 많은 일본인들과 접하면서 각자가 강렬한 생각들을 갖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교육의 힘에 의한 것이었다. 내용은 서로 다를지언정, 전쟁 중이든 지금이든 변함없이, 교육은 정부와 국가에 의해 의식적으로 통제되고 있다. 88세의 노인은 중국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것은 어렸을 때 학교에서 중국은 나쁜 나라이고 중국인은 악인이며 천하다고 배웠기 때문이었다. 13세의 소년은 중일전쟁에 대해 잘 모른다고 했다. 교육의 배후에는 통제하는 국가가 있는 것이다. ‘나’는 점점 눈을 떴다. 일본인이 잔인한 것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가 잔인하고 광기어린 일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국가에 의해 통제되고 인간성의 연약한 부분이 이용되어, 무수한 국민이 전쟁이라는 지옥으로 밀려떨어지는 것이다….

부토의 거장 다나카 민의 작품을 보았을 때, 몇 번이고 멍한 채로 있었다. 마치 내가 무대 위에 있는 것처럼, 다나카의 신체와 나의 신체가 너무나도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20년 후의 내 모습으로 보였던 것이다.

문화대혁명 시절의 홍위병은, 일본군과 전혀 다를 바 없다. 어머니에게 그 시절에 대해 물어보았을 때, 당시 홍위병의 한사람으로 천안문에서 모택동주석과 만난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우리들의 부모 또한 모택동 사상을 열렬히 따르면서 잔인한 짓을 한 것이다). 자료를 읽어나가면서 중국정부에 의해 감춰진 많은 역사적 사실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 중일 전쟁은 국민당군이 전쟁을 일으켜 희생을 불러온 것이지만, 최근 중국의 텔레비전에서 줄줄이 방영되고 있는 항일 드라마에서는, 팔로군과 게릴라 부대가 일본인을 공격하는 내용으로 변해 있는 것이다…. 지금의 중국정부는 중국인들에게 무엇을 제공하고 있는 것일까? 오염, 강제철거, 사기, 세뇌……. 그 때, ‘나’의 유명해지고 싶다는 야심과 욕망은 이미 무너져 버렸다……. 나는 국가의 어떠한 악행에 조금이라도 가담하고 싶지 않고, 국가의 꼭두각시 인형이 되고 싶지 않다. 우선, 야스쿠니 신사에서의 계획을 그만두기로 했다. 그 장소를 선택한다는 것은, 자기표현이 아닌 정치의 도구로 전락할 뿐이기 때문이었다. 평범한 거리에서 다른 방법과 주제로 일반인들을 향해 퍼포먼스를 하자. 그것이야말로, 내가 가진 예술의 힘이자, 아티스트로서의 방법과 선택인 것이다.

“중국인도 일본인도 꼭두각시 인형이 되지 말자!”

마지막으로, 자유의 상징을 의미하는 날개를 달고, 도쿄의 고층빌딩 위에 서서 하늘과 거리를 내려다본다.
“분명히 나는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역사’가 대체 뭐지? 그것은 언제나 승자가 남겨온 것이다. 우리들은 그것보다도, 깨끗한 공기과 식량이 필요하다”

이 1인칭으로 만들어진 영화는, 나의 리얼한 정신적 변화이기도 하고, 또한 감상자도 간단히 ‘나’와 동화될 수 있을 것이다. 중국과 일본의 현재 정세하에서, 이런 작품을 제작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국민의 편견과 오해의 해소, 개인 간의 교류, 인간성 안에 있는 자성과 양심의 탐구에 작은 기여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첫 체험 ―― 리닝, 도쿄에서 ‘구이즈’찾기

아티스트 리닝은, 고향인 지난시 특유의 먼지투성이 공기와 현대중국의 특수한 정치체재 하에서 받은 정신적 스트레스와 낙담, 울분과 절망을 가지고 도쿄로 왔다.
현대 중국인에게 있어서, ‘일본’이란 분명히 가장 익숙한 기호다. ‘일본’에 대한 중국인의 생각을 간단히 말하면, 1937년부터 1945년 사이에 벌어진 전쟁일 것이다. 영화와 드라마에서의 ‘구이즈’(역주. 일본인에 대한 차별적 호칭)는, (예전에는 중국인 배우가 상스러운 말라깽이를 연기했지만, 최근에는 중국에서 생활하는 젊은 일본인 배우가 ‘구이즈 배우’로 등장한다), 틀에 박힌 이미지를 끊임없이 주입시키며 나라 전체를 장악하고 있다. 리닝은 일본에서 ‘구이즈’를 찾고자 했지만, 그가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그와 동일하게 희로애락을 느끼고 개성과 감정 또한 서로 다른 일본인들 뿐이었다. 결국 그가 갖고 있던 정형화된 이미지는 무너졌고, 그 지점에서 그는 <해소>를 구상하게 된 것이다.

물론 작품의 구상으로서는 비교적 단순한 것이지만, 중국과 일본의 현 상황에 있어서 이러한 작품은 대단히 특별하게 느껴진다. 리닝은 (작품의 오프닝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알맹이가 없고 폐쇄적인 중국의 민족주의를 비꼬는데, 그 시점은 아이다 마코토가 보여주는 일본 민족주의에 대한 풍자와 비슷하면서도 서로 다르다.

국가, 민족, 인종의 개념이 ‘해소’되고 개인의 지위가 향상되면, 개인은 두번 다시 ‘집단’에 휘말리지 않을 것이다.

유행하는 우스개소리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느 영어시험의 작문 주제가, ‘식량부족 문제에 대해 당신 개인의 견해를 기술하여라’였다. 아프리카의 학생은 작문을 하지 않고 되물었다. “식량이 뭐죠?” 미국의 학생도 되물었다. “부족이라는게 뭐죠?” 중국의 학생은 “개인의 견해가 뭐지?” 라고 했다는.
집단주의가 숭배되는 중국에서 개인의 개념은 교육시스템과 이데올로기, 관습에 의해 교묘하게 파괴된다. 이 중압적인 체제 아래서 살아가고 있는 아티스트로서, 리닝이 중국의 문화에 대해 반기를 드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의 초기 작품은 그 구상이 비교적 단순하고 표면적이지만, 활동의 시간과 규모 등에서 제한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의 주제가 집단의 와해이고 틀에 박힌 이미지와 범주화의 불식이기는 하나, 리서치와 창작의 방법론은 기본적으로 아직 범주화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그는 인터뷰의 대상자의 연령을 정하면서 그 개인이 그 연령대의 대표이기를 기대하고 있다. 예를 들어, “당신들 일본인은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너희 일본의 중학생들은 무엇을 좋아해?”와 같이 질문을 할 때, 대상자에게 그들이 속하는 그룹의 대표로서의 대답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 내용에는 명백한 유도질문들도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해서는 귀중한 개인과 개인의 진짜 교류가 불가능해지고 인터뷰는 표면적인 것에서 그치고 마는데, 이는 그의 작품 ‘해소’가 애초에 의도한 목적과는 모순되는 것이다. 시간 등의 제약이 없었더라면 리닝의 인터뷰는 더 질이 높고 깊이있는 것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80년대 이후 중국의 아티스트는 개인을 부각시키고 집단을 와해시키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문화대혁명에서 있었던 민중운동의 어두운 그림자가, 사람들의 마음을 아직도 뒤덮고 있다. 체제하의 주류 발언들에 의한 압력에 대한 반동으로, 최근 30년간 중국 현대예술은 사회적 책임, 예술의 정치화에 저항해 왔다. 리닝의 생각 또한, 기본적으로는 이러한 큰 흐름에 접해 있다. 이것은 서양에서 1968년 학생운동이 끼친 영향과도 유사하지만, 중국의 특수한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이러한 류의 저항은 아직도 가치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번 r:ead 프로그램의 목적은 교류에 있다. 문화교류에서는 틀에 박힌 이미지로부터 벗어나 민족에 대한 편견을 던져 버리고 ‘개인과 개인’이 마주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첫걸음이 될 것이다. 개인간의 교류가 깊어져야 그제서야 점차 깊이 있는 사상이 생겨날 수 있다. 개혁개방정책이 시작된지 30년이 지났지만, 중국은 상대적으로는 여전히 폐쇄적인 국가다. 따라서 이번 r:ead는, 중국의 아티스트에게 있어서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에 의해 역사는 반복된다II – 역사를 리셋하기

나는 레지던시의 두번째 체재기간에도, ‘민주주의에 의해 역사는 반복된다’는 테마를 이어나갔다. 왜냐하면 r:ead의 최종 발표일이 2013년 3월11일이었기 때문이다. 2011년의 그날, 일본의 일부 역사가 리셋되고, 많은 것들이 3월12일부터 새롭게 계획되고 평가되었다. 그리고 2012년 선거에서 아베씨가 두번째로 일본의 총리가 되었다. 5년전에, 즉 그가 총리였던 2007년 3월11일은 평범한 날이었다.

그래서 나는 2007년 3월11일자의 아사히신문, 마이니치신문, 요미우리신문, 니혼경제신문을 찾아 보았다. 그리고 그 신문들을 전시하고, 발표를 들으러 온 사람들이 낭독하도록 하는 두 파트로 나누어 발표를 진행했다. 이를 통해 2007년 3월11일이 반복되어 강조되고, 시대에 따른 차이가 하나둘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당시의 국제정치에서는 미국이 아직 부시정권이었고, 휴대전화는 지금과 비교해서 구식이었으며, 건설회사의 광고에는 아직 희망이 넘치고 있었다. 그리고, 종군위안부 문제의 결의안이 어떻다든가, 중국의 태도가 어떻다든가…

낭독을 듣고 있으면 일종의 향수를 느끼게 될 뿐만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잊어버리고 있는가에 대해서 놀라게 된다. 우리들은 현재의 상황들을 판단할 때 자신의 기억이 완벽하다고 느끼기 십상이지만, 그것은 전혀 얼토당토 않은 것이다. 누구도 5년전의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할테니까.

2011년 3월11일, 일본의 어느 부분의 역사는 리셋되었지만, 이러한 종류의 리셋은 바로 예술을 하는 창작자들이 작품 안에서 시도하는 것이기도 하다. 작품을 통해 관람자를 새로운 계획과 평가가 이루어지는 상태로 이끌어가고, 창작자 자신도 매번 리셋되어 새로운 자료를 수집하고 다음 작업에 임하게 되는 것이다. 이번 레지던시를 통해 아티스트와 큐레이터는 어느 정도 리셋 되었다. 따라서 나는 각자의 다음 작품을 통해 야기될 대화들을 기대하고 있다.